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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2호] 대학시간강사는 프롤레타리아인가-배제된 대학 안의 유령이 청년 대학원생에게



대학시간강사는 프롤레타리아인가

- 배제된 대학 안의 유령이 청년 대학원생에게




임순광_ 민주노총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위원장, 前 경북대 비정규교수




대학, 기업, 비정규교원

     한국의 대학은 일종의 ‘위장형’ 비영리조직이다. 즉 가치, 지배구조, 운영원리와 방식 등에서 대학은 기업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요즘은 취업률이 특정 학과나 학문의 존폐마저 결정하는 판이니 두말 해 무엇하랴. 중앙대 사태나 청주대 사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대학이 기업이라면 교육과 그를 통한 상징적 자산(졸업장을 포함한 각종 인증문서와 학벌 등)은 대학이 제공하는 ‘상품’이다. 그 상품을 만드는 데 필수적 존재가 ‘교원’이다. 대학은 교원과 교직원을 활용하여 교육서비스(졸업, 교직, 전공 인증 등)를 제공하는 대가로 ‘등록금’을 받는다. 등록금과 각종 정부지원금과 대학병원 운영을 통해 얻는 소득을 기반으로 전국의 대학이 운영하는 1년 예산은 약 36조 원에 달하는데 이는 국방 예산 수준의 규모이다. 10조 원 가량 쌓여있는 적립금과 연간 1,500억 원에 달하는 입시전형료 등은 일종의 보너스다. 이젠 적립금으로 부동산이든 펀드든 투자(투기!)할 수 있으니 ‘땅 짚고 헤엄치는 금융자본(손실을 보면 등록금 등으로 메꾸면 되니까!)’으로 대학이 운동하기도 한다.

     대학이 몸집을 부풀리고 기업의 성격을 강화하면서 인건비 절감 욕구는 마치 ‘흡혈귀의 유혹처럼’ 다가온다. 인건비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고액을 줘야 하는 정규교원의 숫자를 가능한 한 작은 규모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 해 적립금이 가장 많은 대학 중 하나인 이화여대조차도 법정교원확보율이 그리 높지 않다. 다른 방법은 어중간한 신분의 비정규교원을 전임교원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최근 정규교원에 비해 연봉이 적고 신분보장이 불확실하며 권리도 제한적인 비정년트랙교수(예: 교육중점교원, 연구중점교원, 교육지도교원, 산학협력교원 등)가 교육부에 의해 전임교원확보율에 포함(관련법은 2011년 6월 29일에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이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 서강대의 전임교원확보율이 70.9%(2012년)에서 76%대로 급증(2013년부터)한 것이 비정년트랙교수의 채용과 과연 무관한 것일까. ‘정규교원의 수를 적게 유지’하거나 ‘어중간한 중규직 교원을 양산’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비정규교원을 가장 낮은 임금과 가장 불안정한 고용상태에서 최대한 많이 쓰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원리에 최적화된 대학 시간강사제도는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자 포기하기 힘든 축적 구조이다.


대학 내 또 하나의 프롤레타리아, 시간강사

     계급(class)의 어원은 라틴어 클라시스(Classis)이다. 클라시스는 ‘무엇을 나누고 구분하며 분류한다’는 의미다. 로마의 6대 왕인 세르비우스(Servius Tullius)는 세제 및 군제 개혁을 위해 로마의 모든 시민들을 가문, 나이, 살고 있는 땅 등에 따라 제1계급에서 제5계급까지 나눈 뒤 제5계급에도 포함되지 않는 ‘재산이 아무것도 없고 자식만 있는 프롤레타리아’(군에 입대시킬 아들 외에는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을 비하하는 의미)를 더해 6개 모둠으로 구분하고 이를 클라시스라 했다. 가장 부유한 제1계급은 군역을 많이 지는 대신 다른 계급과 프롤레타리아의 투표권(95표)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과반이 넘는 투표권(98표)을 행사했다. 서양에서 오늘날처럼 정치와 계급을 연관지어 계급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1760년대 중반부터이고 이후 신분과 계급에 대한 개념상의 혼란은 끝났다. 

     계급은 초기에 불평등을 설명하는데 자주 활용되었다. 맑스(K. Marx)는 ‘계급’을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생산 수단의 소유 여부, 즉 생산관계에 기초해 계급을 정의했다. 생산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생존을 위해서 노동력을 판매하면서 ‘착취당하는 임금 노동자’인가 아니면 이윤을 얻기 위해 착취하는 위치에 있는가가 어떤 계급인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이 둘은 착취관계 때문에 서로 적대적이며 한 사회 구성체에서 대표적 양대 계급이 된다. 자본주의에서 이윤을 착취하는 쪽은 자본가이고 착취당하며 임금으로 연명하는 쪽은 프롤레타리아이다. 대학 시간강사들은 맑스(K. Marx)적 계급론에서는 임금노동자계급에 속한다. 베버(M. Weber)의 계층론을 적용하면 대학 내에서는 자원 보유량, 지위, 권력 모두 적으므로 불평등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대학 외부에서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까지 적다고 할 수는 없다. 경제적 지위와 사회적 지위가 불일치하는 존재인 것이다. 라이트(E. O. Wright) 식으로 보면 대학 시간강사는 半자율적 임금소득자이면서 모순적 계급위치에 있는 자이고, 골드소르프(J. Goldthorpe)의 논의를 따르면 서비스계급에 가깝다. 다만, 시간강사의 부르주아화 명제는 극소수에게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 강사법 시행령 공청회, 저자제공


     누군가는 대학 시간강사를 지식자본주의에서 ‘향숙련화’되어 사회적 에토스를 발달시킬 수 있는 존재로 볼 수도 있다. 드러커(P. Drucker)나 벨(D. Bell) 등의 논의를 빌리면서 말이다.  지식이 가치를 만들어 낸다며 인적 자본을 강조하는 시대에 고등교육부문에서 지식을 생산하고 전수하는 존재로서의 시간강사는 생각만 해도 고상한 지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이런 지식이 고등교육만의 성과일까? 또한 지식노동자들이 대학 자본에 맞서 대등한 권력을 가지고 손쉽게 대학을 골라 일하며 사회적 에토스까지 발전시키고 있을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의 대학은 빠르게 보통교육기관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식노동자는 사실상 일종의 서비스 노동자에 불과하다. 이들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보는 것은 난센스다. 한국의 시간강사들은 대학 자본을 위한 지식 공장의 저임금 일용 노동자로 취급되고 있으며 사회적 에토스도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이는 존재들이다. 잘 봐줘야 지식 프롤레타리아 또는 프로페서리아트에 불과하다. 연봉이 많지 않고 정년 보장이 쉽지 않은 많은 사립대학의 정규 교원들도 돈을 조금 더 받을 뿐 시간강사와의 본질적 차이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서강대 시간강사들의 2013년 평균 강의료는 약 6만 원이다(교수신문 기사 참고). 정규교원처럼 1주일에 법정강의시수 9시간을 담당한다고 가정을 해도 연봉이 약 1,620만 원에 불과하다(1주일×9시간×15주×2개 학기=1,620만 원). 대략 월 135만 원이다. 이걸로 정상적인 교수․연구자로서의 생활이 될까. 서강대의 강의료는 다른 사립대에 비해 높은 편이고, 1주일에 9시간 이상을 강의하는 시간강사의 수는 그리 많지도 않다. 이 점을 감안하면 대학 시간강사들이 겪고 있을 생활고는 더욱 분명해진다. 

     대학 시간강사들은 강의가 있는 날 주로 어디에 머물까. 서강대에는 시간강사를 위한 공동연구실이 몇 개나 있는가. 수업 준비를 하거나 잠시 휴식을 취할 공간은 얼마나 되며 거기서 어떤 편의를 제공할까? 대학원실에 더부살이하거나 자동차나 벤치 또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시간강사가 더 많은 건 아닐까? 대학 시간강사들은 참정권(예: 전임교원과 같은 강좌 개설 신청권, 총장이나 학장 선출권, 재정심의권, 공간결정권 등등)은 있는가? 대학 시간강사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징계라도 받는가? 소명기회도 제대로 없이 바로 해고 처리되는 건 아닌가? 항간에 문제가 되었던 해고 통지 문자조차 못 받고 연락이 없으면 계약해지되는 상황에 놓여 있지는 않은가? 만일 이런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프롤레타리아일까. 

     대학 시간강사는 청소노동자, 시설노동자, 조리노동자, 어학교육원이나 전산교육원의 강사처럼 직접고용되건 간접고용되건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으며 총장 선출권은 고사하고 고용안정조차 기대하기 힘든 처지에 높인 대학안의 또 다른 프롤레타리아이다. 이들에 비해 대학에서 자본가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학교의 운영을 통해 이득을 얻는 법인 이사진과 대학의 지배구조에서 최상층에 있는 자(총장을 비롯한 주요 보직교수)들이다. 


저항의 또 다른 주체, 대학 시간강사

     다른 측면도 살펴보자. 노동자 계급의 주체성과 변혁성을 둘러싸고 여러 논의들이 존재한다. 특히 알뛰세르(L. Althusser)와 달리 톰슨(E. Thompson)은 ‘노동계급의 형성’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그람시(A. Gramsci)는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기적 지식인론을 내세웠다. 들뢰즈(G. Deleuze)는 궤를 달리해 소수자와 다수자라는 기준을 들여왔다. 그에 따르면 다수자는 이미 권력을 장악했고 권력을 확장할 통로를 쥐고 있다. 

     대학 시간강사는 어떨까?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은 1990년에 법외노조로 출발하여 1994년에 합법화되었고 1995년에 민주노총에 가맹하였다. 출범당시의 노동조합 이름은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전강노)이었으나 2001년 이후 시간강사 이외에도 10여 가지 명칭을 가진 비정규교수들이 급증하면서 이들을 포괄하기 위해 현재처럼 개칭하였다. 줄여서 ‘비정규교수노조’ 또는 ‘한교조’라 읽는다.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이상 국립대), 대구대, 성공회대, 성균관대, 영남대, 인제대, 조선대(이상 사립대) 등 전국에 총 9개 대학 분회가 있다. 전강노는 1990년대에 의미있게 활동하였으나 합법화 과정과 자본과의 대결 국면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오랜 기간 동안 2개의 분회(성균관대, 영남대)로 명맥을 유지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한교조로 바뀐 뒤 한국 비정규노동자 조직률 2%를 약간 웃도는 수준의 노동조합가입률(전국 시간강사 7만 여 명 중에서 1,500여 명이 월 회비를 납부하며 노동조합에 가입)을 보이고 있다. 이 노조 조합원 대부분이 시간강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시간제노동자 조직률보다는 월등히 높은 비율이다. 한교조 전환 이후 시간강사들은 농성, 파업, 집회를 이전보다 조직적으로 개최하며 개별 대학뿐만 아니라 국회나 정부를 상대로 한 대응도 수행한다. 

     2001년에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영남대학교분회가 학교 측과 단체협약을 맺은 뒤 2004년과 2008년에 경북대분회가 혁신적인 단체협약을 추가로 체결하였다. 100일을 넘긴 천막농성과 50여 일 간의 파업이 남긴 성과물이었다. 비정규교수를 위한 공동연구실을 대거 확충하고, 신분증을 강의교수로 하여 발급하고, 학칙 기구인 교육환경개선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안에 학생, 비정규교수, 학교 측이 동수로 참여하며, 전임교원처럼 비정규교수도 기초교육원에 강좌개설신청을 하여 심의를 거쳐 강좌를 담당하는 길이 열렸다. 노동조합 인정이나 노조 활동 보장 및 조합원들을 위한 학술․연구활동비 지원과 임금 대폭 인상 역시 당연히 따라왔다. 이 모든 결과물은 몇몇 지사의 충정이나 즉흥적 대응 또는 일부 기득권 집단의 시혜 덕분이 아니라, 저항 주체들이 물밑에서 철저하게 준비하고 학내외 연결망을 촘촘하게 한 뒤 신속 과감한 저항을 끈질기게 함으로써 성취한 것이다. 

     한교조는 이제 전국산별단일노동조합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며 대정부 대국회 투쟁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2010년 수 개 월에 걸친 교육부 앞 농성과 집회 및 대학별 파업 등을 통해 1만 명 이상의 국립대 전업시간강사 임금을 2배 가까이 끌어 올리는 데 성공하였다(2010년 시간당 42,500원->2013년 시간당 80,000원). 2012년에는 조합원 수십 명이 구속과 손배를 각오하고 교육부의 시간강사법 시행령 공청회 장소를 점거농성함으로써 공청회 자체를 무산시켰고, 파업이 가능한 5개 대학이 모두 해를 넘기며 파업 투쟁하여 승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시간강사법 시행 저지를 포기없는 투쟁으로 2012년 11월에 쟁취하였다(2012년 11월 23일에 국회 본회의에서 시간강사법 시행유예법 통과). 모두를 놀라게 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2013년 가을에 한 번 더 시행이 유예되는 법이 통과되었음에도 ‘시간강사법’(교원의 범주를 다룬 고등교육법 제14조 아래에 별도로 ‘강사’에 대한 각종 차별적 조치를 규정한 고등교육법 제14조의2)은 아직 폐기되지 않았다. 더욱이 2011년 6월에 통과된 ‘반쪽짜리 교원 양산법’(교원의 임무에서 교육․지도, 학문, 산학협력 등을 별개로 구분함으로써 한 가지 기능만 수행해도 전임교원으로 간주될 수 있도록 하여 현재의 비정년트랙교수의 전임교원확보율 포함 꼼수를 가능하게 만든 고등교육법 제15조2항)에 의해 비정년트랙 교수가 급증하고 있다. 또한 교육부가 주도하는 각종 대학평가지표에서 전임교원확보율, 전임교원강의담당비율 등이 편법으로 운영되어 구조조정의 폐해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 요인들이 서로 맞물려 불안정교원의 양산, 정규교원 노동강도 강화, 시간강사 대량해고, 학생 수업권 침해, 대학원생의 교원 진입 가능성 하락, 국내 대학원 붕괴 등이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한교조는 이와 같은 현실에 맞서고자 교수노조, 민교협, 전교조, 공공운수노조서경지부, 학생단체들과 함께 대학구조조정대응공대위를 결성하고 2015년 3월 27일 국회에서의 ‘대학구조조정 폐해 고발대회’를 시작으로 4월 24일 더 많은 비정규직, 더 쉬운 해고, 더 적은 임금을 야기하는 시간강사법 폐기 촉구 총파업, 4월 27일 전국 순회 토론회(부산대), 4월 29일 국회 앞 대학구조조정저지 대학 주체 결의대회(당일 대회 후 국회 인근에서 수도권 교수․연구자-한교조 간담회도 예정)를 함께 준비하고 있다. 또한 5월부터 국회를 상대로 한 집중 투쟁과 6월22일 상반기 국회 대결집 투쟁을 통해 시간강사법 폐기, 전임교원강의담당비율 폐지, 올바른 고등교육법 개정 등을 이루어 내는 단초를 마련할 예정이다. 



2013년 1월, 경북대학교 비정규교수 결의 대회, 저자제공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장벽은 높다. 최근 진주, 전주, 수도권 등에서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증가하고는 있지만 전국적으로 볼 때 노동조합가입률이 너무 낮다. 시간강사 대부분은 유사 의식 수준도 제대로 못 갖추고 개별 대학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비정년트랙교수를 선발하거나 강의전담교수를 뽑을 때 많은 이들이 보이는 모습은 ‘각자도생’이다. 어차피 정규교수를 안 뽑는데 기간제교수라도 잠시 되고 봐야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다. 전국에서 적은 수의 일자리에 한꺼번에 달려들다보니 연대를 통한 공동행동은 더욱 어렵다. 일부 비정규교수는 여러 대학에 합격해 놓은 뒤 그 중에서 좋은 자리를 골라 떠나고, 학교는 개강 이후에라도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학생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 마치 입시의 폐해를 보는 듯하다. 조합원들도 과거에 비해서는 연대 의식이 많이 생성되었지만 아직 대학 체제의 전면적인 개편과 대학의 사회화까지 질적 도약을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에 반해 조직되지 않는 시간강사들 상당수는 자본가의 유기적 지식인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의문이 든다. 다수자의 편에 서서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저항하지 않는 시간강사 상당수는 아직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앞 장면에 나오는 소떼, 체제에 갇힌 상태에서 먹고 살기 위해 때가 되면 한 곳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무한질주집단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권력을 갖지 못한 다수 말이다. 불행히도 본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도!


피해갈 수 없다면 변화를 조직하라

     대학원생과 비정규교수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본과 권력에 의해 교수 노동시장구조가 더욱 불안정해 질 것이라는 점이다. 요즘 말로 하면 ‘노동시장 구조개악’(자본의 용어로는 ‘구조조정’)이다. 국․공립대 법인화와 같은 대학 기업화가 가속화되면 2002년 도입된 교수 계약제와 얼마 전부터 전면화되고 있는 상호약탈적 교수 연봉제 등이 맞물려 교수들의 지위가 급락할 것이다. 일부 사립대학의 교원 재임용심사 탈락률은 미국보다 훨씬 높은 30%대에 육박하고 정년을 보장받지 못하는 교원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자본과 권력이 책임져야 할 실업률을 대학에 전가하여 학생취업률로 교수를 평가하고 안정적 학문 탐구를 할 수 있는 기반은 계속 침식되어 간다. 이 과정에서 이사회에 가까운 교수들은 ‘경영자’와 비슷한 계급적 위치를 차지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교수들은 중간계급의 하층에 끼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은 거기에서 약간의 신분 상승을 꾀한 과거의 시간강사들(예:비정년트랙교원)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규 교원 대부분은 과거에 모순적 계급에 가까웠지만 앞으로는 그런 위치를 차지하는 이들의 수도 줄어들 것이다. 

     현재와 같은 대학 구조 개악이 계속 이루어질 경우 대학에서 더 많은 프롤레타리아가 창출된다. 교원이기 때문에 단체행동도 하기 힘든 그런 지식 프롤레타리아말이다. 현재 비정년트랙교수는 고등교육법 14조2항의 조교수 이상 전임교원이기 때문에 합법노조활동을 하기 어렵다. 시간강사법이 시행될 경우에도 강사는 합법노조활동이 가능하긴 하지만 상당한 위축을 당할 수밖에 없다. 교원과 관련된 여러 법적․제도적 장치들이 발목을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있어도 제대로 대응하기 힘든데 노동조합활동조차 제대로 못하게 될 사람들이 겪게 될 상황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눈에 보일 것이다.

     현 정권(어쩌면 신자유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다음 정권까지도)은 2016년 1월 1일 예정된 시간강사법 시행을 통해 '정규직교수로 뽑혀야 할 사람을 강사라는 이름의 비정규직교원으로 뽑히게 하여 더 많은 비정규직교수를 양산하고(정규직의 비정규직화=더 많은 비정규직), 강사의 임금 및 근로조건을 정규교수처럼 법률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학자율로 함으로써 시급이든 월급이든 기존 교수의 절반 정도만 주도록 부추기며(더 적은 임금), 강사의 계약기간을 1년 이상으로 법에 정하여 정규교수보다 더 쉽게 해고토록 하고, 강사 일부에게 교원 의무시수 규정을 적용해 강의몰아주기를 하여 수 만 명의 시간강사가 강단에서 쫓겨나도록(더 쉬운 해고와 대규모 정리해고) 시도하고 있다. 

     시간강사법이 시행된다는 것은 대학원생의 미래가 박탈된다는 뜻이다. 혹시 시간강사 대량해고가 발생하여 현재의 대학원생인 자신이 진입할 통로가 넓어질거라 착각하진 않는 게 좋다. 대량해고는 필요인원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가 운 좋게 그 인원 안에 들어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쫓겨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가 시간강사법이다. 악법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대학원생은 거의 없다. 구조를 개악시켜 놓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득을 사유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도 이해관계에 충실하지도 않는 태도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극히 소수지만 다른 대학의 학생 일부가 시간강사법 시행에 찬동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자. 대학 시간강사는 프롤레타리아인가? 뭐라고 포장을 하든 임금노동자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라 할 수 있다. 저소득자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작업 현장(강의실, 일부 연구 영역)에서의 권력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대학 자본이나 정규 교원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므로 지식 프롤레타리아쯤으로 볼 수도 있다. 그 사람의 의식이 어떻건, 출신이 어떻건, 지향이 어떻건 작업장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자원 보유 상황 및 착취 관계를 감안한다면 시간강사는 누가 뭐라해도 프롤레타리아이다. 의심스러운가? 그럼 시간강사로 한 번 살아보라. 쉽게 답을 찾게 될 것이다.

     시간강사법으로 비정규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은 프로페서리아트의 미래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상당수는 해고되거나 산업예비군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살아남은 자 일부는 운 좋게 임금이 조금 오를 수도 있겠지만 정규직으로의 입직구는 더 줄어들 것이다. 정규 교원을 더 안 뽑을 테니까. 또한 정규 교원 상당수도 대학 기업화 경향과 구조조정의 흐름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화 될 것이므로 시간강사와 대학원생의 신분 상승 기회는 더 적어진다. 이번 조치는 이렇듯 철저히 대학 자본 축적 공고화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비참한 시간강사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악어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내야 하는가?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든 ‘노동자로서의 자각’이 필요하다. 계급의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투쟁이 변질될 수밖에 없다. 최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유사의식을 갖는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조직화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화되는 교원들과의 연대, 계급의식에 입각하여 투쟁하는 학생․학부모 단체와의 연대, 대학 자본에 의해 착취받는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바탕으로 한 연대체 건설과 공동투쟁을 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대자적 의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대학 자본에 맞서 대학 자체를 사회화하는 방향으로 오랜 세월동안 정면돌파해야 한다. 공부와 투쟁을 묵묵히 병행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지식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야할 길이고 그렇게 조직하고 투쟁해야 희망이 현실이 된다. 대학원생과 시간강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끌거나 아니면 떠나거나’이다. 이왕 학문의 길로 들어왔으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 번 해 보자’는 심정으로 함께 하면 의외로 길이 열릴 지도 모른다. 우리도 우리가 여기까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니 대학원생이여, 피해갈 수 없다면 변화를 조직하라.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현 시기에 필자가 대학원생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다. 4월 29일과 6월 22일 국회 안팎에서 함께 더 큰 희망을 만들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