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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4호] 다양한 삶의 가치,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한가?

다양한 삶의 가치,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한가?


서동은 _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신학이 된 경제학

돈이 우리 시대의 신(神)이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서양 중세 시대에 사람들이 신에게서 안정감을 찾고 모든 가치의 근원을 찾았듯이, 오늘날 많은 사람은 돈에서 마음의 안정감을 찾고, 돈을 중심으로 모든 가치의 서열을 매기며 살아가고 있다. 성당은 이제 화려한 백화점으로 대치되어, 백화점에서의 소비가 성당이 주는 누미노제(Numinose)의 감정을 대신하고 있다. 근대의 이신론자(deist)들이 자연법칙으로 신의 질서를 대치하고 사물의 질서와 법칙을 평균화한 것처럼, 근대 이후 자본주의 시대에 사람들은 돈의 법칙에 따라 사물의 질서와 규칙을 바꾸어 놓았다. 모든 사물이 돈의 양적인 가치에 따라 서열화되고 분할된다. 그 자체로 좋은 것, 그 자체로 충분한 것, 그 자체로 나에게 좋은 것이라는 가치는 사라지고 사물과 인간의 질서가 돈의 양에 따라 구획된다. 계급에 의한 군대의 위계서열처럼, 돈의 양에 따라 사람들의 위계도 결정된다. 신을 정점으로 놓고 생각하던 신의형이상학 시대는 뉴턴으로 대표되는 수학의 형이상학 시대를 지나 이제 돈의 형이상학 시대로 바뀌었다. 경제학이 이제 우리 시대의 신학이 된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물으면, 정말 진지하게 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할 만큼 지금 우리는 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케인스의 오류

경제학자 케인스(J. M. Keynes)는 자본주의의 바탕에 깔린 동기가 돈벌이에 대한 강렬한 이끌림과 돈을 좋아하는 본능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인간의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면 더는 이러한 충동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케인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가지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침팬지의 실험에서 보면, 침팬지는 보통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바나나를 잘 나누어 먹는다.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양의 바나나가 주어지면, 이전과는 다른 행동을 보인다. 갑자기 다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먹을 수 있는 파이가 커지면 잘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비교해서 더 가지려고 한다. 인류는 주변 사물을 가공하여 사용가치로 만들고 또한 잉여 생산물을 바탕으로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전환시키며 살아왔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재화는 사용이나 필요와는 다른 독특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사람들은 사용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것에서 벗어나 교환 가능성을 미리 내다보게 되고, 그 가치에 주목하게 된다. 이에 따라 사용가치의 만족에서 주어졌던 충분함의 가치는 상실된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소유하는 데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는 데 관심을 둔다. 남들이 가졌기 때문에 나도 갖고 싶은 밴드웨건 재화(bandwagon goods),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갖고 싶어지는 속물성 재화(snob goods), 비싸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갖고 싶은 베블런 재화(veblen goods)등의 등장은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현대인들의 이러한 재화 소비는 언젠가 충분함에 도달하면, 더는 욕구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케인스의 오류를 잘 보여준다.


소유와 행복의 역설

경제학이 신학이 된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소유와 행복의 역설에 빠져든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충분한 것이 아니라 가질수록 부족하다고 느끼기에 소유가 곧 행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행이 되는 역설에 빠지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미하엘 엔데의『모모』에 나오는 회색 신사에게 시간을 저당 잡힌 사람들처럼 매 순간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시간에 쫓겨서 살고 있다. 시간은 저축할 수 없음에도 마치 저축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충분함, 여유로움, 한가함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언젠가 충분히 가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살아간다. 매 순간 지금 여기 이 순간의 향유가 주는 충분함의 가치를 망각한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행복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은 흔히 많은 소유가 곧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바꾸어 만약 행복이 곧 소유라고 말하면, 뭔가 행복의 조건에는 소유만 있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때 사람들은 소유가 행복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함에도 우리는 소유를 주어로 놓고 행복을 서술어로 놓은 다음 이를 동치 시킨다. 행복의 가치에는 소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친구 및 가족과의 관계도 있고, 기타 그 밖에 많은 것이 추가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가치의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자주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가치에 떠밀려 이를 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애덤 스미스의 행복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의한 바 있다. 그는 중용의 덕(arete)을 실천하는 삶, 인간이 가진 이성적인 탁월성을 발휘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러한 내적인 탁월성으로서의 좋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이 들어서 자식이 죽거나 어떤 불운을 당한다면, 행복한 삶이라고 할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행복을 한 사람의 평생과 관련되는 일로 간주했으며, 건강이나 좋은 외모 및 경제적인 안정도 행복한 삶을 위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목 곧 정의, 우정 등과 같은 인간적이고 이성적인 덕목을 실천하는 데에 행복이 있다고 보았지만, 경제적인 조건이나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행복한 삶에 있어 경제적인 것이 우선이고, 도덕적인 중용의 덕이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생각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부론』을 쓰기 이전에 쓴『도덕 감정론』에서 스미스는 도덕적으로 적정한 삶 곧 ‘공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가지고 사는 중용의 삶을 이상적인 삶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한 사회에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사회 성원 모두가 빈곤상태에 있다면, 행복한 삶이 온전히 성취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생산인구가 많아지고 생산력이 높아야 국가 전체의 부(富)가 증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만이 곧 행복한 삶이라 보지 않았다. 즉 생산성 증가나 향상이 곧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보지 않은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삶을 먼저 강조하고, 추가적으로 경제적이고 외적인 풍요를 행복한 삶의 필요조건으로 생각했다. 이 두 사상가에게 있어 물질적인 풍요는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일 뿐이었다.


신학이 된 경제학의 해체

오늘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스미스의『국부론』에 나오는‘보이지 않는 손’을 절대화하여 이 경제법칙이 마치 전지전능의 신이라도 되는 듯이 생각한다. 그들은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자유롭게 가격이 형성되며, 국경을 넘어서 자유롭게 시장이 작동되도록 하는 것만이 부(富)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곧 잘 사는 것(=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스미스의 입장과 다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행복의 가치와도 다르다. 오늘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미스가 행복의 가치로 두었던 참된 가치를 재고해야 한다. 도덕적인 가치를 비롯하여 인간 삶에는 다양한 가치가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천적이며 도덕적인 삶이 우리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비록 돈이 되지 않아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사는 삶의 방식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시대에는 누구나 당당하게 자신만의 소중한 삶의 가치를 표출하며 살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학이 된 근대 이후의 경제학적 삶의 문법을 해체(Destruktion)해야 한다. 근대 이후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정당화하며 등장한 부르주아 경제학과 그들만의 리그인 근대 민주주의는 해체되어야 한다. 돈의 양(􃐎)에 의해서만 구획되는 사물의 질서와 가치의 위계서열을 해체해야 한다.


자존감과 다양한 삶의 가치

근대 이후 부르주아 신학(=경제학)과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극단적인 자만심과 자괴감을 강요한다. 많은 사람이 경쟁의 시대에 오염되어 경쟁에서 이기면 극단적인 자만심에 빠져 버리고, 경쟁에서 지면 자괴감과 열등감에 빠져 버린다. 자만심에 빠진 사람은 다른 사람과 소통할 줄 모르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살거나 또 다른 경쟁의 먹이가 된다. 자괴감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 현재의 일에 만족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주체적인 자신만의 삶을 살지 못하고 타인의 삶을‘대신 살기’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간다. 이는 행복 지수에 대한 각 나라의 통계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자만심과 자괴감(열등감)을 벗어나려면 자존감이 필요하다. 자존감이란 극단적인 자괴감과 자만심의 중간 곧 중용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주변의 사물과 타인을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공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가능케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할 수 있고, 단지 특정한 물리적 조건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간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 즉 근대 부르주아의 세계관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말고 이에서 벗어나 나만의 가치와 한 번뿐인 나의 삶 그 자체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視) 말고 나의 내면이 말하는 다양한 가치에 귀를 기울여야(聽) 한다.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왜곡된 시선과 가치를 전복(Umwertung)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