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고

[138호] 잊혀졌던 최재형 선생을 만나다.

잊혀졌던 최재형 선생을 만나다.

 

 

 

권현진_경제학과 박사과정

 

중식당에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오니 다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생가라고 한다. 버스에 탑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생가는 독립운동의 숨겨진 대부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작고 낡아 보인다. 이 곳 우수리스크의 생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숨어서 기거하던 곳이기 때문일까. 한국과 러시아 양국 국기가 그려져 있고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집이라는 설명이 적힌 철제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만 같은 허름한 모양새이다.

가이드분이 최재형 선생님과 생가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안 호기심에 생가의 뒤편으로 가본다. 다소 높게 둘러싸여진 담장 너머로 집 안을 들여다보아도 수풀만이 무성하게 자랐을 뿐,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버스 탑승 시간이 다 되었을 텐데 하는 불안감을 무시하며 생가의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주변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심한 어지러움을 느낀다. 사람들을 불러야겠다. 불러야 되는데... 이 말을 되뇌며 나는 그대로 풀밭에 쓰러진다.

...얼마나 지났을까?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열어간다. 눈앞에 뿌옇게 사람 얼굴이 보인다. 가이드 아저씨인가? 얼마나 누워있었던 걸까? 나 때문에 오늘 일정이 다 엉망이 된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하는 사이 눈은 시야를 완전히 회복한다.

좀 괜찮나 자네?”

웬 할아버지의 중후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대답이 흘러나온다.

, . 괜찮습니다.”

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제는 조금 떨어져 다시 나를 지긋이 쳐다보는 할아버지. 어디선가 본 듯한 그 모습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던 나는 누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묻는다.

최재형...?”

어이가 없을 땐 말이 짧아지나보다. 내 앞에 사람은 우수리스크로 오는 길에 버스에서 시청한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님과 꼭 닮아있다.

지긋이 웃으며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할아버지. 눈앞에 사람이 최재형일 가능성은 없다고 속으로 다짐 아닌 다짐을 하면서도 대화가 계속 진행됨에 따라 나는 어느새 눈앞에 할아버지께 최재형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보면서도 믿지 않기란 더 어려운 것 아닐까.

어떻게 우수리스크의 본인 생가까지 찾아오게 되었는지 궁금한 최재형 선생님을 위해 설명을 시작한다. 양양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발해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한 뒤 하룻밤을 자고 시내 구경을 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최재형 선생님은 첫 행선지가 하바로프스크라는 것을 듣더니 잠시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다.

안중근 그 친구도 회령전투 이후로 수천리를 돌아다녔지...그가 갔던 곳 중에 노브키에프스크나 하바로프스크도 있었어.”

100년이 넘게 지난 일이지만 최재형 선생님에게는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 듯 보인다. 안중근 의사 얘기를 하며 회한의 잠기는 모습을 보니 역시 선생님과의 관계는 남달랐던 것처럼 보인다.

안중근 의사하고 선생님 중에는 어떤 분이 더 연세가 많으신가요?”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나이 질문에 잠깐 당황한 듯 생각에 빠졌던 최재형 선생님은 이내 대답한다.

내가 1860년에 태어났고 안중근 그 친구는 1879년생이니 내가 작은아버지뻘은 되지.”

최재형 선생님은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연배가 꽤 높으신가보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본 프리오브 라젠스크 성당과 무명용사의 비, 아무르 강, 향토박물관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 레닌 광장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오니 최재형 선생님은 회상에 빠져든다.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혁명 이후 최재형 선생님은 연해주의 파르티잔 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후 혁명 진압을 목적으로 구성된 국제간섭군에 일본군이 가담하여 러시아 혁명세력과 결합된 한인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4월 참변이 일어나 최재형 선생님도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한다. 최재형 선생님은 연해주에서의 혁명 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이후 오랫동안 독립운동가로서 본인을 알리는데 방해가 된 사실을 알고 있을까?

선생님, 실례지만 저는 이번 탐방을 오기 전까지 선생님의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언뜻 듣기로는 그것이 정치적 이념 때문이라고 들었는데요.”

질문을 의도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선생님은 말을 이어간다.

분단 상황에서 이념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러시아 사람을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는 것을 주저했겠지. 때문에 나에 대해서 한국인들이 알기 시작한 것은 1990년 한-러 수교가 이뤄지고 난 이후라고 알고 있네. 러시아 자료에 대한 접근이 힘들었던 부분도 있었을 것이고. 아마 나의 출신 문제도 있었을 거야. 나는 노비 출신이니까. 글 꽤나 쓰는 서재필이나 유길준과 같은 양반 출신의 친미 개화파와 나를 보는 시선이 많이 달랐을 거야.

다소 무거워진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나는 하바로프스크 시장 이야기를 꺼낸다.

이번 여행의 큰 목적 중 하나는 러시아산 대게를 사는 것이었어요. 하바로프스크 시장에서도 파는걸 보았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시장을 방문할 예정이라 사지는 않았네요.”

해산물은 바닷가에서 사야 좋은걸 살 수 있지. 블라디보스톡에 가면 아마도 괜찮은 녀석들을 싼 값에 살 수 있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대게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사기로 한 결정이 잘된 것임을 확인한다. 한국보다는 훨씬 싸지만 한 마리에 5만원이 넘는 대게의 가격을 생각하던 나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자금책이었다던 최재형 선생님이 어떻게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선생님께서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후원하기도 하셨고, 항일 의병조직인 동의회도 결성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그런 후원과 결성이 가능할 만큼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으셨나요?”

내가 돈을 번 방법에 대해서 알기 전에, 우선 내가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 위치에까지 갈 수 있었는지를 알아야하겠지.”

선생님은 그 말을 시작으로 유년기에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청년기에 이르기까지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함경북도 경흥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난 선생님은 가난을 피해 아라사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선생님은 시베리아 노우키예프스크에 정착한 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에 귀화한다. 하지만 형수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서 가출한 선생님은 포시예트라는 작은 항구에 쓰러져 잠들게 된다. 천운으로 한 러시아 선장 부부가 선생님을 발견하고 구해주었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부부는 선생님을 좋아하여 양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 집에 입양된 선생님은 상선을 타고 6년에 걸쳐 세계 각지를 항해하면서 근대문물을 익혔다고 한다. 영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항해 당시에 어떤 곳들을 방문하셨나요?”

오대양을 모두 돌아다녔지. 아시아부터 아프리카,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보지 않은 곳이 별로 없어. 싱가포르나 케이프타운 같은 곳의 외국 항구의 주막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것이 참 재밌었어.”

세계를 항해하며 얻은 식견에 더해 선생님은 러시아어를 포함한 유럽의 언어와 음악 및 기계 다루는 법 등 양질의 근대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개화기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럼, 선원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오신 건가요?”

아니, 1877년에 선원 생활을 접고 돌아와 17살에 무역상회 직원으로 취직했지. 그 때 일했던 곳이 바로 자네들이 머물고 있는 블라디보스톡일세. 3년 동안 일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지.”

숙소가 있는 블라디보스톡의 이름이 나오니 반갑다. 최재형 선생님은 이후 1882년부터 블라디보스톡부터 크라스노예를 잇는 전략도로 건설부의 통역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 때 많은 러시아인과 한인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종류의 사업을 하였는데 특히 러시아 군대에 물자를 납품하여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한국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하여 재러 한국인들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고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해 힘썼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황제를 알현하고, 5개의 훈장을 수여받았다고 하니 새삼스레 선생님이 대단해 보인다. 1895년에는 안치에 마을을 중심으로 한 한인 자치 기관의 기관장인 도헌(都憲·volostnoi starshina의 번역어)으로 임명되어 크라스키노에 고등소학교(6년제)를 설립하고 개인 자산을 사용하여 학생들을 러시아 유수 도시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선생님의 애칭이 최 페치카라고 하던데요?”

그래,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곤 했지 허허.”

페치카는 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뜻으로 한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 최재형 선생님의 따뜻한 성품을 칭송하기 위해 사람들이 붙인 애칭이라고 한다.

선생님께서는 독립운동에 처음부터 적극 가담하셨나요?”

아니,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박영효와 이범진 등을 만나고 난 이후 시작되었지.”

1908년 간도관리사 이범윤과 헤이그 특사 이위종, 안중근 등과 함께 재러시아 항일 의병 세력의 집합체인 동의회를 창설하고 총재를 맡은 선생님은 500명에 달하는 부대원들의 이름을 기억할 만큼 애정이 컸다고 한다. 언론활동에도 관심이 커서 <대동공보> <대양보> 등의 민족 언론을 발간하고 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재러 조선인 85백 명을 회원으로 지닌 신한촌의 권업회(權業會)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고 하니 실로 재러 독립 운동계의 대부라는 말이 실감난다.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으로 임명 받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때조차 선생님은 담담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역사의 무게 앞에 내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자 최재형 선생님은 조심스레 나의 일정 얘기로 화제를 전환한다.

그래서 하바로프스크에서 시장을 구경하고는 어디로 갔나?”

네 시장 구경을 마친 뒤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왔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라는 말에 선생님의 표정이 무거워진다. 선생님의 자녀 11명은 선생님의 사후 많은 고생을 하다가 1930년대에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고 한다. 담담하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 부분에 와서 약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다. 횡단 열차에서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던 나의 모습과 목숨을 걸고 열차에 탑승해야했던 선조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대비되자 죄송하고 숙연해진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서 아르바트 거리와 해양공원 등을 둘러보고 하룻밤을 잔 뒤 이 곳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까지 마친 나는 선생님과 헤어져야할 시간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질문을 던진다.

안중근 의사는 어떤 분이었나요?”

좋은 사람이었지.”

이 말을 시작으로 선생님은 말을 이어갔다.

안중근 그 친구를 생각하면 미안한 것이 참 많아.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도록 지시한 것이 나일세. 그래야 일본이 아닌 러시아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었거든. 변호인으로도 미하일로프 주필을 준비해서 재판에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지만...역부족이었어. 결국 안중근은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1910년 처형되었지. 부인과 아이들을 내가 거두었지만 그 친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사라지지가 않는구먼. 살아있었다면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는데...”

<대동공보> 사장실로 안중근 의사가 찾아왔던 날이 생각나는지 선생님은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의 깊은 눈동자 속에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환상을 느낀다.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던 나는 가봐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일어나 선생님께 인사를 드린다.

여러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만약...”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 순간 어디선가 울리는 듯 소리가 들린다.

네 이제 이상설 유허비가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갑자기 주위가 밝아지는 느낌이 들더니 창밖으로 푸른 숲이 넓게 펼쳐진 풍경이 나타난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탐방에 함께 참여한 동료가 선글라스며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며 일어난다.

이 곳에서는 잠시 머물고 버스로 다음 장소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이드분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자 나는 버스에서 잠시 졸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는 가슴팍에 놓인 선글라스를 집어든 채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한다. 얼마 걷지 않아 곧 이상설 유허비의 모습이 나타난다. 외딴 곳에 세워진 유허비를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허전했다. 학생회 분들이 헌화를 한 뒤 다 같이 묵념을 한다. 맑은 하늘 아래 묵념을 하며 나는 생각해본다. `이상설 선생님은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