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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139호]『태일생수』에 나타난 물과 생명의 관계방식 고찰

『태일생수』에 나타난 물과 생명의 관계방식 고찰

 

박혜순 _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책임연구원

 

1. 물과 생명
오늘날 물기근∙물부족 문제는 우리세대가 풀지 않으면 안 될 핵심과제 중 하나이다. 미래세대의 존속 가능성을 심사숙고할 때 더욱 그러하다. 대부분의 종교전통에서 물은 만물의 모태, 생명 창조의 원천, 우주의 어머니로 그려지고 있다. 탈레스가 보기에 물은 이 세계에 실재하는 다자들의 행동이나 변화의 원칙을 내포하는 공통요소인 일자이며 원리인 아르케(原質,arche)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장). 그렇다면 우주의 모든 생명과 직결되는 물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가 의문이 든다. 하지만 물의 기원을 밝힌 자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곽점 출토본『태일생수』가 현존하는 유일한 자료인 것 같아 보인다.


2. 우주생성의 기본원리
『태일생수』에서 우주생성의 기본원리는 도움이고, 물은 이 세계에 가장 먼저 생겨나 가장 먼저 도움을 실천한 사물이다.

 

태일이 물을 낳고 물이 돌아가 태일을 돕는다. 이로써 하늘을 이룬다. 하늘이 돌아가 태일을 돕는다. 이로써 땅을 이룬다. 하늘과 땅이 서로 돕는다. 이로써 신명을 이룬다. 신명이 다시 [서로] 돕는다. 이로써 음양을 이룬다. 음양이 다시 서로 돕는다. 이로써 사시를 이룬다. 사시가 다시 서로 돕는다. 이로써 차가움과 더움을 이룬다. 차가움과 더움이 다시 서로 돕는다. 이로써 습함과 건조함[濕燥]을 이룬다. 습함과 건조함이 다시 서로 돕는다. 한해가 완성되면 마친다『( 태일생수』).


인용문에서 우리는‘도움[輔]’이라는 동사적 행위가 우주생성의 기본 원리이며 자연만물의 존재원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단계의 우주생성과정에서‘낳다’와‘마치다’는 단 한 번씩만 나오는데 반해‘돕다’와‘이루다’는 8회에 걸쳐 등장하고 있으니 도움은 우주생성의 모든 과정에 내재하는 필연적인 규칙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뿐만 아니라 천지, 신명, 음양, 사시, 창열, 습조 역시 이 세계에 생겨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돕는 행위이며, 태일에서 습조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라도 돕지 않으면 우주의 생성은 이뤄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도움’에 의해 생성된다. 『태일생수』의‘보(輔)’의 원리에 따르면 이 세계는 타자의 도움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서로 돕지 않으면 이 세계의 그 누구도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에 타자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완벽하고 완전한 것은 없다. 심지어 우주생성의 근원인 태일조차 물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물도 태일의 도움 없이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돕는 것’은 곧 생존의 법칙이고, 공생의 근거이며, 이 세계가 유기적인 관계의 망을 유지하게 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태일생수』는 돕는 기준과 방법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돕는 기준은 천도귀약(天道貴弱)이고, 도움을 실천하는 방식은 일결일영(一缺一盈)이다. 노자철학적 사유에 입각해서 이해하자면 유약함을 귀하게 여기는 천도귀약의 정신은‘생생’의구조를지켜내는방법이다.『 도덕경』에서유약함은‘생생’의 조건이고 강함은‘생생’을 해치는 행위이다. 천도귀약의 정신은 물의 존재양태에서 잘 드러난다. 물은 자기해체를 기반으로 삼고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부족함은 채워주고 남는 것은 덜어내며 천도귀약의 정신을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수행해내고 있다.
『태일생수』는 천도귀약의 법칙에 따르면“공이 이루어지고 몸도 상하지 않는”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둔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인은 자신을 특정 상태에 고정시키지 않고 관계적 맥락 속에 자기를 해체시켜 놓음으로써 물처럼 천도귀약의 정신을 따른다. 만일 견고한 가치 체계, 고정적인 입장, 굳건한 의지를 고집하면“공이 이루어지고 몸도 상하지 않는 일거양득의 효과”는 거두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천도귀약의 유약함은 어떤 중심도 갖지 않는 해체적 입장을 말한다. 성인이 이런 해체적 입장을 선택을 한 까닭은 천도귀약의 정신을 어김없이 수행하는 물의 존재양태 덕분에 만물의 생성소멸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며 이 세계에서 생명의 영속성이 구현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으로 판단된다. 물의 존재양태와 성인의 선택으로 보아 천도귀약은 자연만물이 공존할 수 있는 최고의 공생법칙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즉 유약함을 돕는 것이 이 세계에서 타자와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말이다.
일결일영은 부족하면 채워주고 여유로우면 덜어내는 반복적인 동사적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규칙적 동작이『태일생수』에서는 사물과 사물 사이에 내재하는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규칙으로 작용한다. 물은 물론이고 모든 자연사물이 채우고 비우는 이 단순하고 간단한 규칙을 수행함으로써 우주생성에 기여하고 생명세계의 조화와 균형유지에 이바지 하고 있다. 『태일생수』에 따르면 일결일영은 자연세계의 운행규율이고, 만물에게는 생명활동의 근간이자 존재법칙이며 자연만물이 존재하고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법칙은 물론 인간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그것은 『태일생수』가 물의 존재양태를 만물의 존재법칙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과 생명의 관계방식을 한 걸음 더 들어가 살펴보자.

3. 태일과 물
이미 살펴보았듯 태일과 물은 우주생성의 공동근원자이다. 물은 태일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태일은 무엇인가? 그 개념은 크게4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도의 이칭(異稱)이며 원기이고 하나[一]이다. 둘째, 첨성(瞻星) 신앙의 대상이며 북극성이다. 셋째, 태일신이다. 넷째, 태일의 실체는 물이다. 이제 물과 태일의 관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태일은 물의 발생근거지만 형태가 없다. 형태 없음에서 나온 물은 태일과 달리 형태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단정 짓기에는 애매한 측면이 있다. 형태가 없다고 하기에는 물이라는 사물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형태가 있다고 하기에는 일정한 상(象)이 없어 꼴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은 유상(有象)이면서 동시에 무상(無象)이다. 다시 말해서‘형태 있음과 없음의 중간자’라고 할 수 있다. ‘꼴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 두가지 속성은 물로 하여금 만물의 모태라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한다. 물은 자신을 어떤 꼴로도 고정시키지 않는다. 물이 꼴을 갖출 때는 오직 타자의 요구에 응해서 그것이 그것이게끔 할 때 뿐이다. 물은 이처럼‘자기 없음’이라는 속성을 통해서 모든 사물이 본래부터 타고난 고유의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만물의 생성을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물과 생명의 관계 설정에 “태일장어수”, “만물의어미”, “만물의 벼리”는 매우 중요한 관념이다. 우주생성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태일은 물과 하나가 된다[太一藏於水]”. “태일장어수”는 태일이 물과 하나 되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체를 이루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태일이 물의 정신이라면 물은 태일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태일의 정신이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물은 그저 하나의자연사물인H2O에지나지않을것이다.『 태일생수』에서 물의 생명창조 기능은 태일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발휘되는 것 같아 보인다. 이제 태일과 하나 된 물은 막강한 생명력을 발휘함으로써 생명의 절대적 담지자로 자리매김하고“만물의 어미[萬物母]”,“ 만물의벼리[萬物經]”라는 존재론적 위상을 확보한다.

태일은 물과 하나 되어 때에 따라 움직인다. 두루 미치거나 시작하며 자신을 만물의 어미로 삼는다. 한번은
비우고 한번은 채움으로써 자기를 만물의 벼리로 삼는다. 이것은 하늘도 말살시킬 수 없고, 땅도 뒤엎을 수 없으며, 음양도이룰수없는것이다『( 태일생수』).

여기서 살펴볼 것은 두 가지이다. 물이‘만물의 어미가 되는 원리’와‘만물의 벼리가 되는 원리’이다. 첫째 만물의 어미가 될 수 있는 원리는 때에 맞게 주행(周行)하는 것이며, 그 가능성은 바로 유약성에 있다. 노자철학에서 물은 지극한 부드러움[至柔]을담지하고있다.“ 지극한부드러움”은 물과 기의 공통상징이다. 물과 기는 들어가지 못함이 없고 지나가지 못함이 없다. 『태일생수』에서 물은 이런 유연성으로 천하를 아무 걸림도 없이 주행하며 이 세상의 어미노릇을 수행한다. 어머니가 한 집안의 가솔들을 모두 고루 살피며 집안 살림을 해나가듯, 물은 만물의 생성을 돕는 실체로서 만물을 두루 이롭게 함으로써 천지의 대덕인‘생생’을 구현한다. 그리고 그 물이 이루어내는 생명력은 절대적이어서 그 위력은 하늘도 땅도 음양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 물이 만물의 벼리가 되는 원리는“한 번은 비우고 한 번은 채우는”일결일영의 방식에 의해서이다. 물은 때에 따라 일결일영하는 간단한 법칙의 수행으로 만물의 벼리라는 절대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늘도 땅도 음양도 어쩌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만물의 벼리라는 말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이 법칙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면 일결일영이 이 세계에 실재하는 모든 사물에게 해당되는 존재법칙이라는 것이다.


4.『 태일생수』에서연역해낸생명의존재법칙3가지
『태일생수』에 따르면 물은 우주생성의 최초 인자이고, 이 세계에 실재하는 모든 사물은 물의 속성을 담지하고 있다. 물의 존재방식은 우선 자기가 없고 유약성을 담지하고 있으며 채움과 비움의 완급을 천도귀약의 정신에 따라 적절히 수행함으로써 모든 생명존재를 돕는다. 이제 우리가『태일생수』에서 연역해낼 수 있는 생명의 존재법칙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겠다. 첫째 상보원칙에 따라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고, 둘째 천도귀약의 정신에 따라 공도 이루고 몸도 상하지 않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자기해체로 유약성을 함양하는 것이며, 셋째 일결일영의 원리에 따라 채움과 비움의 균형을 이루는 간소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 변화는 미래세대의 존속 가능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