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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9호] ‘11월 시민혁명’,‘ 광장’과 대의제를 생각한다

‘11월 시민혁명’,‘ 광장’과 대의제를 생각한다

 

 

손호철 _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근실(근혜-순실)게이트’와 고장 난 대의민주주의


 “국민들이 선거 날만 주인이 되고 투표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18세기의 철학자 장 쟈크 루소는 현대정치, 현대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대의민주주의를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최근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근실(근혜-순실)게이트’와 촛불을 바라보면서, 정치학자로서 가장 자주 떠오르는 것은 루소의 이 정의이다. 그렇다. 2012년 12월 19일 우리는 주권자로서 한 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 이후 지난 4년여 기간 동안, 다른 후보를 찍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까지, 온 국민은 박근혜의, 아니 최순실의 노예에 불과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국회는 어떠한가? 새누리당은 말할 것도 없고 보수야당들 역시 분노의 촛불이 광화문 등 전국의 광장에 넘쳐나기 전까지는 기껏해야‘질서 있는 퇴진’,‘ 명예로운 퇴진’과 같은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었다. 아니 박근혜의 지지율이 4%로 떨어지고 국민의 80%가 탄핵을 지지하고 있고, 불과 15%만이 탄핵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은 친박은 말할 것도 없고 비박까지도 탄핵과 탄핵반대 사이에서 끝까지 동요했다. 한마디로, 국회는 자신들이 대표해야 할 주권자들인 국민의 민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만 했다.
 이 같은 국회를 탄핵으로 몰고 간 것은 광장의 힘, 광장에 모인 230만개의 촛불의 힘이었다. 이 같은 힘에 의해 기회주의적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비박도, 나아가 친박의 상당수까지도 탄핵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가 한국 국회사상 최고의 업적인 ‘역사적인 탄핵 가결’이다. 국회가 광장에 의해 탄핵을 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탄핵을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키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탄핵은 가결됐지만 근실게이트, 그리고 이에 대한 국회와 정치권의 대응은 우리로 하여금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인류는 민주주의의 효시인 그리스 아고라(광장)의‘직접민주주의’라는 아름다운 전통을 갖고 있다(물론 이것은 노예제가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허나 인구가 증가하고 현대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어쩔 수 없는‘현대정치의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되어 왔다. 최근 들어 문학의 ‘재현(representation)’ 논쟁이 불붙고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의제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가 간헐적으로 진행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representation이 re때문에 불가피하게 대상을‘있는 그대로’presentation 할 수 없듯이‘대의’는 불가피하게 민의의 왜곡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근실게이트는 이 같은 부분적 재평가를 넘어서 대의민주주의 자체에 대해 전면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도록 만들고 있다.
 이번 근실게이트에는 세 층위가 작동하고 있다. 가장 표층인 ‘사건사’적인 면에는 73년 체제(유신체제)와 최태민으로부터이어진 ‘유사샤마니즘’적 ‘고조선체제’ ("우리나라는 헬조선이 아니라 신정일치의 고조선이었네요”라는 한 제자의 표현처럼)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중간수준에는 87년 헌정체제, 즉 ‘제왕적 대통령제’가 작동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의‘사회체제’가 87년 체제라고 주장하는 지적 지진아들도 있지만 87년 체제는 신자유주의의 97년 체제로 대체된 지 오래 이고 87년 체제 중 남아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87년 헌법에 기초한 헌정체제라는 ‘부분체제’이다). 가장 깊은 심층에는 단순한 정치적 권력남용을 넘어서 헬조선, 흙수저 신분세습제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같은 분노가 “돈 많은 부모를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는 정유라의 조롱과 맞물려 폭발한 것이다. 즉 가장 깊은 곳에는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체제인 97년 체제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지면관계상 논의를 소위 ‘정치’문제로 국한시키고자 한다. 논의를 정치문제로 국한시킨다 하더라도, 우리의 문제는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낸다고, 나아가 그 근원으로 지목되고 있는‘87년 헌정체제’를 타파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설사 내각제로 정부형태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탄핵과정이 잘 보여주듯이‘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대통령의 독재’를‘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국회의 독재’로 바꾸어놓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이번 문제의 핵심에는 루소가 고발한 대의민주주의의 근본적인 한계와 문제점이 자리잡고 있다.


 

탄핵가결 후, 더욱 광장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촛불을, 광장을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촛불을, 광장을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낼, 아니 이미 몰아낸 힘이 거기서 나왔기때문만은 아니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계기와 가능성들을 이것들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박근혜 이후에 우리가 만들어야하는 ‘새로운 공화국’의 단초들을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장은 근실게이트와 정치권의 무기력한 눈치 보기에 분노한 세월호 4.16연대, 민주노총, 참여연대, 교수연구자비상시국회의(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등 교수연구자 단체들로 구성된), 학생단체, 청소년단체등 전국 1500개 시민사회단체들이 밑으로부터 퇴진운동조직을 만들면서 조직화됐다. 그러나 광장을 메우고 있는 것은 일반시민들(한 시민운동가의 표현을 빌리자면‘자유로우면서 위태로운 시민들’)이었다. 구체적으로, 1500개 조직의 조직화된 참여자는 20만 명 수준으로 90%는 일반시민이라는 것이 퇴진행동 실무자들의 관측이다. 바로 이들의 힘이 주저하는 야권과 비박을 견인해 탄핵발의를 강제한 것이다. 직접민주주의가 폭발한 것이다.
 하나 더 주목할 것은 ‘운동 내에서의 직접민주주의’이다. 우선 집회에서 정치인들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을 뿐더러 운동권의‘단상권력’도 약화됐다. 구체적으로, 주요 단체들의 대표들이 단상에 포진하고 의례적으로 발언을 독과점하는 ‘광장내의 대의제’, ‘운동내의 대의제’ ‘( 계몽된 전위’가 ‘우매한 대중’을 대신하여 투쟁을 주도하는 ‘대리주의’[substitutionalism])가 약화되고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발언권을 갖는 직접민주의적 계기들이 강화되고 있다. 하다못해 도올 김용옥이 광화문 주말 촛불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대중을 가르치는 식의 강의를 늘어놓고‘꼰대 폼’을 잡다가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사회자에 의해 쫓겨나듯 내려와야 했다. 일부운동권의 돌출적 행동에 대해서도 오히려 대중들이 나서서 이들을 비판하고 규율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계기들을 극대화하고 우리가 새로 건설할‘새로운 공화국’의 핵심구성 요소로 자리매김할 것인가이다. 이와 관련, 주목할 것은 우리의 항쟁은 박근혜의 탄핵이나 퇴출로 끝나고 않고‘박근혜 이후’,‘ 분노 이후’가 더 문제라는 사실이다. 박근혜 퇴진 이후에 쟁점이 될 개헌으로부터 대선, 새로운 공화국 건설 등 더 중요한 문제들이 줄줄이 남아있다. 따라서 광장을 재정비하고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
 박근혜의 탄핵이 가결되었지만 광장이 바라는 것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아니라 즉각적인 퇴진이다. 국정공백 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광장은 계속 즉각 퇴진을 압박해야 한다. 또 박근혜가 다수를 임명한 보수적인 헌법재판소가 민의에 반하는 반역사적인 판결을 내리지 못하도록 광장은 헌재를 감시하고 압박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 퇴진과 헌재 판결 이외에도 특검의 조사(국민의 80%는 강제수사를 바라고 있다)와 사법처리를 통해 전두환, 노태우처럼 박근혜가 감옥에 들어갈 때까지 촛불을 내려놓을 수 없다. 할 일은 거기에 끝나지 않는다. 박근혜를 대신하는 대안권력문제로부터 개헌, 새로운 공화국문제, 차기 대선까지 광장이 해야 할 일은 아직 산적해 있다. 탄핵이 통과됐으니 이제 광장을 접고 차후문제를 정치권과 헌재에 맡기자는 것은 한국현대사의 주요 항쟁의 비극들, 즉 5.16쿠테타로 끝난 4.19학생혁명, 광주학살로 끝난 79년 부마항쟁과 80년의 봄, 노태우정권의 출범으로 끝난 87년 6월 항쟁의 비극을 반복하는 것이다.

 탄핵의결로 사망선고는 간신히 피했다고 하지만 근실게이트와 탄핵과정이 잘 보여줬듯이 우리의 대의민주주의는 중병에 걸려있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를 대신해 ‘대안권력’,‘ 대안정부’, 즉(박근혜지지자4%를뺀)‘ 96%의정부’를 사실상 광장이 대신해야 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탄핵을 받은 박근혜에 의해 임명됐고 박근혜∙최순실의 수족이었던 황교안 총리와 현 내각은 탄핵과 함께 그 권위를 상실했다. 따라서 국회가 이를 대신할 대안 권력 역할을 해야 하지만 탄핵과정을 보면 이들도 그럴 자격이 없다.
 국회의 자격부재는 탄핵으로 등장한 황교안 대행체제가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회는, 특히 야권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의 정국 주도권 싸움 때문에 탄핵이 가결될 경우 황교안대행체제가 등장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전혀 이에 대한 대안을 준비하지 않는 역사적 죄를 저질렀다. 즉 상대방 당이 추천하는 총리가 실권을 행사하느니, 아예 황교안 체제가 낫다는 정파적 판단에 기초해 현 사태를 자초했다. 한마디로, 민의를 저버린 직무유기로 탄핵감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광장은 정치권에 황교안과 근실내각의 자진사퇴를 요구하도록 압박하고 이들이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켜 이들을 해임토록 강제해야 한다. 또 대안내각의 구성으로부터 정책에 직접 개입해야 한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정부와 국회간의 협의체 구성에 광장과 시민도 참여하여 이들의 야합을 감시하고 생생한 광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일차적으로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 등 박근혜정부에 의해 투옥된 노동자와 양심수를 석방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 항쟁지도부를 확대∙개편하는 것이 시급하다. 현재의 광장지도부는‘박근혜퇴진’투쟁을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고 조직화하는 엄청난 역사적인 기여를 이미 했다. 그러나 현재의 지도부와 광장의 운동은 단기적인 퇴진운동에 적합할지 모르지만 장기투쟁을 이끌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특히 앞으로 벌어질 개헌정국, 대선정국 등 급변하는 정세에 효과적으로 개입하기에는 대표성과 효율성면에서 한계가 많다. 따라서 조직의 확대재편이 시급하다. 지금까지의 운동이‘박근혜퇴진’이라는 단일한 공동목표를 놓고 다양한 세력이 모인‘단결적’이고, ‘1차 방정식 투쟁’이었다면 앞으로의 투쟁은 다양한 입장이 대립하는 ‘갈등적’이고 ‘고차방정식 투쟁’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내부갈등을 조정해 통일된 노선을 도출해 낼 수 있는 민주적 대표성과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광장의 90%는 조직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반시민’들이다. 따라서 주요단체들의 대표들로 구성된 현재의 지도부는‘운동내의 대의주의’라는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 조직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반시민을 지도부에 포함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이와 관련, 주목할 것은 김세균 서울대명예교수의 제안이다. 그는 일반시민들로부터 대표성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개인가입과 민주적 선출원칙에 의해 부분별/지역별 비상국민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이들을 묶어 전국단위의 비상국민의원회를 출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로 이 같은 조직이 최대한 직접민주주의적 방식을 통해 앞으로 있을 주요문제들에 대한 입장을 결정해야 한다. 이 조직이 박근혜퇴진 문제만이 아니라 앞으로 터져 나올 개헌, 나아가 문재인, 안철수 등의 분열이 자명해 보이는 대통령선거에서의 대선방침. 나아가 필요하다면 ‘국민후보’ 선출에까지 적극 개입하는 것만이 야권의 분열로 야기된 4.19학생혁명, 80년 봄, 87년 6월 항쟁의 비극의 반복을 막고11월 시민혁명을 해피엔딩으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다. 광장이 할 일은 단순히 박근혜정부와 그 부역자들을 퇴진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능하면서도 탐욕스러운 거대보수야당들의 ‘뻘 짓’을 감시하고 막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개헌이다. 현재가 개헌을 할 시점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 또 현재 개헌을 얘기하는 세력들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모든 악의 근원인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꿔야 한다는 면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다들 정략적 목적에서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 우려되는 것은 이번 탄핵으로 민심으로부터 어느 정도 면죄부를 았고 새누리당의 주도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커진 비박이 철수의 국민의당, 김종인 등 더불어민주당 비문세력과 연대해 정계개편을 주도하고 개헌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럴 우 해방정국의 농지개혁, 87년 6월 항쟁 당시의 전두환∙노태우의 6.29선언(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한)같이 밑으로부터의 혁명적 요구를‘위로부터의 개혁’으로 흡수해버리는, 그람시적 의미의 (유사)‘수동혁명’(pseudo passive revolution)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이다.

 

개헌을 넘어서‘새로운 공화국’구상으로
 

 그러나 이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제 광장은 이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이는 우리의 현실이 광장으로 하여금 단순한 근실게이트의 청산을 넘어서‘민주∙평등∙연대에 기초한 새로운 공화국’에 대해 고민하고 구상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헬조선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화국, “열심히 일하는 부모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식에게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현재의 광장을 일종의‘제헌의회’로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정치권이 주장하듯이 제7공화국이 아니라 진정한 시민들의 바람에 기초한‘제2공화국’이다.

 따라서 개헌이 아니라 ‘새로운 공화국의 구성’이라는 시각에서 기본권으로부터 정부형태 등 이 문제를 고민하고 논의해 나가야 한다. 이제“대선이후 국회에서 차분하게 개헌을 논의하자”는 주장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설사 개헌은 선이후에 하더라도 새로운 공화국에 대한 구상은 당장 광장이 만들어 정치권에 이에 대한 개헌약속을 받아놓아 이를 제해야 한다. 대선이후 개헌을 논의할 경우, 과거와 마찬가지로 개헌은 정치권의 '그들만의 리그’의 개헌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공화국의 구체적인 내용은 학자들이나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일반대중의 참여 속에 직접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채워져야 한다. 다만 그 방향은 우선 다섯 가지가 떠오른다. 첫째, 소수자권리 등 87년 이후의 변화를 감안한 기본권의 업데이트와 강화이다. 둘째, 내각제, 집중화된 중앙정부의 권력을 지방정부에 권력을 대폭 양도하는‘남한연방제’등 권력집중을 개선할 수 있는 정부형태에 대한 고민이다.
 셋째, 어쩌면 둘째보다 더 주요한 문제로 표의 등가성을 괴하고 사실상의 보수독점정치를 영속화시키는 선거제도를 비례대표를 강화하고 독일식 연동제로 개혁하는 것, 그리고 대표성을 강화하기 위해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도시와 농촌사이에 선거구의 인구격차로 표의 가치가 세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 지만 반민주적인 선거제도로 인해 군소진보정당의 표와 대보수정당의 표의 가치는 4배 이상 차이가 나고 있다. 마디로, 대의민주주의 중에서도 아주 질이 나쁜 현재의 도를 최소한 '질 좋은 대의민주주의’로 고쳐야 한다.
 넷째, 민선공직자에 대한 소환제 강화, 시민발의제 등 고장 난 대의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술하고 직접민주주의를 극대화해야 한다. 대중은, 시민은 위대하다. 그러나 촛불은, 광장은, 역사의‘광기의 순간’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대의민주주의가 문제가 많지만, 이를 폐지하고 완전히 접민주주의로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의 대의민주주의가 고장 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당이 잘못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보수정당들은 기본적으로 지역정당(거지부터 재벌까지 지역으로 모인‘초계급적 지역연합’)들로 제대로 된 책대결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의 기능은 “(국회와 같은) 제도(정치)틀에서 사회적 등을 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 거대 정당 중심의 한국의 제도정치는 다양한 사회세력들을 제대로 대의하지 못함으로써‘사회적 갈등의 조정’이라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대의의 위기’, ‘대의의 실패’의 과가 희망버스로부터 골리앗투쟁, 광화문 노숙투쟁 등 '거리의 정치’의 일상화이다. 그리고 그 극적 표현이 바로 현재의 광장이다.
 따라서 대의민주주의를 수술하기 위해서는 정당제도의 혁이 시급하다. 다시 말해, 광장은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불을‘정치적 주체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과 같은 자유주의적인 야당들도, 정의당 같은 진보정당도 광장의 분노와 열기를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그리스의 시리자나 스페인의 포모데스같이, 이들을 정치적 주체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새로운 진보적 프로젝트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답답한 일이다. 핵심은 현재의‘초계급적 지역연합’을 (지역을 넘어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이 함께 하는) ‘초지역적계급연합’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헬조선의 주범인 신자유주의(정확히 표현해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를 넘어설 수 있는‘포스트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은 세계적으로 브릭시트로부터‘트럼프반혁명’, ‘샌더스혁명’(트럼프반혁명과 샌더스혁명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두개의 출구, 즉‘반동적출구’와‘진보적 출구’이다)에 이르는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의 11월 시민혁명도 어떤 면에서는‘한국판 브릭시티’‘( 코릭시트’)이자‘한국판 샌더스혁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진주촛불집회의 한 청소년의 발언처럼 "내 안의 박근혜와 내 옆의 최순실에 분노하고 사람을 돈이나 자신의 소유물로 보지 않고, 사람을 돈과 이익으로 환산하지 않고, 독립된 존재로 보는 세상”, “어쩔 수 없는 경쟁 속에서 남을 밟고 올라서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함께 살아가는”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윤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시장과 재벌에 대한 사회의, 시민의, 광장의 통제가 제도화되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계승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새누리당과 같은 공범들이다. 정리해고를 도입하고, 파견근로제를 확대하고, 한미 FTA를 추진하고, 쌍용자동차를 해외매각해서 헬조선을 만든‘원조 신자유주의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아니 과거는 과거라고 치자. 이들 자유주의적 야당들은 현재 여소야대의 힘을 가지고 있고, 헬조선에 대한 광장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헬조선 극복을 위해 필수적이고 자기들이 약속해온 법인세 인상을 포기한 세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광장이 주도하는 포스트신자유주의 구상이 필수적이다.

 사회적 통제, 시민통제가 필요한 분야는 재벌과 시장만이 아니라 사방에 널려있다. 언론, 사학(우리가 최근 생생하게경험하고 있는) 등 그 예는 끝이 없다. 그중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이 검찰이다. 박근혜정부, 특히 십상시사건과 근실게이트에서 검찰이 보여준 행태는 검찰의 민주화, 검찰에 대한 민주적, 사회적 통제 없이는 의미 있는 민주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폭로해주었다. 이번 기회에 시민대표 등이 검찰을 감독, 감시하는 검찰위원회를 만들어 검찰이 더 이상 정권의 주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11월 시민항쟁은 부마항쟁, 4.19 학생혁명, 6월 항쟁과 같은 비극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11월 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온전한 의미의‘11월 시민혁명’,‘ 성공한 11월 시민혁명’으로 만들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정치권, 특히 야권이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고 촛불을 폄하했다. 그러나 4.19와 80년 봄, 그리고 87년 6월 항쟁이 보여주듯이 촛불을 꺼트리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야권의 뻘 짓이다. 이 같은 뻘 짓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촛불을 내려놓을 수 없다. 낡은 대의민주주의는 죽었다. 촛불이여, 광장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