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6.08 11:37

한글 가로쓰기에서 나타나는 서구중심주의

 

윤희수 _ 정치외교학과 석사과정

 

 

의 문화로 변화한 동아시아

과거 세로쓰기 표기방식을 취했던 동양권은 근대 이후 서구문명을 접하며 점차 가로쓰기 표기법을 보편화해나갔다. 동아시아권이 약 500년 넘게 지속되어왔던 세로쓰기 필법에서 가로쓰기 필법으로 전환한 이유에 대해 저자는 의문이 들었다. 연구 결과, ··일의 가로쓰기 표기법 도입은 서구문명이 아시아에 들어온 근대 이후에 본격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공산 혁명 성공 이후,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그리고 한국은 미군정의 통치 이후 가로쓰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는 동일한 시기인 근대에 아시아 국가들이 일괄적으로 표기법을 변형한 이유를 찾고자 했고, 그 원인으로 서구중심주의가 있다는 논증을 해보고자 했다. 이 논문의 핵심은 한글의 표기법 전환 가로쓰기에 나타나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해 고찰해보는 데 있다.

언어를 표기하는 방법은 문자 체계의 기입 방향에 따라 상이하다. 일반적으로 표기법은 가로쓰기인 횡서와 세로쓰기인 종서로 나뉜다. 문자 표기 방향을 보면 동양 권은 ()’의 특성을 갖고 서양 권은 ()’의 특성을 갖는다. 한자문화권으로 분류되는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과 같은 아시아권 언어는 전통적으로 우 종서를 사용해왔다. 하지만 의 문화를 갖고 있던 아시아권 언어는 점차적으로 의 언어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글이 현재 가로쓰기 표기법으로 전환된 이유에는 개화기 당시 서양인 선교사의 영향과 중국의 한자문화권에서 탈피하고자 했던 한국어 언어학자들의 소망에 기인한다.

 

표기법 변화의 역사적 배경

가장 먼저 한글 가로짜기를 표준화한 것은 미군정 교과서였다. 미 군정청 문교부는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조선교육심의회를 조직하여 한국교육의 이념으로 명문화된 홍익인간의 교육이념과 교육의 기본방침이 심의되었고, 미국과 같은 6·3·3·4 학제를 비롯한 교육제도에 대한 결의가 이루어졌다. 조선교육심의회에서는 절대 다수의 찬성으로 새 교육에서 한자를 폐지하고 한글 가로짜기를 지정하는 한글전용방침을 결정하여 겨레의 교육을 실시할 것은 군정청 문교부에 보고하였고, 가로짜기에 대한 부칙을 추가하였다. 본래 목적이 미 군정청의 문교 정책 자문기구를 운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선 교육심의회는 미국식 학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물론 이전 종서표기법의 경우도 중국의 표기영향에 따른 것이었기에, 종서에서 횡서로의 표기법 변화는 단지 한국이 중심으로 여기는 국가의 변동에 따른 결과가 아니냐는 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즉 과거에 조선이 중국을 추종했다면, 현재의 한국은 미국을 추종하기에 표기법 또한 상응하여 따라간 것이라는 문제제기이다.

한글이 종서의 형태로 탄생하게 된 원인에 있어서, 당시 중국의 지배적 영향이 있었다는 사실은 배제할 수 없지만, 500년의 시간에 걸쳐 한글이 세로짜기에 적합한 글자로 진화해왔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형태적 특징인 모아쓰기 구조와 글 줄 흐름성 등은 한자와는 무관하게, 한글 자체의 특성에 힙입어 진화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한글이 세로쓰기를 한 것에는 중국이 간접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근본적 원인으로 판단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보다는 한글은 한글문자 특유의 속성 때문에 세로쓰기를 채택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현재 한글의 횡서 표기법이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외의 역사적 사실에 기초했을 때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한국의 근대화 운동은 주로 서구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후에 한글학자로 성장한 이들의 대다수가 이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사회는 서구를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했고, 이러한 인지체계는 표기법의 변화에 따른 사회의 저항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한글의 맹목적인 서구화가 만든 폐해: 정간보

당시 한글의 표기방향을 횡으로 통일하는 이유는, 횡서, 종서로 혼재된 한국사회의 표기법을 한데 모은다는데 있다. 하지만 표기법의 통일을 꼭 횡의 방향으로 할 이유가 있을까? 이에 대해 한글학자 최현배는 서양의 산수, 대수, 기하, 삼각, 물리화학, 음악 등이 횡의 방향으로 쓰여 있기 때문에 한글의 표기법도 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의 전통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림1] 종서형태의 정간보

 

그 대표적인 예가 전통국악이다. 지금 우리는 서양악보에 너무나도 친숙해져서 왼쪽에서 오른쪽(횡서형태)으로 악보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위에서 아래로 읽어나가는(종서형태) 정간보라는 악보가 존재하고 있었다. 한국의 전통음악은 음계에 12율명을 사용하는데, ‘황종, 대려, 타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이라 불리며 붙임표, 숨표, 쉼표를 활용해 음악의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를 갖고 있다. 박자의 경우 정간보의 칸을 몇 개로 나누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국악은 세로 형태의 정간보로 표기될 때 제일 잘 명시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글의 표기법 전환에 따라, 정간보 역시 가로형태의 악보로 강제 변용되었으며 기존의 정간보 틀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 음악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시김새와 장단이다. 시김새로 인하여 유동적으로 음이 움직이며 진행하는 것이 특징인 우리 음악을 전혀 다른 음악 어법을 지닌 악곡의 기보에 적합한 서양식 오선보로 표기했을 경우 우리 음악을 평균율의 음악처럼 왜곡하여 인식할 우려가 있다.

(), ()이 발달한 우리 음악은 세종대왕이 정간보를 창안한 이래 박자 표기에 대한 언급을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박이나 장단을 표기하는데 쉬운 기보체계를 두고 음악 생성이 전혀 다른 문화의 틀로 설명하는 데 그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 주장하는 음악의 3요소인 리듬, 멜로디, 하모니가 한국 전통음악에는 다른 이름으로 있고 악보에 쓰여진다. 하지만 그 동안 정악곡을 제외하고는 다른 장르의 우리 음악은 서양 기보법을 빌어다 썼다. 서양음악과 다른 우리 음악은 서양 기보법으로 나타낼 수 없는 부분을 여러 가지 보조 기호를 만들어 서양기보법으로 써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 전통음악은 본질을 잃게 되었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결론 및 제언

이와 같은 논의에 따라 필자는 당시 한글학자들이 횡서를 주장한 주된 이유를 서구의 유입과 그에 따른 서구중심주의의 결과라고 추정한다. 언어의 변화는 문화에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표기법의 변화가 일으킨 폐해 중 하나로는 위에 논의했듯, 한국 전통음악의 소멸성에 있다. 횡서표기법의 서양식 악보가 도입됨에 따라 종서 표기법이었던 기존의 정간보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악보가 되었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정간보라는 구체적 예시만을 다루고 있지만, 그 외에의 다른 문화적 소멸성 또한 존재할 것이라 추측한다. 따라서 한국고유의 문화를 되살리며 서구중심주의의 폐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떠한 방법이 수반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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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4.08 15:20

트럼프 대통령 시대 남북관계 전망과 과제

 

 

 

 

최용환 _ 경기연구원 연구기획부장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가 격랑에 휘말리고 있다. 미국 신행정부의 대외정책이 여전히 불투명한 가운데,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새로운 대북정책을 펼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어, 예전보다 더 강력한 대북제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상황이 겹쳐져서 한국은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고 있다.

 

 

민낯을 드러낸 미국 우선주의

   

모든 국가의 외교는 기본적으로 자국 중심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강조하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외부에서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매우 노골적이고 일방적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주민과 소수자들에 대한 노골적 편견을 보인 대통령의 등장은 지난 대선에서 유색인종인 오바마를 당선시킴으로써 세계의 환호를 받았던 미국 민주주의의 이면(􃤪)을 보여준 것이다. 이민자들이 건설한 국가인 미국은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는 이른바 ‘melting pot’이라고 불렸지만, 이번 대선의 결과는 아직 미국 사회의 주류는 백인임을 확인시켜주었다. 트럼프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할 것이며, 그 결과는 미국 소프트파워의 쇠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 신행정부 대외정책의 구체적인 형태는 경제적으로는 중상주의적 정책이 예상되며, 안보 측면에서는 동맹국의 부담 증가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강대국들 간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중심으로 한 중상주의적 경쟁은 지정학적 충돌의 가능성을 높인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과의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대선 기간 중 트럼프의 언급이 모두 실행에 옮겨지기 어렵다는 전망도 있으나, 그 기조 자체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물론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과거 냉전시기 미소의 이데올로기적 대립과는 다르다. 갈등의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으며, 갈등과 협력 요소가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비교할 때, 중 사이에 전략적 경쟁이 증가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미국과 중국 간 전략적 경쟁의 경계선에 놓인 한반도이다.

 

 

중 갈등 상황에서 딜레마에 빠진 한국 외교

 

대통령 취임 이후 트럼프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 협정(TPP) 탈퇴를 결정하였다. 미국의 TPP 탈퇴 결과 중국이 주도하는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RCEP)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만약 이러한 예상이 현실화된다면 중국은 동남아 및 아시아 지역에서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한일 삼각동맹의 틀에 묶여 동남아시아로부터 소외된다면, 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이 중국의 영향권에 역 포위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보다 긴 안목과 넓은 시각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의 핵심 축은 경제적인 측면이 될 것이다. 트럼프는 중국과의 교역이 불공정하게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미국과 미국인들이 손해를 보았다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이미 세계 2위의경제대국이자 미국의 최대 채권국이기도 하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 전쟁이 벌어진다면 양자 모두 다수의 대응 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상황으로

까지는 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미중 갈등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영유권 문제 등을 놓고 벌어진 중국과 일본의 갈등에서 미국은 일본편에 설 것임을 명확히 한 바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이다. 트럼프는 북핵문제의 해결과 관련하여 이른바중국역할론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역할론은 1990년대 이후 북핵문제 해결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던 사안이다.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에 반대하지만,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도 않는다. 따라서 중국은북핵문제북한문제를 분리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신행정부는 세컨더리 보이콧 등을 통해 중국을 압박하여, 북한에 대해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할 계획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 간의 전략적 갈등이 심화되면 중국에 있어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오히려 증가할 것이다.

최근 한국과 중국 간 THAAD 도입을 둘러싼 갈등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THAAD의유용성에 대한 논란을 논외로 한다면, 어떤 국가가 자국 방위를 위해 특정 무기체계를 도입하는 것은 명백하게 주권적 사안이다. 이에 대해 주변국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나오는 것은 THAAD 그 자체보다는 한국의 THAAD도입을 한국이 한미일 동맹체제에 편입되는 신호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이라는 다소 모호한 정책기조를 유지하여 왔다. 이러한 전략은 미중관계가 우호적일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한국 외교 딜레마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미 미국과 중국의 대외정책이 공격적이고 노골적으로 변화한 상황에서는 경제에 있어 중국의존도와 안보에 있어 미국의존도를 낮추지 않은 한 이러한 딜레마는

지속반복될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 평화적 관리의 중요성

 

미국 신행정부 출범 이후 한미관계에 있어서도 변화가 예상된다. 우선 경제적 측면에서 미국은 공정무역(fair trade)을 명분으로 한FTA 개정 등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안보 측면에서는 한국의 안보분담 증가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한국 정부는 선제적으로 대미 무역 흑자 규모를 줄이고 미국 제품을 구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대응은 협상 이전에 우리의 카드를 모두 보여주는 것으로, 협상 전략적 차원에는 결코 현명한

방법이 될 수 없다.

FTA는 일방에게만 이익이 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차분히 대응 논리를 만들어 대비하면 된다. 미국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부문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최대한 제도에 기대어 시간을 끌 수도 있다. 자국 방위에 대한 한국의 역할 증대 요구에 대해서는 대응논리와 함께, 추가비용 부담에도 대비하되 합당한 반대급부를 요구해야 한다. 특히 전시

작전권 반환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도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둔다면 필요 이상의 비용을 치러야 할 가능성이 높으며, 중국의 과잉대응을 낳는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 남북관계와 관련된 핵심 쟁점은 역시 북핵문제이다. 트럼프는 기존의 제도적 틀보다는 미국이 가진 힘과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대외관계에 대응하려 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 도발 수위를 낮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미국은 대북 선제타격을 포함하여 다양한 대북제재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제타격을 검토한다는 것과 이것을 실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과잉 대응을 할 필요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북핵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는 한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대북정책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남북관계의 평화적 관리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북핵문제의 해결과 통일이라는 과제를 포기할 수는 없으나, 중단기적으로는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위상과 역할을 확보해야 한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대국들의 결정에 의해서 한반도 상황이 전개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미국과 중국이 갈등을 빚고 있으나, 그들 간의 빅딜에 의해 북한

문제가 급진전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의 긴장 국면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한국이 가장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잘못을 범하기 않기 위해서도 한반도 문제에 대한 우리의 주도권과 역할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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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7.02.14 15:30

『태일생수』에 나타난 물과 생명의 관계방식 고찰

 

박혜순 _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책임연구원

 

1. 물과 생명
오늘날 물기근∙물부족 문제는 우리세대가 풀지 않으면 안 될 핵심과제 중 하나이다. 미래세대의 존속 가능성을 심사숙고할 때 더욱 그러하다. 대부분의 종교전통에서 물은 만물의 모태, 생명 창조의 원천, 우주의 어머니로 그려지고 있다. 탈레스가 보기에 물은 이 세계에 실재하는 다자들의 행동이나 변화의 원칙을 내포하는 공통요소인 일자이며 원리인 아르케(原質,arche)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장). 그렇다면 우주의 모든 생명과 직결되는 물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가 의문이 든다. 하지만 물의 기원을 밝힌 자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곽점 출토본『태일생수』가 현존하는 유일한 자료인 것 같아 보인다.


2. 우주생성의 기본원리
『태일생수』에서 우주생성의 기본원리는 도움이고, 물은 이 세계에 가장 먼저 생겨나 가장 먼저 도움을 실천한 사물이다.

 

태일이 물을 낳고 물이 돌아가 태일을 돕는다. 이로써 하늘을 이룬다. 하늘이 돌아가 태일을 돕는다. 이로써 땅을 이룬다. 하늘과 땅이 서로 돕는다. 이로써 신명을 이룬다. 신명이 다시 [서로] 돕는다. 이로써 음양을 이룬다. 음양이 다시 서로 돕는다. 이로써 사시를 이룬다. 사시가 다시 서로 돕는다. 이로써 차가움과 더움을 이룬다. 차가움과 더움이 다시 서로 돕는다. 이로써 습함과 건조함[濕燥]을 이룬다. 습함과 건조함이 다시 서로 돕는다. 한해가 완성되면 마친다『( 태일생수』).


인용문에서 우리는‘도움[輔]’이라는 동사적 행위가 우주생성의 기본 원리이며 자연만물의 존재원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단계의 우주생성과정에서‘낳다’와‘마치다’는 단 한 번씩만 나오는데 반해‘돕다’와‘이루다’는 8회에 걸쳐 등장하고 있으니 도움은 우주생성의 모든 과정에 내재하는 필연적인 규칙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뿐만 아니라 천지, 신명, 음양, 사시, 창열, 습조 역시 이 세계에 생겨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돕는 행위이며, 태일에서 습조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라도 돕지 않으면 우주의 생성은 이뤄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도움’에 의해 생성된다. 『태일생수』의‘보(輔)’의 원리에 따르면 이 세계는 타자의 도움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서로 돕지 않으면 이 세계의 그 누구도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에 타자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완벽하고 완전한 것은 없다. 심지어 우주생성의 근원인 태일조차 물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물도 태일의 도움 없이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돕는 것’은 곧 생존의 법칙이고, 공생의 근거이며, 이 세계가 유기적인 관계의 망을 유지하게 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태일생수』는 돕는 기준과 방법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돕는 기준은 천도귀약(天道貴弱)이고, 도움을 실천하는 방식은 일결일영(一缺一盈)이다. 노자철학적 사유에 입각해서 이해하자면 유약함을 귀하게 여기는 천도귀약의 정신은‘생생’의구조를지켜내는방법이다.『 도덕경』에서유약함은‘생생’의 조건이고 강함은‘생생’을 해치는 행위이다. 천도귀약의 정신은 물의 존재양태에서 잘 드러난다. 물은 자기해체를 기반으로 삼고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부족함은 채워주고 남는 것은 덜어내며 천도귀약의 정신을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수행해내고 있다.
『태일생수』는 천도귀약의 법칙에 따르면“공이 이루어지고 몸도 상하지 않는”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둔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인은 자신을 특정 상태에 고정시키지 않고 관계적 맥락 속에 자기를 해체시켜 놓음으로써 물처럼 천도귀약의 정신을 따른다. 만일 견고한 가치 체계, 고정적인 입장, 굳건한 의지를 고집하면“공이 이루어지고 몸도 상하지 않는 일거양득의 효과”는 거두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천도귀약의 유약함은 어떤 중심도 갖지 않는 해체적 입장을 말한다. 성인이 이런 해체적 입장을 선택을 한 까닭은 천도귀약의 정신을 어김없이 수행하는 물의 존재양태 덕분에 만물의 생성소멸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며 이 세계에서 생명의 영속성이 구현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으로 판단된다. 물의 존재양태와 성인의 선택으로 보아 천도귀약은 자연만물이 공존할 수 있는 최고의 공생법칙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즉 유약함을 돕는 것이 이 세계에서 타자와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말이다.
일결일영은 부족하면 채워주고 여유로우면 덜어내는 반복적인 동사적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규칙적 동작이『태일생수』에서는 사물과 사물 사이에 내재하는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규칙으로 작용한다. 물은 물론이고 모든 자연사물이 채우고 비우는 이 단순하고 간단한 규칙을 수행함으로써 우주생성에 기여하고 생명세계의 조화와 균형유지에 이바지 하고 있다. 『태일생수』에 따르면 일결일영은 자연세계의 운행규율이고, 만물에게는 생명활동의 근간이자 존재법칙이며 자연만물이 존재하고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법칙은 물론 인간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그것은 『태일생수』가 물의 존재양태를 만물의 존재법칙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과 생명의 관계방식을 한 걸음 더 들어가 살펴보자.

3. 태일과 물
이미 살펴보았듯 태일과 물은 우주생성의 공동근원자이다. 물은 태일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태일은 무엇인가? 그 개념은 크게4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도의 이칭(異稱)이며 원기이고 하나[一]이다. 둘째, 첨성(瞻星) 신앙의 대상이며 북극성이다. 셋째, 태일신이다. 넷째, 태일의 실체는 물이다. 이제 물과 태일의 관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태일은 물의 발생근거지만 형태가 없다. 형태 없음에서 나온 물은 태일과 달리 형태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단정 짓기에는 애매한 측면이 있다. 형태가 없다고 하기에는 물이라는 사물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형태가 있다고 하기에는 일정한 상(象)이 없어 꼴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은 유상(有象)이면서 동시에 무상(無象)이다. 다시 말해서‘형태 있음과 없음의 중간자’라고 할 수 있다. ‘꼴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 두가지 속성은 물로 하여금 만물의 모태라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한다. 물은 자신을 어떤 꼴로도 고정시키지 않는다. 물이 꼴을 갖출 때는 오직 타자의 요구에 응해서 그것이 그것이게끔 할 때 뿐이다. 물은 이처럼‘자기 없음’이라는 속성을 통해서 모든 사물이 본래부터 타고난 고유의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만물의 생성을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물과 생명의 관계 설정에 “태일장어수”, “만물의어미”, “만물의 벼리”는 매우 중요한 관념이다. 우주생성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태일은 물과 하나가 된다[太一藏於水]”. “태일장어수”는 태일이 물과 하나 되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체를 이루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태일이 물의 정신이라면 물은 태일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태일의 정신이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물은 그저 하나의자연사물인H2O에지나지않을것이다.『 태일생수』에서 물의 생명창조 기능은 태일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발휘되는 것 같아 보인다. 이제 태일과 하나 된 물은 막강한 생명력을 발휘함으로써 생명의 절대적 담지자로 자리매김하고“만물의 어미[萬物母]”,“ 만물의벼리[萬物經]”라는 존재론적 위상을 확보한다.

태일은 물과 하나 되어 때에 따라 움직인다. 두루 미치거나 시작하며 자신을 만물의 어미로 삼는다. 한번은
비우고 한번은 채움으로써 자기를 만물의 벼리로 삼는다. 이것은 하늘도 말살시킬 수 없고, 땅도 뒤엎을 수 없으며, 음양도이룰수없는것이다『( 태일생수』).

여기서 살펴볼 것은 두 가지이다. 물이‘만물의 어미가 되는 원리’와‘만물의 벼리가 되는 원리’이다. 첫째 만물의 어미가 될 수 있는 원리는 때에 맞게 주행(周行)하는 것이며, 그 가능성은 바로 유약성에 있다. 노자철학에서 물은 지극한 부드러움[至柔]을담지하고있다.“ 지극한부드러움”은 물과 기의 공통상징이다. 물과 기는 들어가지 못함이 없고 지나가지 못함이 없다. 『태일생수』에서 물은 이런 유연성으로 천하를 아무 걸림도 없이 주행하며 이 세상의 어미노릇을 수행한다. 어머니가 한 집안의 가솔들을 모두 고루 살피며 집안 살림을 해나가듯, 물은 만물의 생성을 돕는 실체로서 만물을 두루 이롭게 함으로써 천지의 대덕인‘생생’을 구현한다. 그리고 그 물이 이루어내는 생명력은 절대적이어서 그 위력은 하늘도 땅도 음양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 물이 만물의 벼리가 되는 원리는“한 번은 비우고 한 번은 채우는”일결일영의 방식에 의해서이다. 물은 때에 따라 일결일영하는 간단한 법칙의 수행으로 만물의 벼리라는 절대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늘도 땅도 음양도 어쩌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만물의 벼리라는 말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이 법칙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면 일결일영이 이 세계에 실재하는 모든 사물에게 해당되는 존재법칙이라는 것이다.


4.『 태일생수』에서연역해낸생명의존재법칙3가지
『태일생수』에 따르면 물은 우주생성의 최초 인자이고, 이 세계에 실재하는 모든 사물은 물의 속성을 담지하고 있다. 물의 존재방식은 우선 자기가 없고 유약성을 담지하고 있으며 채움과 비움의 완급을 천도귀약의 정신에 따라 적절히 수행함으로써 모든 생명존재를 돕는다. 이제 우리가『태일생수』에서 연역해낼 수 있는 생명의 존재법칙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겠다. 첫째 상보원칙에 따라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고, 둘째 천도귀약의 정신에 따라 공도 이루고 몸도 상하지 않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자기해체로 유약성을 함양하는 것이며, 셋째 일결일영의 원리에 따라 채움과 비움의 균형을 이루는 간소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 변화는 미래세대의 존속 가능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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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06.22 15:23

 한․중 인문교류의 정치학 

– 한국의 시각에서


                        전인갑_ 사학과 교수

             

중국의 부상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문제제기는 현 시점에서 매우 시의성 있고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이미 G2로 인정되고 있는 중국의 부상으로 한국 사회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 동안 비약적 성장의 기반이 되었던 정치, 경제, 군사 등 제방 면에서의 미국의 우산에 의존하면서 미국과의 가치 동맹을 견고하게 지속할 것인가 혹은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미국과의 기존의 관계를 조정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봉착해 있다. 대중 관계를 강화한다면 그리고 대미관계를 조정한다면 어떠한 수준에서 어떠한 전략과 방법으로 이를 구체화할 것인가도 많은 사회적 갈등과 국제정치적 리스크를 수반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직면하게 된 ‘곤혹’은 한국 사회의 미래를 기획하는데 있어 반드시 해소해야 할 핵심적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은 이미 ‘신흥대국론’을 외교정책의 기본이론으로 제시함으로써 동아시아 지역 질서 속의 주도자를 넘어 미국과 함께 세계질서의 편성 주체가 될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에 앞서 G2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로 취임한 시진핑 국가주석은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 회의에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중국의 꿈(中國夢)이라고 강조했다. 굴곡의 중국 근현대사 전개를 생각할 때,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이처럼 강한 어조로 ‘강한 중국’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제는 ‘신흥대국’으로서 굴욕의 시대를 청산하고 과거의 중화제국을 연상케 하는 ‘강한 중국’의 국격을 세계에 선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그는 “중국의 꿈은 반드시 중국의 길(中國道路)을 걸으며, 중국의 정신(中國精神)을 선양하고, 중국의 힘(中國力量)을 결집하여 실현해야 한다”고 하며 중국몽 실현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방법은 한마디로 Global Standard가 아닌 중국 고유의 표준에 근거하여 대국의 내실을 확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과 다름없다. 


변동하고 있는 동아시아 질서


우리는 이를 보면서 ‘지역제국’ 중국의 등장을 읽는다. ‘신흥대국’ 중국의 등장은 명확하다. 여기서 동아시아가 새로운 세계질서의 또 다른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음과 동아시아 지역질서가 향후 중국 중심으로 재구축될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의 변화에 대응하여 한국은 중국에 대해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변화하는 지역질서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말하자면 중국을 전략적으로 재정의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 부과된 이러한 과제의 심층에는 19세기 후반 이후 형성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동하고 있는 흐름이 존재한다. 보편문명을 자부했던 중화제국의 ‘중국 중심의 천하 질서’가 붕괴한 이후 150여 년에 걸쳐 형성되었던 동아시아 질서가 최근 근본적으로 변동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중국 대 미․일 대립의 구조가 정착해 가고 있고, 경제적 성취를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 각국 간의 헤게모니 경쟁 역시 격화되고 있다. 이러한 변동이 야기한 불안정성이 역사인식 문제와 영토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


이러한 변동의 중심에는 중국의 ‘지역제국화’가 자리 잡고 있다. 냉전시대라는 짧은 시기 동안 한국은 중국과 거의 무관하게 살아왔으나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은 지구적 차원에서 제국적 기획을 시도하거나 그럴 만한 능력을 확보한 것은 아니지만 아시아에서 지역제국으로서의 중국의 위상은 확고하다. 또한 우리를 포함한 중국의 이웃 국가들은 지역제국 중국이 만들어 낸 회오리 속으로 급속히 휘말려들고 있다. 오랜 한중관계 속에서 축적된 역사적 경험은 우리들로 하여금 중국의 이러한 동향에 대단히 민감하게 한다. 지역제국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미래를 기획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의 입장에서 중국의 제국적 속성에 주목하는 현실적 이유, 즉 중국을 전략적으로 재정의해야 하는 학문적 과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러한 학문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지역제국 중국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제국화의 주인공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민국가이다. 다원일체의 다민족 국가라는 국가통합 논리를 중국의 주장대로 수용하고, 그 영역을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지역제국의 영역으로 전제한다면 동아시아의 지역질서는 현실적으로 중국적 제국질서(비대칭성을 본질로 하는 중국 중심의 질서)를 중심축으로 하는 중국 대 비중국이라는 구도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도를 학문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한국의 입장에서 중국을 재정의하지 않는다면 이 지역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중국과의 공동 번영을 견인하고자 하는 한국은 자신의 미래전략을 수립하는데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현재의 중국과 역사상의 중국에 대한 기존 인식을 해체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기존 인식의 해체는 역사상 동아시아의 지역질서를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가 아니라 하나의 중심과 복수의 부중심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상호의존적이고 상호연동적인 복합질서로 재정의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 작업은 동아시아라는 지역 공간 속에서 ‘중화의 중국’을 포함하여 현재는 중국의 일부가 되어버린 역사상의 다양한 민족과 국가 그리고 중국 제국의 이웃에 존재하는 국가들이 교류와 갈등을 연출하면서 만들어낸 역사 전개의 다원성과 역동성을 복원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의 중국이 제국의 유산-제국의 영역, 지배전략, 운영시스템, 국제(조공)질서 등-을 근대적으로 재구성하면서 노정한 중국적 제국질서의 짙은 음영-중국 중심 위계적 질서 속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신강, 티벳, 몽골에 대한 한족 중심의 통치-을 걷어내고 공존의 동아시아 지역 질서를 지향하는 역사상을 정립하려는 이론적 모색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중국과 이웃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문화,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발전 단계 등의 측면에서 비대칭성이 매우 심했다고 전제하는 것이 통상적인 중국인식이다. 그러한 비대칭성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중국의 영역을 전제로 그러한 비대칭성을 부지불식간에 상정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문화, 영역, 정치 등의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가변성-예컨대 중국 제국 영역의 가변성, 비중국 세계에 대한 중국의 의존성 등-이 무시되고 중국의 절대적 중요성이 부각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도 괴리가 있을 뿐 아니라 비대칭성을 고정불변의 속성으로 정의함으로써 향후 전개될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이웃 국가들의 관계를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혹은 조공질서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프레임으로 인식하게 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학계에서는 이러한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중국의 위상을 상대화시키는 학문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중화문화를 통한 현대 중국의 이해 


한편 최근 10여 년 전부터 중국에서는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크게 확산되고, 전통문화의 부활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탁고적(托古的) 미래기획을 추구해 왔던 중국의 문화사적 관성을 생각할 때 놀랄만한 사실도 아니다. 이것은 중화문화가 현재와 미래의 발전을 위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현대중국에 대한 인식은 전통과 역사와의 단절에 강조점이 두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현상의 등장은 단절보다는 그 연속에 무게 중심을 두고 현대 중국을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인문정신 혹은 전통문화 부흥 논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국의 전통-특히 인문전통과 전통문화-이 다양한 차원에서 재구성되어 새로운 미래 건설에 활용되는 실태를 파악하여 그러한 현상의 현실적․정치적 함의를 규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중국몽 실현의 방법으로 “중국의 길(中國道路)”과 “중국정신”을 강조한 것 역시 제국의 경험과 중화문화의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겠다는 사회적 흐름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 출처: 베이징(중국)=AP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식에서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中國夢)을 실현하겠다고 강조하는 모습. (편집자주) 


개혁개방 이후 경제적 성취와 G2로의 ‘굴기’는 근대 수용의 지식구조를 미래담론 창안의 지식구조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미국 주도의 글로벌 스탠다드와 병립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중국 주도의 보편적 기준(Chinese Standard)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중국이 모색하고자 하는 대안은 ‘중국적 문화’ 건설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1990년대 중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과 서구의 경제위기로 인해 중국인들은 민주 신봉을 타파하고 자신의 문화전통 복구를 시도하고 있다는 진단 역시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위와 같은 현상의 중심에는 유교=전통문화=(중국의)인문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 공자와 유교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하여 선양하는 까닭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세계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가치를 만들기 위한 유용한 자원으로써 유교=전통문화=(중국의)인문전통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속가능한 대국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중화문화(인문전통, 유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다. 과거를 모델로 미래를 기획하는 중국의 문화사적 관성을 생각할 때 유교적 통치 이념의 적극적 활용, 전략적 의도가 내포된 문화논쟁 및 전통문화의 부활 등 일련의 사회문화적 현상은 전통문화 혹은 중국의 인문(학)전통이 21세기 미래의 중국을 만드는 핵심적인 자원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문화주의에 입각하여 통치되는 국가를 이상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이상을 실천해 왔던 문화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고 본다면 중국에서 전개되는 문화 논쟁이나 인문(정신)을 둘러싼 논의는 중국의 미래를 기획하기 위한 문화적, 지적 노력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 중심에는 중국 모델이라는 새로운 보편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중국이 창안하고자 하는 새로운 보편주의는 중국의 인문전통을 지적, 문화적 기반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인문전통 강조나 <인문공동체> 구상은 극히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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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06.22 15:15

호스피스 철학에서 웰다잉의 문제 :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이은영_철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웰다잉’의 문제가 우리사회에 있어서 상당히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사실을 촉구하면서 출발하였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우리는 ‘웰다잉’에 집중해 있는가? 필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오래 살지만 아프면서 오래 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2012년 기준 60세 남성은 22년, 여성은 27년을 더 살 것이라는 통계가 발표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10여 년을 아프다가 사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계는 선진국이 약 6년인데 반해, 한국의 경우 거의 두 배에 육박한다. 이 사실은 진료비 통계에서도 알 수 있다. 2013년 고령층 진료비는 전체 진료비(50조 7426억 원)의 35%를 차지하며, 사망원인은 암, 뇌혈관 질환, 심장 질환, 폐렴 등의 순이다.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말기 판정에도 불구하고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등 연명의료를 받는 환자는 갈수록 늘어 간다. 가족이 병 수발로 겪는 정신적, 경제적 고통은 마침내 비참한 사건으로 이어진다. 둘째, 아픈 상황에서 빈곤의 심각성이다. 2013년 고령층의 상대적 빈곤율(중위 소득의 50%미만 인구)은 48%로 전체의 3.3배이며 이는 곧 OECD 국가 중 60세 이상의 자살률이 최고라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죽음의 질(quality of death)’ 평가에서 40개 국가 중 32위라고 밝혀지고 있다(Economist intelligence Unit, 2010). 이러한 배경 하에, 최근 들어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국내 연구자들의 다양한 ‘웰다잉’ 연구의 다변화가 시도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물론 본 연구에서 추구하는 호스피스 철학이 본격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연구의 본격적 수행을 예비하는 최근의 몇 가지 의미 있는 움직임들은 눈여겨 둘만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호스피스’ 내지는 ‘호스피스 활동’이 아니라 왜 ‘호스피스 철학’인가? 또한 인간을 탐구하는 철학은 죽음에 대하여 어떤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으며 또한 그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접근 방법은 다른 분야의 방법과 어떠한 차이를 견지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본 글을 출발한다. 


호스피스 철학


호스피스(Hospice)의 어원은 ‘손님을 집에서 정중하게 모셔 후대 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에 의학사전에서는 ‘죽어가는 사람과 가족에 대한 신체적, 심리적, 영적 간호의 형태로 고식적이고 지적인 서비스 제공에 중점을 둔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공공시설’로 명시하고 있으며 숙소나 집의 의미보다 임종환자 내지 그 가족을 포함하는 사람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집과 사람이라는 양자를 함께 ‘집에서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때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의미는 그가 하루속히 성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야 하는데 심신의 피로로 인해 하룻밤 쉬어야 하거나 혹은 신병으로 떠나지 못한 채 며칠 동안 숙소에 그냥 남아 있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더욱이 이들을 돌봐주고 간호해 주는 정중한 마음까지를 다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전인적 돌봄’이라고 할 수 있다. 호스피스의 현대적 정의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호스피스는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와 그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행위로서 환자가 남은 여생동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하도록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영적으로 도우며, 사별 가족의 고통과 슬픔을 경감시키기 위한 총체적인 돌봄이다.(...)따라서 호스피스는 임종자들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희망 속에서 가능한 한 편안한 삶을 살도록 하는데 전념하며 삶과 죽음에 대해 총체적 접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병 뿐 아니라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을 갖고 있으므로 호스피스는 이러한 육체적인 치료와 영적 치료를 같이 해주는 전인치료를 목적으로 하며, 죽어가는 환자 뿐 아니라 그 가족 전체를 돌보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호스피스는 주로 종교적인 활동으로 인식되며, 하나의 운동 내지는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호스피스 운동’(Hospice Movement)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호스피스 정의를 토대로 백승균 교수는 다음과 같이 ‘호스피스 철학’을 규정짓는다, 그에 의하면, “호스피스는 순례자나 병약자를 돌보기 위해 ‘간호’(시간)하는 일과 그들을 편히 쉴 수 있도록 ‘숙박’(공간)하는 일이 중요하다. 즉 호스피스에 있어서는 순례자와 병약자를 위한 숙박과 간호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요소이므로 우리는 이 ‘숙박’(공간)의 개념과 ‘간호’(시간)의 개념을 인간존재라는 바탕에서 철학의 기본범주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를 ‘호스피스 철학’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백승균에 의하면, “호스피스 돌봄 보다는 ‘호스피스 철학’이라고 명명하고, 인간존재와 생명현상, 그리고 그러한 생명의 존엄성이 무엇인가를 호스피스 철학의 이념으로 제시한다. 호스피스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가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며 또한 그러한 인간 삶의 중심축이 바로 인간의 실존임을 주장함으로써 호스피스 활동이나 돌봄 보다는 호스피스 철학”임을 강조하였다. 필자는 백승균의 논의를 적극 지지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적 바탕 위에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부가하고자 한다. 즉 호스피스에 있어서 순례자나 병약자를 돌보기 위한 ‘간호(시간)’와 그들을 쉴 수 있도록 하는 ‘숙박(공간)’이라는 기본범주를 토대로 간호하는 호스피스와 간호를 받는 환자 사이의 ‘관계(태도)’라는 요소를 추가하여 인간존재라는 바탕에서 재해석하려는 것이며, 이를 ‘호스피스 철학’(Hospice Philosophy)으로 규정짓고자 한다.


호스피스 철학의 정초로서 사랑과 공감


필자는 슈타인의 박사논문『감정이입의 문제』에서 제시되었던 감정이입(Einfühlung)의 한 측면인 ‘하나로 느낌’과 ‘더불어 느낌’을 통하여 호스피스 활동의 이론적 근거를 모색해 내고자 한다. 우선 감정이입의 한 형태로서 제시된 ‘하나로 느낌’이다. 슈타인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곡예사와 ‘하나(eins)’가 아니라, 단지 곡예사 ‘곁에(bei)’ 있을 뿐이다. 나는 곡예사의 행동을 실제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즉 곡예사의 행동을 나는 외적으로는 실행하지 않지만 내적으로 함께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곡예사를 ‘고유한 자아’, 지켜보고 있는 나를 ‘낯선 자아’라 할 때, 낯선 자아가 고유한 자아의 움직임을 함께 실행하지 않아도 낯선 자아는 고유한 자아와 내적으로 함께 하면서 내적으로 하나가 되고 ‘하나로 느끼게’ 된다.” 이러한 ‘하나로 느낌’(Einsfühlen)에서는 ‘우리’가 하나로 느낌의 주체이기 때문에 ‘나’의 기쁨과 ‘너’의 기쁨, 그리고 ‘그’의 기쁨은 ‘우리’안에서 유지되며 따라서 ‘우리’의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호스피스는 임종하는 환자의 곁에 있으며, 임종자의 고통스러운 행동을 외적으로 직접 실행하지는 않지만 내적으로 감정이입하면서 함께함으로써 ‘하나로 느끼게’ 될 수 있다. 임종자의 고통을 하나로 느끼려 하는 호스피스의 태도는 심리적, 정서적으로 환자가 자신의 안정감과 만족감을 가지는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더불어 느낌’이다. 슈타인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예컨대 A가 시험에 통과했고, A는 이 일에(시험에 통과한 결과에) 대해서 기뻐한다, A의 친구인 나도 기뻐하는데 기뻐하는 대상이 A의 기쁨 그 자체가 아니라 A가 시험에 통과한 그 결과에 대해서 기뻐하는 것이다. 이 기쁨은 A가 시험에 통과한 사건에 대해서 A와 내가 함께 기뻐함이 된다. 이것이 곧 ‘더불어 느낌’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A가 기뻐하고 있는 그 사건(A가 시험에 통과한 사실)에 나를 옮겨놓는 것이며, 이때 나는 A의 기쁨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서 A와 더불어 기뻐하고(느끼고) 있는 것이다.(PE, 13-14)” 마찬가지로 호스피스는 임종자의 고통에로 자신을 옮겨 놓으며, 임종자가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에 대하여 ‘더불어 느낌’(Mitfühlen)으로써 임종자의 호소에 응답하며 임종자로 하여금 친밀감과 가까움이라는 정서를 느끼게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감정이입의 한 형태로 제시된 ‘하나로 느낌’과 ‘더불어 느낌’의 근저에는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감정에 대한 철학적 가치는 슈타인의 주저『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존재』 전반에 걸쳐 감정이 존재에 접근하는 유효한 방법임을 제공한다고 밝히고 있다. 예컨대, 인간을 실례로 살펴보자면, 전쟁 중에 일어나는 현상들에서 감정을 기술한다. 군대는 거리를 따라서 열을 지어 행진한다. 그들은 경험이 없는, 차별이 없는 무리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엄마와 약혼자는 개개의 군인을 본다. 여기에서 논점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병사들의 통일된 본성(동일성)보다는 이성적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개인의 차별성을 보게 해 준다는 것이다. 통일된 본성은 궁극적으로 신의 전능한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병사들의 통일된 본성(동일성)보다는 개개인에 대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며, 이는 곧 임종을 앞둔,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환자들이라는 동일성 보다는 개개인의 차별성을 통하여 그 고통과 괴로움을 공감할 수 있는 토대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가는 말


2014년 설문조사(건강보험정책연구원)에서 86%가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현재(2015년 3월) 암 사망자의 13%만이 호스피스를 이용하는 실정이다. 말기환자는 그들의 바람과 달리 고가의 검사와 처치로 고통을 받으며 품위 있는 생의 마무리를 위한 돌봄은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호스피스 국민본부는 ‘웰빙의 마무리는 웰다잉’이며 ‘호스피스 제도화로 말기환자 돌봄의 질을 높이고 건강보험 재정을 절감’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국회는 호스피스 제도 도입과 함께 말기환자 완화의료 등을 위한 법안을 제정하고 정부는 웰다잉에 관한 범부처 5개년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그 성과를 점검하는 체계를 갖출 것을 약속하였다. 이미 많은 나라에서는 웰다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시행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오는 7월 1일부터 호스피스에 건강보험을 적용함으로써 말기 판단시점부터 환자의 호스피스 선택을 보장하고 최상의 의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만일 오늘날 개인이 치유를 필요로 하는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마음의 문제뿐 아니라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몸과 감각적 측면 그리고 영혼과 정신적 측면의 상관관계 속에서 문제를 직시해야 함을 강조하는 측면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결국 인간의 죽음은 육체만의 문제라고 지정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영혼이나 정신적인 문제로 판단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웰다잉의 핵심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관점의 웰다잉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그런 한에서 필자가 제시하는 슈타인의 호스피스 철학에서 웰다잉 문제는 우리 사회의 좀 더 성숙한 죽음 문화 형성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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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04.17 14:07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년 학술대회 <근대 문체의 창출과 미디어>




근대초기신문과 단행본 서적의 문체 선택 및 분화 양상 연구

- 서사적 기사와 소설을 중심으로 -




강현조_연세대학교 Open & Smart Education 센터 

글쓰기교실 선임연구원




근대적 매체의 등장과 문체 분화


     한문 대 언문이라는 이중 문어 체계는 사실 전근대 시기부터 존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해 양반·지식인·남성 등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 한문 해독층은 한문을 공식 문어이자 지식·정보의 독점 수단으로 향유해 온 반면, 평민·비지식인·여성 등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 언문 해독층은 주로 서간·기행문·서사물 등의 집필과 향유에 있어 한글을 비공식 문어이자 대항 언어(counter language)로 활용해 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존의 이중 문어 체계는 서구 문물 및 근대적 지식·정보의 수용이 불가피하게 된 새로운 현실의 도래로 인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신문이라는 근대적 매체의 등장은 바로 이와 같은 현실 변화의 계기인 동시에 변화를 촉진시킨 역사적 사건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근대적 매체의 등장에 따른 문체 선택 및 분화의 양상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곧 한문으로 되어 있는 글을 단순히 조사(토씨)만을 붙여 쓸 것인가, 아니면 한국어의 통사적 구조와 어순에 맞추되 한자 표기를 유지하는 형태로 쓸 것인가, 아예 한문 문장을 표기와 어의(語義) 양 측면에서 한글-한국어 문장으로 전환하여 쓸 것인가 하는 문제 상황에 따라 각각 한문현토체(한주국종체), 국한문혼용체(국주한종체), 순국문체 등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한문의 한국어 변환을 위한 각 매체별 선택과 실천의 과정에서 다양한 분화 양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의 모든 기사가 한문으로 집필 혹은 전재(轉載)되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이때까지는 서구의 근대적 문물에 대한 지식·정보의 획득에 있어 언문 해독층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의 지면 안에 한문·국한문·순국문으로 된 기사를 동시에 게재하였던 《한성주보》의 등장은 공식 문어로서의 한문의 지위에 균열을 가함과 동시에 더 이상 한문이 지식·정보의 독점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점을 환기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895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한성신보》 역시 하나의 지면 안에 국한문체 또는 순국문체가 동시에 사용되는 문체 분할의 양상을 노정하였으며, 역시 거의 비슷한 시기의 단행본 서적 출판에 있어서도 유사한 형태로 문체 선택 및 분화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여 근대적 매체의 등장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문체 선택 및 분화의 양상을 통시적으로 고찰하였다. 




<사진_ 14 한성순보. 오마이뉴스>




문체 선택 및 분화의 초기적 양상(1884~1897)


     《한성주보》의 ‘지면 내 문체 분할’은 한문 독해가 가능한 계층 및 집단뿐만 아니라 국한문 혹은 순국문의 독해가 가능한 계층 및 집단까지도 독자층으로 상정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외국 기사의 경우는 중국·일본 등의 신문·잡지에 게재된 원문을 번역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한자어의 고유어 변환뿐만 아니라 한문 문장 자체를 한국어 통사구조에 맞게 고쳐 써야 한다는 과제가 부여된다. 이 글에서는 그 구체적 양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사례를 새롭게 발굴하여 소개하였다. 

     1884년 4월 25일자 《한성순보》에 실렸던 『스페인의 馬爾慕亞가 太平洋을 발견하다(西班牙人馬爾慕亞檢出太平洋)』라는 기사와 2년여 후인 1886년 6월 28일자 《한성주보》에 실린 『스베인사 마르미아가 아다란짓그를 차진 속고』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두 기사는 동일 내용이며, 후자는 전자를 순국문으로 번역하여 다시 게재한 것이다. 같은 뉴스원(news源)에서 기사를 취했지만 《한성주보》는 《한성순보》와 달리 동일 기사의 대상 독자를 순국문 해독층으로 상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성신보》에서는 이러한 ‘지면 내 문체 분할’의 양상이 더욱 본격화된다. 일본인 발행 신문이었던 《한성신보》는 한국어 지면과 일본어 지면을 분할하였고, 한국어 지면은 한문을 거의 배제하고 국한문체와 순국문체를 거의 유사한 비율로 사용함으로써 국한문 해독층과 언문(한글) 해독층 모두를 주요 독자로 상정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순국문으로 된 서사적 기사가 증대하였으며, 허구적 서사물로 볼 수 있는 글들이 잡보란을 통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창간된 순국문 신문인 《독립신문》 또한 잡보란을 두고 있었지만 서사물로 볼 수 있는 글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룬다. 이 글에서는 기존에 알려진 40편의 자료 외에 한국 최초의 ‘소크라테스 약전(略傳)’이라 할 수 있는 『希臘의 雅典國 賢人에 索克이란 사ᄅᆞᆷ에 行實이라』(1895.11.21)와 순국문으로 된 허구적 서사물인 『효자지감신(孝子之感神)이라』(1896.7.20)·『天感至誠』(1896.8.5) 등의 자료를 발굴하여 소개하였다.

     이와 같은 《한성신보》의 순국문 기사 게재 확대 경향 및 허구적 서사물 게재 시도는 일본인 발행 신문임에도 불구하고 《한성신보》가 조선인 독자의 확보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주요 대상 독자가 한문 해독층이 아닌 국한문 해독층 및 언문(순국문) 해독층이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근대적 활자를 이용한 단행본(鉛活字本) 출판의 경우에도 《한성주보》의 등장과 거의 동시에 국한문체로 된 서적이 등장했다. 흔히 최초의 국한문체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1895)이지만, 《한성주보》의 회계주임을 역임하기도 했던 정병하(鄭秉夏)가 저술한 『농정촬요(農政撮要)』(1886)가 훨씬 앞선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성신보》의 발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단행본 서적의 출판에 있어서도 국한문체와 순국문체의 선택 및 분화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학부 편집국이 발간한 『만국지지(萬國地誌)』(1895)·『만국약사(萬國略史)』(1895)·『조선역사(朝鮮歷史)』(1897) 등의 교과서들은 정부 주도의 출판인 동시에 사류(史類)라는 양식적 특성이 반영되어 대체로 국한문체가 선택되는 경향이 높았다. 이에 비해 민간 출판의 경우에는 주로 순국문체가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번역되거나 집필된 기독교 서사문학의 한국어 번역물 출판 사례가 이에 해당하며, 『천로역정』(1894)·『쟝원량우샹론』(1893)·『인가귀도』(1894) 등을 들 수 있다.

     요컨대 근대적 형태의 단행본 출판에 있어서도 국한문 서적(관 주도)과 순국문 서적(민간 주도)이라는 방식이 양분되어 있었고, 전자는 사류(史類)를 포함한 교과서에, 후자는 주로 서사성을 띤 저작물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서적별 문체 분화 양상 역시 신문과 마찬가지로 18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1890년에 본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1890년대의 신문 발행과 단행본 서적 출판이라는, 즉 근대적 매체의 본격적인 도입과 그 메커니즘의 작동은 필연적으로 문체의 선택 및 분화 현상을 야기하였고, 나아가 서로 다른 해독 문자를 가진 독자층의 분화 및 확대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1898년 이후의 문체 선택 및 분화 양상


     1898년 이후에는 다수의 순국문 신문들과 소수의 국한문 신문들이 독자 확보를 위한 상호 경쟁을 벌였다고 할 수 있다. 1월 1일 《협성회회보》(4월 9일자로 《매일신문》으로 개명됨)의 창간을 필두로 하여 《제국신문》(8.10)과 《황성신문》(9.5)이 잇따라 창간되면서, ① 국한문·순국문 혼용 신문(《한성신보》), ② 국한문 신문(《황성신문》), 그리고 ③ 다수의 순국문 신문(《독립신문》·《죠션(대한) 크리스도인 회보》·《그리스도 신문》·《협성회회보(매일신문)》·《제국신문》 등)이 공존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창간된 신문들은, ‘지면 내 문체 분할’ 방식을 선택한 《한성신보》와 달리, 매체별로 단일한 특정 문체를 선택함으로써 특정 문자 해독층을 주요 대상 독자로 삼는 형태로 존재했다. 이는 신문 시장 및 독자층 전체의 확대라는 당대의 추세에 상응한 결과이겠지만, 아울러 독자층의 분화 현상 및 신문사별 목표 독자의 차별화 추구 경향과도 결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잡보란에 허구적 서사를 포함한 서사적 기사의 게재 비율이 증대하였고, 소설란 또한 경쟁적으로 개설되었다. 《한성신보》는 이미 1897년 최초로 소설란을 개설하였고, 1906년에 이르면 《대한매일신보》(2월), 《황성신문》(5월), 《만세보》(7월) 《제국신문》(9월), 《경향신문》(11월) 등의 순으로 거의 대부분의 신문에 동시다발적으로 소설란이 개설된다. 하지만 <혈의루>의 등장 이전인 1904~1906년에도 신문에는 잡보란 등을 통해 서사물이 지속적으로 게재되고 있었다. 따라서 1906년에 나타난 각 신문별 소설란의 개설(속출)은 돌발적이고 비약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연속적인 현상의 누적 속에서 발생한 결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요컨대, 1898년 이후 복수(複數) 신문 공존 체제 및 신문 간 경쟁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각 신문들은, 《한성신보》를 제외하면 대체로 매체별로 단일한 특정 문체를 선택함으로써 특정 문자 해독층을 주요 대상 독자로 삼는 형태로 존재했으며, 국한문 해독층보다는 순국문 해독층을 목표 독자로 삼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전반적인 신문 시장의 확대 및 순국문 해독층의 저변 확대에 따라 순국문 신문들 사이에서도 독자층의 분화 현상 및 신문사별 목표 독자의 차별화 추구 경향 또한 나타났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다시 순국문 독자층의 확대를 견인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결과 국한문보다는 순국문으로 된 서사적 기사 및 허구적 서사물의 비율이 우세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일종의 단선적 진화(발전)의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순국문 우세의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국한문체 기사 및 서적의 신문·출판 시장 지분 점유 양상은 일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오랫동안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나오며


     신문과 단행본을 아우르는 문체 선택 및 분화의 양상은 대체로 국한문보다는 순국문의 우세라는 결과로 귀착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1910년대 이후까지도 여전히 국한문체의 언론·출판 시장 지분 점유 양상이 포착되는 것으로 보아 국한문-순국문 양분 구도는 후자의 우세 속에서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근대초기 문체 선택 및 분화의 양상은 발전론(진화론)적 관점에서 포착되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연속과 단절의 국면이 동시적으로 표면화되었던 당대의 양상을 최대한 놓치지 않고 포착하려는 태도는 이 시기 문체 선택 및 분화 양상의 연구에 있어 불가결하게 요청되는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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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5.04.17 13:58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년 학술대회 <근대 문체의 창출과 미디어>




근대 매체와 한글 가로 풀어쓰기의 실험      

            



                                    권두연_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박사 후 연구원




한글 가로 풀어쓰기라는 문제틀


     훈민정음 반포 후 500여년이 지나 한자를 배제한 한글만으로 된 문자 사용의 전면화가 가능해졌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나가는 가로쓰기나 영어 알파벳처럼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각 분리해서 풀어쓰는 시도들은 모두 이 부산물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이 둘을 동시에 실행한 한글 가로 풀어쓰기는 한자와의 단절을 통해 한글로만 된 완벽한 문자 환경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초기 국어학자들뿐 아니라 선교사, 매체 편집인 등 한글을 상용하고자 한 이들에게 매력적인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로쓰기는 채택되었지만 풀어쓰기는 그렇지 못했다. 이 글은 초창기 한글 가로 풀어쓰기가 어문학자들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 관련자들 특히 최남선과 이광수 같은 신문학자들에게도 공통으로 시도되었음에 주목하여 그 양상을 고찰하고 이를 통해 풀어쓰기가 채택되지 못한 하나의 단서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가로쓰기의 다양한 용례들


     한글 가로쓰기를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 주시경이라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는 듯하다. 주시경은 1897년 9월 28일자 ⌜독립신문⌟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나가는 가로쓰기의 유용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1909년 국문연구의 철자법에서는 가로 풀어쓰기의 용례를 단 한 줄이지만 흘림체와 함께 제시하였다.

     물론 가로쓰기의 용례는 이미 이전부터 서양 선교사들의 작업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바, 페론(S. Feron) 신부의 필사본 ⌜불한사전 1868)을 필두로 리델이 편찬한 ⌜한불자뎐 (1880), 게일이 편찬한 ⌜한영자뎐 (1897) 등 서양의 알파벳을 표현하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동반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외국어 사전에 가로쓰기가 일관되게 적용된 것은 아니다. 러시아 사람인 푸칠로가 편찬한 로조사전 의 경우 러시아 문자는 가로로, 거기에 대응되는 한글은 세로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인에 의해 편찬된 國漢會語(1895)에도 “字行은 從左達右”라며 실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자를 쓰고 있고 이는 “外國冊規”을 본뜬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홍윤표, 2013) 그러니까 한글 가로쓰기가 서양 알파벳을 본떠 실시되었다는 주장이 전혀 설득력이 없는 얘기는 아닌 셈이다.

     그런데 이들의 가로쓰기에서 풀어쓰기의 용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알파벳 하나하나를 독립해서 써야 하는 선교사들 입장에서 본다면 한글 자모 역시 독립된 음소로 썼을 법한데, 그러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주시경을 비롯하여 가로쓰기를 주장한 이들의 한글 가로쓰기에는 풀어쓰기가 거의 전제되어 있다시피 하다. 다시 말해 초기 서양 선교사들이 한글을 가로쓰기 할 때 풀어쓰기는 동반되지 않은데 반해 한글 연구자들은 달랐다. 가로쓰기는 풀어쓰기의 필요 요건이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세로로 된 풀어쓰기는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풀어쓰기, 그 미완의 실험


     한글 전용이 전면화 되고 가로쓰기가 정착된 오늘날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로쓰기를 굳이 풀어쓰기와 함께 논의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한글 가로쓰기가 채택되기까지의 과정은 최현배의 표현처럼 “혁명”에 가깝다.(최현배, 1947)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은 표제를 가로로 썼지만 그 방향은 오른쪽에서 왼쪽이다. 매체의 표제에서부터 광고, 삽화, 사진(口繪) 등에 가로쓰기가 왕왕 보이지만 거의 모든 경우 세로쓰기의 독법과 같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되어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가로쓰기가 대중적 이해를 얻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상용화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설득력을 갖추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소요되었다. 

     풀어쓰기가 미완의 실험으로 남은 것도 이 과정의 산물이다. 최현배를 비롯해 많은 국어학자들이 한글 가로 풀어쓰기를 이론화하고 다양한 예문을 통해 접근성을 높이려 했음에도 실현되지 못했던 것은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처음부터 가로쓰기와 함께 제시되었고 그 반감도 비슷했지만 음절 단위로 사용되어 온 한글의 오랜 관습을 개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애초 음소문자로 창제된 한글이 음절 단위로 사용되어 온 오랜 전통을 불식시키고 음소화를 실현하려 한 풀어쓰기의 이상(理想)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근대 초기 국어학자들 외에도 다양한 매체 관련자들이 참여했고, 특히 한글 가로 풀어쓰기가 ‘2인 문단시대’의 주역으로 꼽히는 최남선과 이광수와 같은 문학자들에 의해서도 시도되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 있다.


1914년 각각 다른 지면에 소개된 한글 가로 풀어쓰기


            ⌜아이들보이



1914년, 세 사람과 세 지면


     1914년 주시경이 서거한 해에 출판된 그의 저서 말의 소리(1914.4)에는 '우리 글의 가로쓰는 익힘'이 가로 풀어쓰기 되어 있다. 가로쓰기라는 명칭과 가로 글의 유용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이 글은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사례이다. 이는 이후 김두봉을 거쳐 최현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전, 변주된다. 흥미롭게도 동시기에 최남선이 주간을 맡고 있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잡지 ⌜아이들보이1914.2~1914.9)와 시베리아 행을 감행한 이광수가 러시아로편집을 맡게 된 러시아 한인들의 기관지인 ⌜대한인정교보(1913.3~6)에도 한글 가로 풀어쓰기가 실린다. 

     전자는 <한글>란을 통해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 관한 다양한 예문을 선보였으며 특히 가로로 풀어 쓴 한글을 다시 세로로 모아 쓴 <한글풀이>를 별도의 형식으로 제시하였다. ⌜아이들보이가 선보인 이 <한글풀이>는 김윤경이 1937년 ⌜한글 지에 주시경의 예문을 가로로 풀어쓴 "내리글씨"의 원리와 유사하다. 후자 역시 <우리글>이라는 고정란을 만들어 가로쓰기에 관한 이론적 접근은 물론, 자모의 예에서부터 자작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였다. 무엇보다 흘림체를 선보였는데 이는 김두봉(깁더조선말본, 1922)이 제시한 것보다 8년이나 앞선다는 점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경향신문 1979.12.18과 한글새소식 89호, 1980.1)

     더욱이 이 세 지면에 나타나는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는 몇 가지 유의미한 차이들이 드러난다. 풀어쓰기의 단순성으로만 보자면 아이들보이->말의 소리->대한인정교보⌟ 순으로, 갈수록 복잡해지는 양상을 띤다. 이처럼 풀어쓰기가 복잡해지게 된 배경에는 음소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혼란으로부터 음절 분리를 명확히 하려는 의도가 포착된다. 그렇지만 본래 한글에는 없는 H/U나 딴이(Ĭ)와 같은 문자의 도입과 이로 인해 난해해진 형태는 오히려 훗날 풀어쓰기에 비판의 빌미를 작용해 가로쓰기만 채택되는 결과를 불러온다.



주시경의 말의 소리⌟(김윤경, 1937)




대한인정교보


     근대 초기 한글 가로 풀어쓰기의 실험은 단순히 국어학의 문제나 국어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새로운 매체를 만들고자 한 이들, 나아가 새로운 시나 새로운 소설을 쓰고자 한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중요한 문제였고 시도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결국 매체란 언어를 통한 ‘읽을거리’의 생산이고 만드는 사람과 향유하는 사람, 필자와 독자,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관계 속에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며 내용과 형식 역시 그 과정에서 결정될 터였다. 최초의 근대 한글 장편 소설을 쓴 이광수나 신체시의 창시자인 최남선이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문학 역시 언어를 통한 예술이며 그 선두에는 언제나 언어에 대한 고민이 먼저 놓여 있었음을 방증한다. 



데칼코마니, 시대를 앞서 간 글자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 관한 선행연구들을 고찰하면서 떠오른 이미지는 미술에서 흔히 이용되는 데칼코마니(décalcomanie)였다. 초기 국어학자들만으로 구성된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 관한 언급과 서술들이 마치 한쪽 면이 가려진 채, 전체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과 흡사하다고 생각되었다. 1914년 동시기에 발생한 언어 실험들, 특히 매체와 관련한 여러 다양한 시도들이 함께 다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이 그림은 온전히 재현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편 주시경을 비롯하여 한글 가로 풀어쓰기를 주장한 이들이 한결같이 ‘박음술’의 이점에 대해 언급한 사실을 상기한다면 인쇄 (불가능한) 기술과 밀접하게 관련된 데칼코마니의 이미지는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 또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 준다. 가령 주시경의 필체로 쓰인  말의 소리의 한글 가로 풀어쓰기는 책의 마지막 쪽에 부록으로 삽입되었고 아이들보이의 경우도 별도의 페이지로 덧붙여졌으며 대한인정교보의 경우도 석판 인쇄였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인쇄에 유용하다는 이들의 주장과 달리 기술력의 부족으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1914년은 최초의 한글 타이프가 발명된 해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 한글 타이프의 존재는 그다지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실용성도 검증되지 않았다. 한글 타이프의 상용화는 훨씬 후대에야 가능해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타이프의 원리가 한글 자모 체계의 혁신성을 보다 가시화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1914년 한글과 관련한 다양한 시도들, 그 가운데 한글 가로 풀어쓰기는 글자 하나하나를 (풀어) 치는 타이프의 발명과도 연동될 여지를 남기지만 정작 활자를 집자하는 당시의 인쇄 환경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설적으로 미래적인 문자였던 셈이다.  



<참고문헌>

최현배, 글자의 혁명, 군정청 문교부, 1947.

홍윤표, 한글이야기1, 태학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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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4.12.31 19:54

서강대학교 심리학과 2014년 9월 금요콜로키움

 

한글과 영어에서의 글자 전환 효과

 

이창환 _ 심리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심리학과는 2011년 이래로 매월 학과 교수님이 직접 자신의 최근 연구결과를 발표하거나 학과 교수님들의 추천을 받아서 외부에서 저명한 학자를 초빙하여 발표 콜로키움을 가지고 있다. 이는 대학원생들에게 최신 연구 동향과 연구 성과물을 소개함으로써 학습 향상과 각자의 논문 아이디어 생성에 도움이 되고 있다.

 

이번 가을학기 첫 콜로키움으로 발표된 주제는 한글과 영어에서의 글자 전환 효과비교와 이에 대한 이론적 논의이다. 언어심리학계에서는 대부분의 연구가 영어와 같은 로마자 알파벳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기에 제안된 이론들을 모든 언어에 일반화하는데 한계가 있다. 이에 본 발표에서는 대표적인 단어처리 현상인 글자전환효과를 중심으로 한글과 영어의 수행을 비교하여 기존의 영어권 기반 이론들의 한계를 지적하고 한글기반 모형의 단초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언어 간 비교(crosslinguistic comparison)를 통하여 일반화된 이론을 만드는 연구방식은 언어심리학에서 전형적인 것이며, 연구가 단어처리에서의 주요 현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본 연구에서 관심을 가진 언어에서의 주요 현상은 글자 전환 효과(Letter transposition effect)이며 이는 지난 10여 년간 단어재인 분야에서 많은 연구 출판이 이루어진 주제이다. 글자 전환 효과는 단어 중간 또는 말미에 글자들이 서로 위치가 바뀌어 졌을 경우 원래의 단어와 혼동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 Lee & Taft, 2011; Kim, Lee, Lee, 2012; Gómez, Ratcliff, & Perea, 2008). 예로 “judge" 와 같은 영어 단어의 가운데 글자들을 서로 교환하여 ”jugde"를 피험자에게 제시할 경우 원래 단어로 착각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 어휘판단과제(예: "jugde[비단어로 판단해야 함]" 의 반응시간 측정을 측정하면 판단이 느림)를 비롯하여 점화과제에서의 수행 (예: JUGDE [점화자극; 컴퓨터 화면에서 미리 주어지는 자극] -> judge [목표자극] 의 수행이 상대적으로 좋음), 눈 운동 패턴 연구 (예: jugde를 단어로 착각하는 패턴) 등에서 일관되게 보고되었다.

 

글자 전환 효과가 단어재인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로 단어 내 글자가 어떻게 부호화되고, 위치가 정해지는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글자 전환 위치가 글자의 어디인지(예: 전반부, 후반부)에 따라서 단어 내 차등적인 글자위치의 중요성과 처리 순서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여 줄 수 있다. 최근까지의 일반적인 보고는 초반이나 후반부의 글자들이 교환된 경우(예: judge -> ujdge [초반])에는 중반부의 글자들이 교환된 경우보다 유의미하게 적은 혼동을 야기한다(Guerrera & Forster, 2007). 글자 전환 효과가 특히 이론적으로 중요한 이유로 글자 전환 효과의 양상은 단어재인의 초기과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그 이유는 글자 전환에 영향을 주는 변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따라서 단어재인 초기 과정에서 관여하는 변인의 종류와 처리 양상을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전통적으로 단어재인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형태소 정보가 단어재인의 초기 단계에 관여하는 지 여부인데, 글자교환을 통해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즉, 형태소의 경계를 넘어 글자 전환을 한 경우 (runway -> ruwnay [run 과 way는 형태소인데 n 과 w가 형태소 경계를 넘음]), 글자 혼동효과가 통제 조건(예: runawy[통제조건은 형태소 내 교환])에 비하여 더 일어난다면 이는 형태소정보가 상당히 초기 단계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히브리어, 중국어 등 몇몇 나라에서의 연구들이 있어 왔으며 글자 전환효과가 일관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로 기존 영어권 모형의 수정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이들 연구자들의 기본적인 방향은 영어권 단어 연구자와 협력하여 영어의 글자 전환 효과와 해당 자국 언어 간의 글자 전환 효과의 양상을 비교하여 언어 특정적 변인을 제시함으로써 기존 언어 모형에 대한 수정을 제안하고 있으며 보다 보편타당한 일반 언어처리 모형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영어와 형태적, 의미적, 음운적으로 다른 특성을 가진 한글의 글자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환하고 이에 대한 어휘판단 실험들을 실시하였다. 어휘판단 과제는 컴퓨터에 제시된 글자열이 단어이면 “예” 라는 반응을 하고, 제시된 글자 열이 비단어이면 “아니오” 라는 반응을 하는 전형적인 실험 언어과제이다.

 

실험 1에서는 두음절로 구성된 단어의 음절 간 초성과 초성(예: “문장” ->“준망”), 종성과 종성(예: “문장” -> “뭉잔”), 또는 가운데 두 글자(예: “문장” -> “뭊낭”) 를 교환한 글자 열에 대한 어휘판단을 실시하였다. 실험 2에서는 단어의 음절 내 초성과 종성 (예: “문장” -> “눔장” [첫음절 초성과 종성 교환])를 교환한 글자 열에 대한 어휘판단을 실시하였다. 실험 3에서는 한글에서 글자 혼동 효과가 나올 수 있는 조건으로 말미자음군 을 포함한 단어 (예: 닭)에 주목하여 말미자음들을 교환한 것이 혼동을 일으키는지를 알아보고자하였다. 마지막으로 영어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글자들을 교환(실험 4-6)하여 한글의 양상과 직접 비교하였다.

 

연구결과, 한글에서는 전반적으로 어휘판단이 용이하여 실험3을 제외하고는 글자 전환효과가 나오지 않았다. 반면, 영어단어에서 모든 조건에서 글자 전환된 비단어에 대한 판단이 훨씬 더 어렵고 오류를 많이 생성하여 상대적으로 더 유의미한 글자 전환효과가 나타났다. 이는 단어재인시 영어는 글자 위치가 정해져 있지 않고 각 글자가 유동적으로 지각됨을 의미한다. 반면, 한글은 글자들의 위치가 정해져 있고, 초성, 중성, 종성의 단위로 묶여서 지각됨을 의미한다. 한글 실험3에서 말미자음간 교환에서만 혼동이 일어난 결과는 자음간의 교환이 종성이라는 처리 단위 내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영어권 글자전환 모형은 한글을 비롯하여 로마자가 아닌 언어에는 일반화할 수 없고, 각 언어집단 별로 특정적 처리 모형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글은 초두자음과 말미자음이 로마자 언어에 비하여 비교적 물리적으로 지정된 위치(글자의 위와 아래 의미)에 반드시 쓰여 져야 하고 따라서 초두자음과 말미자음이 어휘접근의 기능적인 단위로서 작동할 개연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실험 1과 2의 전형적인 글자 교환 조건들에서 한글의 경우에는 거의 오류가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기존의 영어권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잠정적인 결론으로 한글의 경우는 언어의 형태학적 특성상 초두 자음과 모음, 말미 자음의 위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글자 위치정보가 기능적으로 어휘접근에 간여한다는 모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향후 몇 가지 보강 연구가 필요하다. 우선 본 연구의 실험 1과2는 한글의 대부분의 단어가 복음절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음절 단어로 실시되었는데, 많은 기존 영어권 연구는 단음절 단어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예: cat -> tac; 두 글자를 바꿈). 따라서 한글 연구도 단음절 단어(예: 공)를 사용하여 이들의 초성과 종성을 바꾸는 방식 (예: 상 -> 앗)에 대한 수행을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영어권 연구의 한 방향은 점화과제를 사용하여 글자 전환된 자극에 대한 보다 무의식적인 처리의 양상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즉, 글자 전환된 자극 (예: tac)을 점화자극(미리 보여 주는 자극을 의미)으로 약 50ms 내외 보여주고, 목표자극(예: cat; 피험자가 수행을 해야 하는 자극)에 대한 수행을 알아보았다. 점화자극을 50ms 내외로 제시한다는 것은 단어 처리의 지각 단계를 반영하기에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글자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알아보기에 적합한 실험조작이다. 따라서 향후 한글도 영어권과 유사한 실험 자극과 실험 조작을 구현하여 언어 간 동등한 조건에서의 이론과 수행을 비교하는 연구를 축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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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4.12.31 19:50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 2014년 11월 정기세미나

 

“사회복지 생태계 담론의 분석: 그 가능성과 한계의 탐색”

 

박시종 _ 열린사이버대 교수

 

1. 사회복지 생태계 논의를 위한 이론적 자원

1) 권력자원과 사회복지 생태계

코르피에 따르면, 시장에 맞선 정치에 있어서 노동계급이 자본가계급의 권력자원에 대항할 수 있는 권력자원을 어떻게 창출하느냐에 따라 민주적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자원 분배 관계와 민주적 계급투쟁의 결과는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대신에 계급투쟁의 전개 양상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에스핑앤더슨은 이러한 권력자원의 시각에서 현대 서구 복지국가 체제를 분석한다. 노동조합 조직률과 좌파 내각의 점유율을 경험적 지표로 하는 권력자원 시각에서의 경험적 연구(Esping-Andersen, 1990)는 노동계급의 동원이 강한 사회일수록 복지발전 수준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지역사회복지 생태계의 가능성과 한계를 따지는 현재의 논의에 어떠한 시사를 던져주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지역사회 안에 존재하는 복지자원의 보유자들과 복지의 수혜자들 사이에 권력자원의 분배가 어떠한가에 따라 복지 생태계의 구조화 양상은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복지 수혜자들의 권력자원에 대해 복지자원 공급자들의 권력자원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상황이라면, 해당 지역사회의 복지 생태계는 지극히 공급자 친화적인 배열구조를 보여주게 될 것이고, 그 반대의 상황이라면 지역사회의 복지 생태계는 복지 수혜자들의 욕구를 어느 정도 반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게 될 것이다.

 

2) 시민권(citizenship)과 사회복지 생태계

소머스(Somers, 2008)에 따르면, 시민권은 국가와 시민사회, 시장 간의 권력 투쟁의 결과에 따라 ‘민주적이고 사회적으로 수용적인 시민권 체제(democratic and socially inclusive citizenship regime)’로 발전해갈 수도 있고, 역으로 디스토피아적인 시민권 체제로 퇴행할 수도 있다. 어느 한 사회의 시민권 체제는 국가와 시장, 시민사회가 공적 영역(public sphere) 안에서 권력투쟁을 전개한 결과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만일 시장이 국가와 시민사회와의 권력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함으로써 시장근본주의를 향해 나아간다면, 시민권의 계약화가 강화될 것이며, 그러한 상황이 진전된다면, 시민권 체제는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체제로 귀결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시장의 보호막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민사회가 국가의 시장화를 저지하고, 그럼으로써 시장의 팽창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게 된다면, ‘권리를 보유할 권리(the right to have the rights)’로서 시민권은 시민들을 사회적으로 동등한 자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을 보장하는 민주적이고 수용적인 시민권 체제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가장 일차적인 공간으로서 지역사회 역시 국가와 시장, 시민사회의 각 제도들이 공적 영역을 매개로 끊임없이 권력투쟁을 전개하는 권력투쟁의 장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투쟁의 결과, 국가와 시장, 시민사회 간의 권력구도가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따라 지역사회의 복지 생태계도 그 성격을 달리할 것이 분명하다. 이를테면 국민국가 수준에서 전개되는 시장근본주의와 국가의 시장화 추세가 지역사회 수준에서마저 여과없이 그대로 작동한다면, 지역사회의 복지 생태계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상흔으로 얼룩질 것이다. 반대로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민사회 세력들이 국가권력과 시장권력의 유착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가운데 공적 영역을 통해 국가를 견인하고 그 연합 권력을 활용하여 시장의 침투와 팽창을 효과적으로 저지한다면, 적어도 해당 지역사회 수준에서는 ‘민주적이고 사회적으로 수용적인 시민권 체제’가 작동하게 될 것이다.

 

3) 복지 축소의 논리와 복지 생태계

피어슨에 따르면(Pierson, 1994), 복지 팽창 국면의 정치와 복지 축소 국면의 정치는 다른 논리에 의해 지배된다. 신뢰 창출을 내세우는 복지 팽창의 정치와 달리 복지 축소 국면에서는 ‘비난 회피(blame avoiding)’의 정치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축소 옹호론자들은 정치적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 다양한 전략들을 강구하게 된다. 복지 축소의 정책결정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 수 없도록 만드는 눈가리기 전략이라든가, 복지 수혜자 집단을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시키는 분할 전략, 혹은 복지 이해관계자들 가운데 일부에게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는 전략 등을 구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피어슨은 복지 축소를 연구하고자 할 때는 첫째, 단기적인 지출 삭감과 함께 장기적인 삭감을 아울러 검토할 것, 둘째, 프로그램 지출만이 아니라 프로그램 구조까지를 함께 검토할 것, 셋째, 프로그램적 축소만이 아니라 체계적 축소까지도 아울러 연구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의 논의에서 특히 중요한 논점은 체계적 축소이다. 피어슨은 구체적으로 체계적 축소의 네 가지 형태를 거론한다. 첫째는 이른바 ‘돈줄 옥죄기(defunding)’로 불리는 것으로, 정부가 장래 행정부로 세입이 흘러들어가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복지재정의 돈줄을 옥죄는 방식이다. 이러한 돈줄 옥쥐기에는 감세 정책이나 과세등급 상승을 배제하는 것, 혹은 복지국가 용도 외 지출을 증대시키는 방법 등이 포함된다. 둘째는 대중들로 하여금 민영화의 정당성을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는 정치제도의 변경을 통한 장기적 축소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근한 예로 재정이 넉넉지 못한 지방정부들에게 복지공급의 책임을 전가하는 제도 변경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이해관계 집단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이러한 피어슨의 논의는 우리의 현재의 논의에 어떠한 시사를 제공하는가? 지역사회 복지 생태계 담론의 가능성과 한계를 논의하고자 하는 목하 우리의 논지에 비추어볼 때, 지역사회의 복지 생태계를 둘러싸고 그 안팎을 선회하는 프로그램적 축소와 체계적 축소의 논리와 정치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일례로 지역사회의 복지 생태계를 확충하고자 하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를 에워싸고 있는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에서 프로그램적 축소를 강요하거나 체계적 축소를 추구한다면, 지역사회의 복지 생태계 확충은 한낱 희망으로 끝나고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또 다시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사태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2. 사회복지 생태계 담론의 가능성과 한계

1) 사회복지 생태계 담론의 가능성

구체적으로 복지 생태계 담론이 한국사회에 가져다줄 긍정적 잠재력의 측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복지 생태계의 담론이 오랜 시간 동안(국가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모든 생태적 요소들의 공동의 삶터로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의 공간으로서 전통적인 ‘마을’을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를 의미한다고 할 때 그러한 시도가 갖는 다양한 의미의 긍정적 잠재력에 관한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다른 한 가지 측면은 복지 생태계의 담론이 비록 그 기획 단계의 관 주도성을 여전히 탈각하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실천의 주체가 지역 주민이고, 그렇기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참여와 자발성에 기초한 프로젝트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상향식 접근 방법이 가져올 확장 가능성의 차원에 관한 논의이다. 쉽게 말해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문제 해결 역량 강화가 가져올 지역사회 복지 생태계의 변화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복지 생태계 조성 사업이 세타가야의 환경공생 마을을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이 마을 자체가 갖는 무한한 긍정적 잠재력과 생태적 가치를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획 단계를 벗어나서는 철저히 주민 주도적이고 주민 참여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아직 그 사업의 초기 단계이기에 구체적인 성과를 논의할 수 없지만, 현재 서울시 복지재단이나 각 지방정부들이 추진하는 마을공동체 복원 프로젝트는 분명 세타가야의 긍정적 잠재력을 일정 수준 구현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복지 생태계 조성의 기획이 아래로부터의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는 데서 엿볼 수 있는 긍정적 잠재력의 차원이다. 언필칭 풀뿌리 민주주의를 논하지만, 주민에 의한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의 구성 자체만으로 풀뿌리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심급은 국가의 권력구조와 헌정질서의 민주화에서부터 각 개인의 생활세계의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깊고 또 광범하다. 그 가운데 ‘풀뿌리’의 의미에 가장 적절한 것이 마을 수준의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공유의 차원이 아닐까 한다. 마을이 위치한 자연생태 조건은 결코 사적 소유의 대상일 수 없으며, 인간 상호간의 친밀한 관계 역시 사회자본이라는 이름으로 경제적 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소중한 공동체의 자원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자원들의 보존과 공유야말로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토대라고 할 것이다. 마을공동체 복원이나 복지 생태계 조성은 바로 이러한 진정한 의미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주민 주도적으로 구축해나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복지 생태계 조성을 통해 이러한 자발성과 민주성이 복지 풀뿌리 조직에서부터 확산된다면, 이제까지의 제도적 민주화, 형식적, 절차적 민주화의 심급을 넘어 생활세계의 민주화로 나아갈 수 있는 긍정적 잠재력이 충분히 엿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세계의 민주화, 자연생태와 복지자원의 공유화가 일정한 성과를 거둔다면, 개인을 출발점으로 하여 미시체계와 중간체계, 외부체계를 거쳐 거시체계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도 일정한 대항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복지 생태계 담론은 마을 수준에서 시작하여 지역사회 수준, 나아가 국가 전체 수준에 이르기까지 ‘민주적이고 사회적으로 수용적인 시민권 체제’를 떠받치는 초석을 놓는 긍정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2) 복지 생태계 담론의 한계

신자유주의의 복지 담론은 당연히 축소 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시장근본주의를 전면화하는 시장과 국가의 지배연합은 정책의 변경이나 이데올로기의 확산, 혹은 보수의 수사학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사회적인 것들을 경제적인 것들로 전환시키고 비계약적인 관계들을 계약화하며, 국가화되어 있던 모든 것들을 민영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복지 생태계 담론이 쏟아지고 있는 바로 오늘, 우리 한국사회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압력에 겹겹이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시장과 국가의 지배연합의 압력은 복지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체계들, 즉 개인과 미시체계, 중간체계, 외부체계, 거시체계 등 모든 체계들을 포획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을 주민들의 삶의 공동성과 자연생태의 생명 가치들을 보존하는 가운데 삶의 질과 복지, 환경의 다차원에서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조성하고자 하는 마을공동체 만들기에 관련되는 모든 체계들이 권력투쟁에서 패자가 되어 시장의 압박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역 수준이든 국가 수준이든 시민사회는 국가와 시장의 지배연합에 맞설 역량을 상실한 지 오래이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10%를 밑돈 지 오래이며, 노동운동의 중심성이 흔들리면서 여타의 신사회운동 세력들과의 수평적 연대도 날로 느슨해지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한국사회 시민사회의 모습은 국가의 시장화와 시장의 자연화를 제어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인 실정인 것이다. 지역 내 복지 생태계의 구성 요소들인 공공기관, 복지관과 복지시설들, 주민사회 등도 점점 보수화 편향을 보여주고 있다. 허쉬만이 말하는 ‘보수의 수사학’(역효과의 명제와 무용성의 명제, 위험 명제 등)이 효과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형세인 것이다.

국가와 시장의 지배연합은 시민사회의 와해를 틈타 보편복지를 ‘무상복지’란 이름으로 낙인찍기를 시도하면서 가장 초보적인 단계의 보편복지마저 무력화하고 일체의 복지를 선별복지로 퇴행시키고자 하고 있다. 여기에 보수적인 언론환경은 보편복지의 담론을 방어하는 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아가 이 지배연합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은 복지 생태계 담론의 한 요소로 자리하고 있는 사회자본의 확충을 통한 복지 네트워크의 확대를 추동함으로써 공동체의 무형의 자산이자 사회적인 것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인간적 관계들을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비계약적인 사회적 관계들의 연결망을 점진적으로 해체해가고 있다.

 

상황의 비관적 전망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복지 생태계 조성 과정에서 촉진자, 조력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지역사회복지 실천 전문가들마저 국가 의존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의 지역사회에서 직접 복지 서비스 공급의 실천을 하고 있는 지역복지봉사센터나 자원봉사센터들은 물론 각종 사회복지 시설들이 예외없이 공적 재정에 대한 심각한 의존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저지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최소한의 역량은 일정한 수준의 탈상품화를 전제로 한다(Esping-Andersen, 1990, 1999). 이런 의미에서 한국사회의 탈상품화 수준은 너무나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OECD 최고 수준의 노인빈곤율이나 노인자살률이 한국사회의 낮은 탈상품화 수준을 잘 말해주고 있다(OECD, 2014).

 

결국 이 같은 정황들을 종합하건대, 마을공동체 만들기 붐이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복지 생태계는 국가, 자본(시장), 시민사회 간 제도적 권력 투쟁에 의해 형성되는 권력자원의 분배 양상이 복지 생태계 조성 과정에 속속들이 영향을 미침으로써 복지 생태계 조성에 결코 유리하거나 호의적이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향후 복지 생태계 사업이 일정 규모로 성장하여 보다 많은 재정적 수요가 예견되는 경우에는 언제든지 무상복지 논란과 유사한 ‘보수의 수사학’과 집요한 저항에 부딪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진단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3. 글을 맺으며

복지 생태계 조성사업의 성공 여부는 국가와 시장의 지배연합에 맞서 시민사회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시장근본주의를 저지하고 국가를 시장으로부터 분리시켜 시민사회의 우군으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만일 국가와 시장, 시민사회의 제도적 권력 간의 권력자원 분배가 현재의 양상과 같이 계속 유지된다면, 복지 생태계 프로젝트의 전망은 지극히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진단이다. 다만, 복지 생태계 조성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통한 생활세계의 민주화가 진전된다면, 진정한 풀뿌리 복지조직의 활성화를 매개로 시민사회의 민주화 동력이 확대될 수 있고, 그런 시민사회의 임파워먼트를 기대할 수 있다면 복지 생태계 프로젝트는 새로운 복지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열려 있게 될 것이다.

지난 대선을 전후하여 한국사회에서는 역동적 복지국가론(이상이, 2010), 정의로운 복지국가론, 사회투자전략론, 사회투자국가론 등 복지국가 담론들이 활발하게 전개된 바 있다. 이들 담론들에 대한 공동된 비판은 이들 복지국가 전략들이 하나같이 현재와 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반노동, 반복지 논리를 주어진 소여의 것으로 받아들인 가운데 복지국가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들 복지국가 전략론들과 마찬가지로 복지 생태계의 담론 역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논리와 법칙을 자연 필연적인 것으로 가정한 위에서 논리를 전개하는 한, 복지 생태계를 통한 복지국가화의 전략은 그 실현 가능성이 요원하다는 것이 필자의 최종적인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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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ggpaper dreaming marionette 2014.12.31 19:43

<서강대학교 대학원 학술단체협의회 학술대회>, 민주정치연구회

세계금융질서의 정당성 위기와 경로의존적 변화

 

정재환 _ 민주정치연구회,

Ph. D in Politics and International Studies, University of Cambridge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 중심지인 미국에서 발생된 위기라는 점에서 그 이전의 동아시아 금융위기와는 사뭇 다른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하지만 2007년 금융위기 이후 아직까지 뚜렷한 국제금융질서의 변화 양상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 글은 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2007년 금융위기 이후 국제금융질서가 경로형성적(path-shaping)보다는 경로의존적(path-dependent)의 성격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구성주의 정치경제학이라는 관점에서 국제금융질서의 변화를 가로막는 원인을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무엇보다 국제금융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려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부재가 국제금융질서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가 기존의 시장친화적 금융규제(market-friendly financial regulations)의 정당성을 상당부분 훼손시키는 하였으나 여전히 금융시장의 규제방식은 금융위기 이전에 존재했던 금융시장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둘째, 더 나아가 국제금융질서를 관리․감독하는 국제제도 또는 기구의 연속성이 관념적 경로의존성(ideational path-dependency)을 강화함으로써 금융시장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의 창출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 국제금융질서를 새롭게 만들어가려는 노력은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지배적 해석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 해석에 따르면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는 국제금융시장의 내재적인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이 국제금융시장의 정상적인 작동을 방해했기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기초해서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은 동아시아 자본주의를 Anglo-American 모델로 전환시키는 데 초점을 두었고, 국제금융질서에 대한 개혁 역시 국제금융시장의 행위자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제도적 기초를 만들기 위해 각국의,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제체제를 Anglo-American 모델로 전환시키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Financial Stability Forum(FSF)을 중심으로 International Standards of Best Practices를 형성하고 각국에 이 기준을 부과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Wade(2007)가 이야기한 것처럼 ‘standards-surveillance-compliance’ 체제를 만들려고 한 노력이었다. FSF를 중심으로 금융시장의 규제와 행위에 대한 international standards를 Anglo-American 모델에 기초하려 만들고 IMF 등의 국제금융기구들이 standards의 준수여부를 감독하여 금융시장의 민간행위자들이 standards의 준수여부에 따라 금융적 처벌과 이득을 제공해서 각국이 하나의 국제규범에 따르도록 한다는 계획이었다.

 

2007년 금융위기는 국제금융네트워크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발생된 위기였기 때문에 동아시아 외환위기 보다 더 큰 국제적 영향력을 미쳤다(Oately et al. 2013). 하지만 이 위기의 파급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위기가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국제금융질서 개혁의 기초로 삼았던 Anglo-American 모델에서 발생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2007년 금융위기는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지속되어 왔던 international standards를 형성하려는 노력에 치명적인 정당성 위기를 불러왔다(Mosley 2009). 하지만 이 정당성 위기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출현과 제도적 실험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기존 질서의 경로의존적 성격이 여전히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Helleiner 2010; Onis and Guven 2011).

 

이처럼 기존 국제금융질서의 정당성 위기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국제금융질서의 개혁 노력이 경로의존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이유로 세 가지 정도가 거론될 수 있겠다. 첫째, 물리적 측면에서 1930년대의 금융위기에 비교하여 최초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가 심각하게 위축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는 무엇보다 그간에 발전해온 국제제도가 세계경제의 유지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Drezner 2014).

 

둘째, 관념적 측면에서 충분한 정보만 제대로 제공된다면 금융시장의 행위자들이 가장 최적의 경제적 선택을 할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Best 2010). 이는 기본적으로 금융시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금융시장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은 금융시장 행위자는 risk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며 이 risk는 충분한 정보가 제공된다면 계산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시장 행위자들이 risk가 아닌 uncertainty에 노출되어 있다면, 이는 충분한 정보가 있다고 하더라도 계산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따라서 금융시장 행위자는 항상 위기를 야기할 수 있는 과도한 낙관주의나 혹은 panic에 빠지게 된다(Nelson and Katzenstein 2014). 따라서 우리가 금융시장이 risk와 uncertainty 두 가지 모두가 상존하는 세계라고 가정한다면 금융시장 행위자들이 합리적 행위를 위한 제도적 환경을 조성한다는 international standards를 주도했던 transparency advocates의 관념적 기초는 제고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현재 국제금융시장의 개혁의 주도적인 아이디어는 금융시장의 행위자는 risk에만 노출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Mugge and Perry(2014)에 따르면 이러한 아이디어를 equilibrium finance라고 부를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조직적 측면에서 uncertainty가 아닌 risk에만 주목하는 equilibrium finance 아이디어가 지속되는 이유로 국제금융질서의 개혁의 주도하는 기구의 경로의존성을 생각할 수 있다. 국제금융질서 이후 G-7을 G-20로 확장하는 등의 중국을 필두로 개발도상국들이 더 많은 발언권을 낼 수 있도록 하는 Global Governance 변화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실질적인 내용의 변화와 연관되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Mugge and Perry 2014). 이는 국제금융질서 개혁을 실질적으로 관리․감독하는 조직의 경우에는 FSF에서 FSB로 확장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 없이 계속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organizational path-dependency가 ideational path-dependency를 강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당성 위기는 제도변화의 시작일 수 있으나, 정당성 위기가 제도변화를 반드시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2007년 금융위기 이후 현존하는 국제금융질서의 정당성이 크게 훼손되었지만, 국제금융질서의 변화는 경로형성적 성격보다 경로의존적 성격에 크게 지배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uncertainty가 아닌 risk에만 초점을 두는 equilibrium finance라고 부를 수 있는 금융시장에 대한 지배적인 아이디어가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ideational path-dependency는 기존의 국제금융질서의 개혁을 주도했던 제도와 기구가 2007년 위기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organizational path-dependency에 의해서 강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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