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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120호] 교직원은 甲인가? 교직원은 甲인가? 박승일 기자 교직원(校職員)들의 불친절한 대응, 고압적인 태도, 학생 무시, 업무 태만, 무사 안일주의, 행정 편의주의 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넘쳐난다. 서강사랑방에서 키워드로 ‘교직원’을 검색해보면, 교직원의 불친절한 태도를 문제 삼는 글을 여럿 확인 할 수 있다. 몇 년 전에 올라온 글의 내용이 최근의 글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볼 때, 단지 몇몇 사건만으로 국한될 문제는 아닌 듯하다. 잠깐 제목이라도 살펴보자. “교직원분 일을 왜 그렇게 처리합니까?”, “학교교직원 정말 배째라인듯”, “학교직원들 왜이리 불친절하나요?”, “학생 역시 교직원을 평가할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등등. 부서명이 명시된 글은 제외했음을 감안한다면 적은 수의 글이 아니다. 게시된 글의 내용을 살펴보니, 학생.. 더보기
[118호] 2명이 만드는 신문 박승일 기자 대학원 신문 제작과정을 보자. 우선 아이디어를 내고 기획회의를 연 후 기획의도에 맞게 필자를 섭외한다. 원고료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지면도 아니기에 필자 섭외는 항상 두세 번씩 미끄러지기 일쑤다. 거절의 겸연쩍음도 잠시, 다시 필자를 찾아 나서길 수차례 하다 보니 이제는 전보다 청탁 성공률도 제법 높아졌다. 필자들에게 기획서를 보내고 마감 일자에 맞게 보내주길 당부한 후 남은 지면을 채울 또 다른 작업을 시작한다. 멀게는 대구까지 찾아가서 몇 시간이고 인터뷰를 한 후, 녹취를 풀고 입말을 글말로 정리하다보면 이미 마감이 코앞이다. 중요한 보도 기사가 있을 경우, 관련 인사를 찾아가서 취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해관계가 첨예할 때는 각각의 입장을 균형 있게 배분하는.. 더보기
[114호] 이런 '특별함'인가? 박승일 기자 ‘특별한 서강’을 만들겠다던 목표는 어느새 그 내부에서부터 침몰하기 시작했다. 대외적 지표에 일회일비하지 않고 오로지 서강대만의 고유한 색깔을 만들겠다던 다짐은 뒤쳐진 자의 변명으로 폄하되더니 급기야 집에서 새는 바가지부터 잘 관리하라는 비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경영대학원 교수의 비리 의혹은 학교 측의 이해할 수 없는 대응으로 인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해교(害校) 혐의로 징계 처리한다는 웃지 못 할 대응은 과연 진리의 전당이라는 대학이 이토록 무식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마저 낳게 한다. 교수회의에 참석한 한 교수는 “학교가 내부의 잘못을 시정하려고 문제를 제기한 교수들을 처벌한다면 보복 조처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학교의 명예를 더 실추시키는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권위주의적 .. 더보기
[112호] 자본의 흐름, 사유의 정지 곽성우 기자 신체적 허기는 정신적 빈곤을 초래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기야 하겠지만 배고픈 체 소크라테스가 되는 일이 말처럼 쉽진 않다.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이조차 허락되지 않은 이에게 마냥 소크라테스가 되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을 넘어선 폭력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 기반은 단지 먹고 사는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유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현실은 다분히 편향적이다. 경제적 양극화가 그 어느 때보다 가열 차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소크라테스 되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유가 곧 사치인 절박한 삶들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는 삶이란 사유의 빈.. 더보기
[110호] 공부하는 사람 박승일 기자 공부하는 사람은 다를 줄 알았다. 착각이다. 대학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딜 가나 존재하는 꼰대들이 그들의 꼰대 근성을 교묘하게 가린 채 학자연하며 여기저기서 훈수를 둔다. 추레한 욕망이 드러나지 않게 주위를 살피면서, 고도의 정치적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마치 모든 것에서 초탈한 마냥 뒷짐을 지고 헛기침을 하면서. 그리고‘선생’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합리화한다. 교내 민주화를 위해 뭐라도 할라치면 핏대를 세워가며 교권에 대한 위협이라고 분기탱천한다. 해가 바뀌어도 달라진 것 없는 강의와 정확히 딱 그만큼의 깊이는 현실의 복잡함은 외면한 채 항상‘기본’이라는 말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그들의‘제자’인 우리는 잠자코 침묵해야 한다. 잘 참는 자만이 애제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제자는 선생이 가르.. 더보기
[109호]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박승일 기자 죽음을 말하는 건 항시 조심스럽다. 죽은 이에 대한 예의 때문이 아니라 남은 자에게 지속되는 기억의 고통 때문이다. 그 치유할 수 없는 상흔은 ‘무의지적 기억’ 속에 고이 잠들어 있다가 불현 듯 기억 속으로 소환되어 ‘네’가 죽었음을 지금-여기에서 확인 시킨다. 그 앞에서 남은 자는 말없이 흐느낄 수밖에 없다. 죽음이 슬픈 건, 그 죽음이 바로 ‘너’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너’의 죽음이기에, 정지용 시인의 마냥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림”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를 공백으로 만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 속 허무이다. 헌데 모든 죽음이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죽음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기억되는 반면, 어떤 죽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 더보기
[108호] 누구를 위한 서강 50주년인가 박승일 기자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반짝이는 네온사인 간판에 눈이 현란하다. 개교 50주년을 알리는 간판이 길 가는 사람들을 호객하는 잡상인의 몸짓마냥 요란하고 분주하다. 그 요란한 자기과시는 자본의 첨단인 명동거리를 장식하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불편한 것은 그 형용색색의 형광색이 갖는 촌스러움 보다 5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욕망의 현상학이다. 그 간판은 그저 정문 앞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앞을 지나는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때문에 공간학적 위상을 갖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강에 대한 광고이기에 독점적 위치를 점할 수 있으며, 결코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우리의 눈을 침범해 들어온다. 그리고는 결코 하나로 수렴될 수 없는 서강인들을 학교의 영광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