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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08호] 반수사학 시대와 소통의 진실



우찬제 (국어국문학과 교수)


말의‘홍수’와 소통의 위험

『홍수』에서 르 클레지오는 안개와 폐허의 장벽 뒤에서“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낙원”을 응시한다.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미묘하고도 아련한 희열을 주던장소였다. 그런데 인간은 결정적이고 급속하게 그 낙원을 상실했다. 실낙원의 증후는 다채롭지만, 그 중“소리들은 소란으로 변”했다는 대목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말[言語]들은 그 광란의 무용을 다시 시작했다. 말들은 서로 얽히고 덧붙여지고, 분할되고 하는 것이다.”말의 광란은 매우 심각한 지경이다. 말은 인간의 정신을 넘어서고, 정신은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 소란한 소리로부터 인간의 소외 양상은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말들은“계속 이어지고 거대해지는데, 정신은 그만 십분의 일초가 부족하여 정신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이윽고 그 말은 수많은 불균형이 폭발한 후에 무(無)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 광란(狂亂)과 밤과, 소리가 울려퍼지는 야수 같은 선풍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하여“한층 더 은밀하고 더 굉장한 말들”은 존재의 리듬을 파열하기에 이른다.“행복과 고통의 전언”도 균열을 벗어나지 못한다. 소리의 소란과 언어학대로 인해 르 클레지오의 주인공은 마침내 실어증에 걸린다. 현대 문명과 인간 삶에 대한 비판과 부정 의지가 남달랐던 작가다운 성찰이다.

소리가 존재의 숨결 혹은 존재의 리듬에서 일탈한 채 소란한 광란으로 치닫는 상황에 대한 절망과 비판이 비단 르 클레지오만의 몫일 수는 없다. 한국의 젊은 작가 한유주 또한 말의 대홍수 시대에 절망한 경우다. 그녀가 보기에 우리는 지금 말의 대홍수 시대를 살고있다. 소란스러운 말, 거친 말, 폭력적인 말,“어떠한 반성도 회의도 추억도 갖지 못”(「그리고 음악」)한 말들이 횡행하는 부정적인 수사학의 시대를, 한유주는 야만적인 삶이고 문화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 반성적 영혼의 숨결이 거세되었기에, 존재든 말이든 그 고유의 자리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한유주는 생각한다.“경험은 초라했고, 그래서 가진 것이 없었다.”(「지옥은 어디일까」). 세상에“슬프고 광포한 일들”은 무수히 일어나지만,“슬픈 일들은 어떤 사람들의 기억하지 못하는 꿈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꿈들을 환영처럼 드리우고 세계의 뒷면으로 숨어들어”(「달로」)가는 형국을 지긋하게 응시한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범어 어원에서 숨결을 뜻하는 리듬, 그 생명의 원천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다. 리듬이 거세된 현실에 대한 도저한 인식이 한유주로 하여금 종종‘음악’의 세계로 이끌리게 한다.「그리고 음악」,「암송」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소리의 소란이나 그 때문에 형성된 증오는, 진정한 인간적 리듬을 함축하는 음악에의 동경을 통해서만 겨우 넘어 설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소통을 위한 리믹스

『펭귄뉴스』,『악기들의 도서관』의 김중혁 또한 소통을위한 예민한 귀를 지닌 작가다. 그의「자동피아노」는“어째서 소리가 모이면 음악이 되는 것일까, 소리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일까 아니면 창조하는 것일까, 왜 어떤 것은 소리이고 어떤 것은 음악일까.”라는 문제를 고민하는 두 피아니스트의 대화를 주조로 하는 소설이다. 비토는“음악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음을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몸으로 육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음, 소리가 선재한다. 피아니스트가 음을 만들어내서도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다만 투명한 마음으로“자신의 몸을 통째로 예술에게 빌려줘야 한다고”비토는 강조한다. 실제로 비토는 개별의 소리들이 제값을 잃지 않으면서도 음악으로 통합되고, 그 음악이 속한 음악 장(場)에 허심탄회하게 조화를 이루며, 그런가 하면 다시 독립적인 소리로 생명을 지닌 채 세계로 되돌아가는, 그런 리듬의 세계에 자신의 몸을 빌려주고자 한 예술가로 이야기된다. 가령 비토가 연주하는 소리를 전화기를 통해 주인공이 듣는 장면에서는, 독립적인 소리/음이 음악으로 수렴되고 음악을 통해 다시 소리/음들이 확산되는, 수렴과 확산의 원환적 반복과 순환을 통해서 소리와 존재의 숨결을 탐문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눌 수 있다. 이때 개별 소리와 전체로서의 음악은‘따로-함께’공존한다. 나누어지는 듯 어우러지며 공존한다. 연주자와 음악, 수용자의 관계도 그와 흡사하게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근대 이후 인간과 예술을 괴롭히며 숨결의 리듬을 방해하던, 주체와 객체의 험악한 분열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까 연주가 이루어지는 현재시간의 연주 행위는 독주일 수 없다. 소리/음, 음악, 연주자, 수용자가 서로 스미고 짜이며 진정한 소통을 위한 생명의 리듬을 합주한다. 작가 김중혁이 꿈꾸는 음악적 황홀경은 이런 리듬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어떤 경지다.

이런 맥락에서 김중혁의「엇박자 D」의 세계 역시 흥미롭다. 음치에 가까워 박자를 제대로 맞출 수 없었던 ‘엇박자 D’는 학창 시절 합창 공연을 망쳐놓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무성영화 전문가로 성장한 그는 공연 기획자인‘나’와 함께 무성영화와 음악을 리믹스한 공연을 한다. 공연의 끝에 그는 회심의 리믹스 작품을 관객들에게, 특히 학창 시절 합창을 같이 했던 옛 친구들에게,선사한다.“22명의 음치들이 부르는 20년 전 바로 그 노래”라고‘엇박자 D’가 말하고 있거니와, 한 사람의 소리가 둘, 셋, 넷, 다섯 사람의 소리로 바뀌면서 합창이 되는데, 합창이라고 하기에는 서로 음도 박자도 맞지 않지만 잘못 부르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 그런 노래였다. ‘나’는 그 노래가 매우 아름답고 절묘하게 어우러졌다고 느낀다.“아마도 엇박자 D의 리믹스 덕분일 것이다. 22명의 노랫소리를 절묘하게 배치했다. 목소리가 겹치지만 절대 서로의 소리를 해치지 않았다. 노래를 망치지 않았다.”각각의 소리가 어느 한 곳으로 귀속되거나 구속되지 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소리를 해쳐 어설픈 혼돈의 도가니를 만들지도 않은 절묘한 상태가 아닐 수 없다. 각각의 소리가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가 되어 서로 호응하는 상호주관성의 지평에서 상호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전체의 생명을 얻는 장관이다. 합창이면서 독창이고, 독창이면서 합창인, 이 세계는 불가능한 듯 보이는 개인과 집단의 조화 가능성을 예술적으로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조화의 리듬을 통해 생명력 있는 리듬의 형성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 같은 인류의 오래된 과제는 새삼 환기된다. 특히 합창/집단의 세계에서‘엇박자 D’는 타자화된 소수자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던 현실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작가가 탐문한 바‘엇박자 D’에 의한 절묘한 리듬의 세계는 매우 웅숭깊은 것이 아닐 수 없겠다.


리듬과 숨결의 소통을 위하여

소란스런 소리로부터 진정한 숨결을 지닌 리듬, 그 역동적이고 발견적인 가치를 모색할 수 있는 음악의 세계로 향한다는 것은, 넓게 보아 문학적 정의의 추구에 동참하는 것이나 한 가지다. 여기서 음악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을, 혹은 리듬을 추구한다는 것을, 단지 좁은 의미에서의 음악적 리듬의 구성, 그러니까 선율과 화성의 요소에 국한해서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음악에서의 리듬도“음 길이와 그 강세만을 가지고 결정하기 어려운 복잡성” (서우석,『시와 리듬』)을 지니고 있거니와, 문학에서도“단지 언어의 객관적 사실들 속에서 작업하기 위해서, 즉 측정되고 객체화된 선조적 시간 속에 잔류하면서 창조적시간화의 행위를 무시할 때 리듬의 본질을 놓치고”(김성도,『기호, 리듬, 우주』)말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리듬은 변화무상하고 역동적인 불안정성 속에서 존재의 숨결과 기미들을 길어 올린다. 리듬은“흐름이자 동시에 과정”(김성도)이다. 현재 속에서 주체가 대상과의 구체적인 교섭과 대화 과정을 통해 역동적 의미를 창조적으로 생산해내는 게 리듬, 곧 존재의 숨결이다.

요즘 학문장에서 융합이나 통섭의 담론이 흔히 강조된다. 예의 담론이 지향하는바 역시 진정한 소통을 통해 존재의 리듬 내지 존재의 숨결을 회복하려는 방향에 맞추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 리듬이 훼절된 존재 상태는 위험하다.위험 상태는 진정한 소통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 소통을 촉진한다. 그러면 존재의 리듬은 더욱더 헝클어지고 악화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진실의 소통이 필요하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탐문하는 것이 바로 진실의 자리다. 그런데 그것이 파편적 진실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융합되고 통섭된 진실이라야 온전한 소통의 지평을 낳을 수 있고, 존재의 리듬, 존재의 숨결을 회복하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