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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08호] 인간의 조건과 소통


원용진(신방과 교수)

인간의 조건과 소통

해녀의 잠수는 보물 캐기다. 숨 가쁜 잠수를 하지만 해녀는 바다 밑바닥 모든 것을 샅샅히 건져 올리진 않는다.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도움될 만큼만 건져 올릴 뿐이다.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방식도 이 같지 않을까. 인간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그를 자신의 삶과 연결시킨다. 과거의 삶에 담긴 보물을 캐 현재로 가져온다. 그리고 미래를 새롭게 연다. 해녀의 잠수 작업처럼 보물을 캐어 새로운 미래를 여는 인간 능력을 아우구스티누스는탄생성(natality)이라며 노래했다.

바다 속 보물을 캐는 행위는 해녀 자신 만을 위한 것은아니다. 자신의 생활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과도 연관됨을 해녀는 알고 있다. 그의 잠수는 결코 개별적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물 밖의 세상과 절연하거나 선행하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성 속 삶, 세계-내-존재가 곧 해녀의 삶이다. 바다, 보물, 바다 바깥의 타인을 인식 대상으로 삼기도 이전에 이미 해녀는 그 세계 안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복수성을 내포하는 존재다.

해녀의 잠수 뒤에는 인간의 탄생성, 복수성이라는 존재 조건이 어른거리고 있다. 해녀의 잠수 뿐 만이랴. 인간의 어떤 행위도 그 존재조건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 그런데 그 존재조건이며 인간의 능력이기도 한 탄생성과 복수성이 전에 없던 새로운 조건을 맞이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보물을가져오며, 남과 더불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인간 능력이 점차 위험한 조건 속에 처해 가고 있다. 더 가쁜 숨을 몰아쉬고 더 많은 물질을 해하는 해녀의 운명처럼 말이다.


탄생성과 복수성이란 인간 조건, 인간 능력에 대한 논의가 체계화되고, 그를 도모키 위한 노력의 경주가 요청된 이래로 그들은 오히려 더욱 질곡에 빠져들었다. 복수성을 숨막히게 하는 치열한 개인주의와 탄생성을 움쩍달싹도 못하게 만드는 이기적 공동체 주의 탓이다. 그리고개인주의와 이기적 공동체주의의 조합을 통해 사회는 경제 지상주의로 치닫고 있다. 그 조합 앞에서 모든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은 몸을 숙이고 있다. 화폐가 인간을말하고, 화폐가 인간을 평가하는 정치실종, 사회실종의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해서 탄생성, 복수성을 부정하는 구심력을 거슬러가며 탄생성, 복수성을 되살리자는 원심력적 호소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었다.

원심력적 호소가 너무 적은 탓이었던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원심력적 호소는 구심력을 이겨내지 못한 채 간간히 귓등을 스쳤을 뿐이다. 구심력에 탄력을 붙이는 국가적 관성 탓이다. 애초 사적 개별 존재인 인간에 이기적 경제지상주의가 덧 씌여질 즈음 개별 존재는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이 가진 탄생성과 복수성이 아직 완전히 고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적 관성은 개별적 존재의 방황을 이기적 경제 지상주의 공동체 형성을 통해 끝장내려 했다. 개별적인 채로 유적(類的)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인간의 갈등적 존재론을 현대 국가들은 이기적 경제지상주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봉합하려 했다. 개인의 자기 소외까지 극복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창조해 총체적 유적 존재로 인간을 이끌면서 헤겔의 상상력 까지 넘어서는 경제 지상주의 총체성에 도달한 셈이다.


탄생성과 복수성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은경제 지상주의 총체성에 다시 도전장을 내민다. 총체성이 다 뒤덮지 못한 틈으로부터 그 도전장의 얼굴들이 삐져나온다. 혹은 그 틈들에 도전장을 밀어 끼워 본다. 총체성과 그가 다 뒤덮지 못한 틈새를 대결시켜 보려 한다. 탄생성과 복수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도전장을 던지고, 관계의 끈을 잇고 변화를 모색한다. 어설프게 이뤄진 개별적 존재와 유적 존재 간 봉합에 균열을 꾀하려 한다. 그래서 더 많은 이질적인 틈새를 발굴하고, 그에 해석을 부여하고, 새롭게 틈새를 만들려 한다.

봉합된 듯한 총체성에 눌려 숨죽여 온 틈새 찾기, 찾아낸 틈새와 허세부리는 총체성의 관계 맺기, 틈새 간의 관계 맺기 작업을 두고 소통이라 이름 붙인다. 모험적 관계맺기, 이질적인 것과 줄 대기, 그를 통한 새로운 모색을 포괄하는 개념이라 한다. 그러므로 소통은 때론 평화적이지만 가끔씩은 전투적이기까지 하다. 바다 속을 긁어내는 거대 해녀에 맞서 그러지 말기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숨가쁘게 그를 거부하며 개별 존재를 조직해 만든 해녀 공동체의 항의 이 모든 것들이 그에 속한다.

해녀가 바다와 만나길 거부했다면 애초 해녀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질적인 것 간의 만남을 통해 해녀는 새로운 영양가를 찾아냈고, 그를 타인에게 전할 수도 있었다. 소통은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탄생성과 복수성을 더 단단하게 한다. 이질적인 것 간의 만남으로 인한 당혹함이나 낯설음을 풀기 위해 과거를 캐고, 타인을 고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통은 탄생성과 복수성이라는 인간 조건을 흐르게 해주는 엔진일 수밖에 없다.

탄생성과 복수성을 눌러 숨막히게 한 국가 그 엔진인 소통을 그대로 둘 리가 없다. 소통에 끼어들기 국가 프로젝트가 펼쳐진다. 정교하게 혹은 폭압적으로 이뤄지는 국가적 프로젝트 탓에 소통도 비틀거리게 된다. 같은 기표를 활용하되 다른 기의를 갖도록 강제하는 국가적 프로젝트가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같은 생각을 갖도록 하는 홍보, 전달의 의미로 소통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습속을 만들어 낸다. 습속 만들기 국가 프로젝트 탓에 이질적인 것은 제거의 대상이 된다. 탄생성은 잊어야 할 유산으로 읽어낸다. 복수성은 거추장스러운 이념으로 처리되고 말 뿐이다.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더더욱 죽이는 전체주의적 경제 지상주의 사회로 가는 경향이 짙어지고있다.
 

거대 해녀가 바다를 헤집으며 개별 해녀를 숨막히게하고, 자원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숨막힌 해녀와 고갈되는 자원을 대하며 푼 돈을 협상하고 어쩔 수 없었다며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소통했다고 자부한다. 바다와 해녀 그리고 미래 뿐 만 아니라 소통조차도 질곡의 과정에 접어든 셈이다. 그래서 오늘은 어둡고 내일은 더더욱 암흑이다.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설 수 있는 기반조차도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소통은 더 절실하고, 소통을 질곡에서 꺼낼 의지는 더더욱 요청된다. 그것만이 희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소통을 질곡에서 구해내 탄생성, 복수성을 회복하기위한 희망 프로젝트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봉합된 것처럼 보이는 총체성에서 틈새 찾기가 첫 번째일 듯하다.총체성에 포섭되지 않았던 삶, 포섭 바깥에서 벌이는 삶 그런 틈새 찾기가 소통을 구하는 첩경이다. 그런 삶은 창조해내는 일 또한 소통의 전제다. 좀 더 열린 존재되기,포용적 유적 존재되기를 위한 본보기들을 찾고 구성해내야 한다. 다시 바다 속을 뒤지듯 과거로부터 보물을 캐는 생성적 연구 작업도 그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분자적 운동은 어떨까. 자신의 정체성에 집중하여 그 고집을 놓지 않으려는 집착증이 아닌 다른 것에 모험적으로 접근해보고 즐겨보는 분열증적 분자 운동도 소통을 회복하기 위한 전제다. 그러기 위해선 견고하던 울타리를 허물어야 한다. 모든 자율적인 존재들의 연합이 그런 분열증적 분자운동이 가져올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디에 있더라도, 그 장소에서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이접(離接)의 화신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코스모폴리탄 되기라고 말해버리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중심을 찾고, 그에 기대는 집착하는 것은 버릴 일이다.중심을 뺀 (n-1) 운동이야말로 진정한 운동일지 모른다. 중심을 자처했던 모든 것들은 탄생성과 복수성 그리고 소통을 배신했다. 중심은 틈새를 남기지 않을 총체성을 향해 달려야 하는 존재론적 운명이기 때문이다. 반동적 총체성을 부수기 위해 찾은 저항적 총체성은 필연적으로 저항마저도 배신하게 됨을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지켜보아온 터이다.


해녀가 사라지고 있음은 탄생성, 복수성 그리고 그의 엔진인 소통이 질곡에 처하고 있음의 알레고리다. 하지만 아직 물질을 하는 해녀가 남아 있음을 희망의 메시지다. 국가적 봉합 프로젝트가 아직은 허술함을 보이고, 그에 도전장을 내밀 순간이 있다는 징후다. 인간이 살아가야 할 만큼의 긴 시간 동안 바다도 살아야 하고, 그 안의 보물도 살아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알레고리에,메시지에, 징후에 눈길을 주어야 함은 당연함을 넘어서 의무적인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