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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08호] 소통(疏通)과 한국의 학술 문화


 

 


 

 





 

 













 

김경만(사회학과 교수)


학문에서의 소통이란 무엇이며 또 기능은 무엇인가? 대학원 신문사에서 소통에 관한 글을 부탁받았을 때 주저 없이 응낙한 이유는 내가 이 질문에 대해서 오랫동안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소통이란 그 사전적 의미가“막히지 않고 잘 통함”인데, 학문에서 막히지 않고 잘 통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보통 우리는 어떤사람이 꽉 막힌 사람이라고 할 때 이 사람과“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 철학과 사회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였으며, 지금도 그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합리성 개념과도 소통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즉, 어떤 사람이 합리적(rational 혹은 resonable)인 사람인가라고 물어볼 때 우리는 소통이 되는 사람, 즉대화가 되는 사람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아들과 아버지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해보자. 아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아버지는 두 가지의 반응을보일 수 있다. 첫째는 아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태도를 취하든, 그런 답에 대한 근거를댐으로서 자신의 답을 정당화하는 아버지들이 있고, 둘째는 아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답할 가치가 없다고 하며 무시하는 아버지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첫째 타입의아버지가 합리적이고 소통이 잘되는 아버지일 것이다.좀 더 현학적으로 표현하면 첫 번째 타입의 아버지는 계몽주의를 대변하는 비판적 합리성을 가진 아버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대화”를 통해서, 혹은 더 나가서“논쟁”을 통해서 무엇이 합리적이고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찾아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합의에 이르는 것이“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판과 평가, 그리고 논쟁의 부재

짧은 글에서 더 복잡하고 현학적인 얘기를 하는 것보다 곧바로 이런 소통적 합리성이 국내의 사회과학, 인문과학계에 존재하는가를 얘기해보자. 학문에서 소통의 정도는 위에서 언급한 소통적 합리성이 학문에 참여하는 사람들, 즉“사회과학자들”사이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소통이누구와 누구사이에서 이루어지는가이다. 서구의 사회과학과 우리 사회과학만을 놓고 비교해 봤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과학자들, 즉 전문가(professional)들 간의소통이 서구에 비해서 매우 떨어지는 반면, 대중과의 소통은 매우 활발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점은 금방 이해될 수 있다. 서구에 비해서 우리나라에서는텔레비전과 대중 매체, 예를 들면 신문, 혹은 일반 잡지-신동아 등-에 글을 기고하는 사회과학자들을 너무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사회과학의 사명, 사회적 책임, 혹은 지식인의 사회적 기여라는 이름 아래 대중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때로는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강연하지만, 이런 형태의 소통은 위에서 언급한 합리적소통-즉, 대화 당사자 간의 소통-이라 할 수 없다. 왜냐면 이런 방식의 소통은 사회과학자가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대중에게 전해주는 것이기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소통은 대중이 사회과학자들의 일방적 지식전달에 대해서 반대나 이견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는 의미에서“쌍방적이며 합리적 소통”이라 할 수 없다.

이에 더해서 한국 사회과학이 안고 있는 소통의 문제는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은 정작 자신들이 속한 사회과학 장“내”에서의 소통은 등한시 한다는 데서 찾아 볼 수있다. 사회과학 장내에서의 소통이 원활한가를 측정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지표는 물론 학술지 안에서의 소통이다. 학술지에 내는 소위 학술적 가치가 있는 글들은 사회과학 장내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끼리 만의“소통의 장”(communicative field)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논문들을 학술지에기고만 할 뿐 이들 글들에 대한 상호 비판과 감시, 그리고 그에 따른 논쟁이 국내 사회과학계에는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국내 학술지에 서로에 대한 비판과 논쟁적 글이 실리지 않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로도 확인되지만, 여러 가지의 다른 방법으로도 입증될 수 있다.


관료주의화된 등재제도

우선 학술진흥재단의 등재지, 등재 후보지를 선정하는 제도를 보면, 과연 우리나라에 사회과학의 장 (field)-즉 전문가들만이 상호 작용하는 공간-이 존재하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왜 학술진흥재단에서 등재지 제도를 만들었을까? 나는 사회과학자들, 인문과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의아해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민주화를 부르짖는 민교협도, 또 개별 학회도 이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등재지 제도가 만들어졌는가? 서구의 학술지가 어떻게 운영되는가를 살펴보면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예를 들어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나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등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술지들이 SSCI(Social Science Citation Index)에 등재됐기 때문에 유명한가라는 질문은 정말 우스운 질문이다. 이들 학술지들은 Thomson사에서 SSCI를 만들기 오래 전에 이미 학자들 사이의 소통과 경쟁을 통해서 그 집단에서 가장 뛰어나고 창의력 있는 글이라고 평가 받은 글들만을 게재함으로써 그 권위와 명성을 쌓아온 학술지들이다. 즉, 서로의 연구에 대한 치밀한 비판과 논쟁을 통한 소통을 통해서 어느 학술지가 권위 있는 학술지인가가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술진흥재단에서 등재지를 선정하는 심사에 참여해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저명 학술지로 선정되는 것은 심사를 몇 명이 하느냐, 얼마나자주 출간되느냐, 게재 거부율이 얼마나 되느냐, 학술지를 발행하는 학회의 회원 수가 얼마나 되느냐 등의 소통의 본질적 의미와는 하등 관계없는 피상적 항목에 매겨지는 점수로 환산되는 지표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몇 년 전에 한국의 유수한 학회에서 초청받아서 강연했더니 자기 학회에 가입하라는 신청서를 주면서 꼭 가입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학회 회원수를 늘려야 자신들의 학회지가 등재지가 되는데 도움이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관료주의적 발상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겠지만, 그 책임이 바로한국의 사회과학, 인문과학자 자신들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거의모든 학회지가 등재지가“되어가고”있고, 현재 아닌 것들도 등재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제 그 원래의취지와는 반대로 등재지 제도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왜냐면 모든 학술지가 등재지가 되어가고, 따라서 어느 학술지가 권위 있는 학술지인가를 구분해내려는 애초의 취지는 무색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인문, 사회과학을 막론하고 국내에서는 전문가들끼리 소통-지적 산물에 대한 상호 비판과 논쟁, 평가-이 부재한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질적 저하를 불러오는 가장 큰 원인임에 틀림없다.


표절과 중복게재, 소통의 부재가 야기한
한국 사회과학의 질적 현실

사회과학자 상호 간의 소통의 부재를 여지없이 나타내는 또 하나의 슬픈 얘기를 덧붙이면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우리나라처럼 사회과학자들이 정치권에 흡수되어서 정치가로 변신하는 나라도 흔치 않다. 내가 얘기하려는 것은 사회과학자들이 정치하지 말아야한다 뭐그런 식상한 얘기가 아니라 소위 훌륭한 사회과학자라고 해서 학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고, 대중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정치권에 발탁되어서 소위“인사청문회”에 회부됐을 때 거의 예외 없이 제기되는 표절, 중복게재 의혹이다. 연일 텔레비전 토론회와 신문, 잡지 등에 등장해서 사회, 문화, 정치, 경제에 대해서 마치 깊은 지식을 가진 것 같이 떠드는 사람들이 대부분 정치권에 발탁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거의 모두가 표절과 중복게재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정말 개탄해야 할 것은 이들이 표절하고, 중복 게재를 했음에도 이를 알아 채지조차 못한, 혹은-만일 사실이라면 더 슬픈-알았더라도 감히 폭로하지 못해온, 학자들 간의 소통이 부재하는 한국 사회과학의 현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