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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12호] 소설가 해이수를 만나다

낯선 공간에 던져질 때, 우리가 이 ‘낯’-선 공간에서 마주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얼굴’이다.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이 생경한 경험은 그 동안 익숙했던 자신의 모습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호주의 사막에서 에베레스트까지, 낯선 공간을 여행하는 인물들에게서 새로운 자아 구축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소설가 해이수를 만나보았다. <인터뷰 및 편집/편집부>



21세기의 객자(客子)는
사막 위에서 춤추고
에베레스트에 반한다.

"청춘의 시절은 공간이 주는 힘, 익숙하지 않지만 낯선 공간이 주는 힘을 직접 체험해 나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처음 접한 어둠 속에서 차차 사물을 인식해 나가듯, 어려움을 봉착했을 때 얻는 깨달음이야 말로 그 공간이 주는 절대적인 힘이라고 봅니다. 너무 협소한 자기 세상에 갇히지 말고 낯설지만 넓고 깊은 공간을 통해서 자아의 의식을 확립하는 계기를 많이 가졌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향해 끝없이 질문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거죠. 늙으면 자본은 있어도 체력은 없어요. 청춘은 그 반대이죠. 다양한 공간을 향해 떠나보고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 청춘이 가진 자본보다 무한한 가능성이에요."

“잔인하면서도 재밌지, 그게 인생이잖아.”

‘젤리피쉬’는 어떤 이야기를 담은 책인가요? 낯선 공간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로 서술되고 있는데요.

‘젤리피쉬’의 주인공들은 20대 중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의 젊은 화자들이에요. 그들이 네팔, 케냐, 호주와 같은 낯선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자아와 부딪히고 질문하고 성찰하는 내용을 주로 다룬 작품이지요. ‘캥거루가 있는 사막’ 때부터 왜 한국이 아닌 낯선 공간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곤 했는데, 사실 국내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도 있어요. 하지만 우선적으로 국외라는 곳, 즉 낯선 곳을 통할 때 제가 생각하는 작품의 내용과 의도를 제일 잘 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일종의 소설 속의 장치인 거죠. 물론 그 장치가 단순한 장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겠지요. 따라서 독자들이 저의 글에 등장하는 익숙하지 않은 공간과 환경을 접하면서 새로운 상상과 체험을 하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젤리 피쉬'의 주인공들이 접하는 공간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요? 단순히 낯선 공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젤리피쉬’의 낯선 공간은 단순히 처음 가본 공간이 아닌 인물들의 안전장치가 제거된 공간이에요. 인물들은 어떤 보호막도 없이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공간에 던져지는데, 저는 그들이 익숙하지 않은 생소한 곳에 던져질 때 자아가 가진 본질의 문제를 보다 치밀하게 대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치 벌거벗은 상태로 객지에 놓인 것과 같아요. 익숙한 곳을 떠나온 자신을 되돌아보고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깨달음과 지혜를 얻게 되는 거죠. 어쩌면 자아의 성찰을 위해 낯선 공간에 뛰어든다는 점에서 이들이 접하는 공간은 일종의 순례자의 공간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요. 자신의 내면을 순례하는 겁니다.

그 낯선 공간을 소설에서 형상화 할 때 이전 작품과 달라진 점이 있었습니까?

공간의 의미가 변하면서 낯선 공간에 놓인 화자와 인물들의 심리가 변화한 점을 들 수 있어요. ‘캥거루가 있는 사막’에서 중점을 두었던 공간은 자아 탐색의 공간이었거든요. 그때 저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20대 인물들을 통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졌었죠. 일상적이지 않은 공간을 통해 인물들, 크게는 인간의 내면을 살펴보고 탐색하는데 집중했던 셈이에요. 반면 ‘젤리피쉬’에서는 자아에 대한 몰두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를 찾는 과정에 방점을 두었어요. 이전 작품에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해답을 나에게서 찾으려 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그 해답을 관계에서 찾으려 했던 거죠. 나와 세상, 이렇게 이분법적인 소통이 아니라 나와 세상 사이에 관계라는 끈으로 이어진 타지의 인물들과의 소통에 집중했던 겁니다. 이는 ‘캥거루가 있는 사막’에서처럼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젤리피쉬’에서는 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트레킹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야.”

‘젤리피쉬’ 중 ‘고산병 입문'을 보면 새로운 공간을 접하는 행위로 트레킹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트레킹은 평범한 여행과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은데요.

공간을 체험하는 행위는 투어(tour), 트레벌(travel), 트레킹(trekking) 으로 나뉠 수 있어요. 투어는 명승지 혹은 유서 깊은 곳을 탐방, 관광하는 행위이고 트레벌은 그 지역의 문화와 언어를 개인이 직접 뛰어 들어 체험하고 경험하는 행위, 쉽게 말해 긴 기간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트레킹이라는 행위는 클라이밍(climbing)하고 비교할 수 있는데 클라이밍은 전문적인 등반, 고지를 향한 수직적 행위이에요. 하지만 트레킹은 고지를 둔 수직적인 행위라기보다 과정에 중심을 둔 사선적인 행위입니다. 트레킹은 도보로서 그곳의 자연환경과 문화를 인식, 이해하고 공간을 답사하는 움직임이에요. 이때 어떤 일정한 고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이 고지가 됩니다. 그래서 트레킹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공간에 대한 정복이라기보다는 그 과정을 향유하는 것이에요. 그 과정은 온몸의 오감을 열어서 자신이 품고 있는 질문에 집중하고 이해하기 위한 성찰의 시간인 것이죠. 육체적 여행이 아니라 정신적 여행이 바로 트레킹입니다.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고산병 입문’ 이나 ‘루클라 공항’에서 묘사되는 고립된 공간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그 공간들은 고립된 공간이라기보다 제한된 공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에베레스트의 산, 루클라의 공항, 룸비니의 사원, 그리고 젤리 피쉬의 집. 인물들이 접하는 이 공간들은 제한적이에요. 특히 ‘루클라 공항’은 인물들이 일정한 시간 동안 벗어날 수 없는 곳인데, 주인공은 바로 이 제한된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게 되죠. 그리고 이때 쌩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면서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는 거고요. ‘아웃 오브 룸비니’의 경우 룸비니의 공간은 세 가지로 나뉘어 있어요. 첫 번째는 낯선 룸비니를 향해 가는 과정의 공간이고 두 번째는 룸비니라는 신비하고 특정적인 공간이며, 세 번째는 룸비니를 다시 나오면서 접하는 공간이지요. 이 공간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순차적으로 바뀌어 가지만 화자는 그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자신을 성찰하게 됩니다. 이처럼 제한된 공간 속에서 인물들은 ‘나의 케냐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겪게 돼요. 두 작품속의 인물들이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는 이 제한된 공간은 깨달음의 공간이고 카이로스의 시간을 간직한 곳이지요.

방금 말씀하신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시간에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어요. 원인과 결과는 시간에 따라 순차적으로 일어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에는 그런 인과적 흐름이 아닌 어느 한순간의 번뜩임이 존재하지요. 다시 말해 카이로스의 시간이란 어떤 특정한 사건이 체험자의 뇌리에 각인되는 순간, 바로 찰나(刹那)를 뜻하는 것입니다. 작품에서는 그 시간이 여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비단 여행이 아니더라도 무언가에 끊임없는 고민해오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고민의 퍼즐들이 맞추어지는 순간을 느낄 수가 있어요. 물론 이 시간은 지속적으로 고민하며 해답을 갈구한 사람들에게 다가오지요.

“탕탕(蕩蕩)과 외외(巍巍)”

탕탕과 외외를 품고 시작된 에베레스트 등반, 하지만 ‘루클라 공항’은 “에베레스트를 올라갔다 오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데요.

실제 루클라 공항은 참 재미있는 곳이에요. 에베레스트라는 신성한 공간과 산 아래 세속 공간의 사이에 위치한 중간 기착지거든요. 소설 속에서 이 중간 기착지에 모인 인물들은 각자 목적이 달라요. 주인공은 높고 지고지순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어떤 친구는 술과 담배 등의 중독을 벗어나고자, 또 다른 친구는 기계 문명을 반성하려고 도달하지요. 그들에게 그곳은 산과 세속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특수한 공간이면서 자신의 고민이 그곳에서 만난 타인을 통해 발현되는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관계와 경험을 만들면서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지요. 그런데 그들이 산에서 내려갈 때가 되면 필연적으로 모두 자신의 예전 일상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저는 이때의 복귀를 예전과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맞이하는 과정으로 보았어요. 설령 그들이 변함없는 예전의 위치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그들은 이미 자신의 삶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발견하는 과정을 경험했기 때문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에베레스트에 오르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다는 말은 겉은 달라지진 않았지만 내면은 변화했음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주인공의 내면을 돌아보게 만드는 주변 인물의 역할을 빠트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 너는 그렇게 힘든 곳을 올라갔다 왔느냐, 이 질문은 ‘루클라 공항’에 등장하는 쌩이 주인공에게 항상 궁금해 하는 부분이에요. 하지만 쌩은 끝내 그 대답을 듣지 못하고 결국 주인공의 팔을 물어버리죠. 주인공이 이후 헤어졌던 쌩을 다시 만나려고 애를 쓰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쌩의 잇자국뿐,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해요. 그때 주인공에게 남겨진 쌩의 잇자국의 의미는 물은 자국, 물음의 흔적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쌩이 주인공에게 던진 질문, 즉 왜 쉽지 않은 여정을 택하고 왜 힘든 산에 오르는지에 대한 물음이 이젠 자아의 물음이 된 셈이지요. 쌩이 주인공에게 자신을 돌아볼 질문을 인식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 겁니다. 또한 ‘젤리피쉬’에서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인공과 여학생의 사이는 한순간 점멸했다가 영원히 암전 되어버리는 관계에요. 그 둘은 짧은 시간 동안 함께 호흡하죠. 사적인 것은 묻지 않고 자기 말만 들어야 한다는 규칙 속에서 그들의 관계가 시작돼요. 이는 어찌보면 절대 애틋할 수 없는 조건이지만, 반짝거리는 한 순간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애틋해져 있어요. 그래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죠. ‘루클라 공항’과 ‘젤리피쉬’에 나오는 주변 인물들은 이렇게 화자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지도록 해요. 주인공을 이끄는데 이 타자들의 역할은 그래서 매우 중요한 거죠.

“다시 여행을 떠나는 거야. 무엇을 해야 할지 알 때까지.”

여행을 많이 다니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낯선 공간은 어디였나요? 이곳에 이대로 머물고 싶다고 생각한 곳이 있나요?

작년 여름에 몽골을 다녀왔어요. 몽골은 몇 가지 세계적인 기록이 있는데 죄수 탈옥율 이 가장 적은 곳이래요. 탈옥을 해서 도망을 가도 말이나 차가 없는 한 한 시간 정도를 도망가도 다 보이기 때문이지요. 깨끗하고 광활하죠. 제가 거기서 자고 일어난 첫날 아침에 본 것이 양을 치는 목동이었는데, 그 순간 소설가가 된 것이 후회되면서 양치기가 되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연과 함께 하는 아름다움을 몸소 받아들이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몽골에서 양치기나 해야겠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그 지인이 해준 말이 소설가가 결국에 양치기라는 것이었어요. 거짓말쟁이 양치기 말이에요. 대한민국의 훌륭한 양치기가 되어달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어쨌든, 몽골은 비우는 곳이었어요. 사진기도 수첩도 모두 두고 몸과 마음만 가지고 가는 곳이었어요. 그곳에 도착하면 알게 돼요. 비우는 곳이라는 걸. 비우러 가는 곳에선 찍고 적고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가장 낯선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너무도 있고 싶었던 곳이었지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여행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캥거루가 있는 사막’, ‘젤리피쉬’ 모두 여행의 목적을 알려주지 않아요.

여행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쌩의 잇자국처럼 끝없는 물음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여행이라는 행위는 정복이 아니라 이해와 인식의 과정이니까요. 그 과정을 통해 얻게 된 답들은 사람들마다 모두 다를 수밖에 없고요. 작품 속에서 주인공들은 낯선 나라를 헤매고 험준한 사막을 넘고 초원을 거닐지만, 이는 단지 은유일 뿐이에요. 읽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그것은 상상 속의 체험일 수 있고 내면의 성찰일 수 있지요. 따라서 작가로서의 바람이 있다면, 독자들이 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며 스스로 그 여행의 결과와 해답, 그리고 깨달음을 얻어가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세세한 부분까지 통제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엄연히 독자의 영역이에요. 비록 제가 만든 이야기와 인물들이지만 연민과 설렘과 슬픔의 감정 등을 직접 느끼는 사람은 결국 독자들이니까요. 그리고 그 과정은 일종의 독서를 통한 정신적 트레킹일 테고요.

“노프라블럼은 빅프라블럼이다.”

요즘 외국으로 떠나는 많은 젊은이들을 보곤 합니다. 그들을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나가게 만드는 현재의 가장 큰 프라블럼은 무엇일까요?

사실 특정한 경우를 빼면 꼭 나가야 할 필요, 그 프라블럼은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청춘의 시간에서는 어느 정도의 장치와 도구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저도 그랬고요. 젊은 나이일수록 낯선 공간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간혹 외국으로 떠나는 친구들을 보며 도망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들에게 낯선 곳은 자신을 대면하기 위한 곳이지 도피처가 아니에요. 어쩌면 그곳은 자신의 욕망과 도전을 재점검하는 공간일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마치 빵으로 부풀어지기 위해서 발효되는 시간이며 공간인 셈입니다. 제가 작품에서 인물들을 외국으로 나가게 한 이유도 그것과 비슷해요. 덧붙이자면 우리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만 지구에 살고 있는 것처럼 저는 국내작가이기도 하지만 세계 시민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작품은 우리 동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세계를 무대로 한 이야기이기도 한 거죠. 이런 맥락에서 밖으로 나가고 외국으로 나간다는 건 세계 시민으로서의 행동이라고 봐요. 한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맞이하는 것이고, 세계 시민의 일원으로서 낯선 세계를 대면하는 것이죠. 저는 작가로서 그런 공간과 인물들을 작품에 활용하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애써 생소한 공간에서 어려운 경험을 했던 그들이 돌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록 그들이 현실에서 마주친 문제와 찾지 못한 해답이 있어서 이곳을 떠났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돌아옴을 실패와 좌절로 볼 필요는 없다고 봐요. 여행이나 트레킹은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지요. 비록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이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사람들과 부대낀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 자리에 돌아온 그 사람은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이상향을 향해 좀 더 성장한 내면을 지니게 된 사람입니다. 배우라면 무대 위, 연구자라면 실험실 안, 화자라면 이젤 앞, 작가라면 종이와 펜 앞에서 과거와는 다른 자신을 세우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떠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죠.

“고도가 높으면 썩지 않을 수가 있다.”

결국 자신다움을 발견할 가능성은 낯설음을 경험함으로써 생길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낯섬과 불안을 대면해야 하는 현재의 청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을 남겨주세요.

사실 저도 늘 불안해요. 청춘의 시간이 끝난다고 해서 그 불안이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의 삶에는 항상 불안이 스며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그 불안이 익숙한 것이든 낯선 것이든 담대하고 의연하게 대처했으면 좋겠어요. 멀리 있는 불안을 앞으로 당길 필요는 없어요. 현재에 충실하고 노력하면 가까운 불안이 하나둘씩 사라져요. 소박하면서도 차분하게 계단을 밟아가는 겁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청춘들은 취업난에 불안해하는데, 그건 사회라는 낯선 곳을 향하는 학생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문제에요. 핵심은 꿈을 찾으면 직업을 얻게 되지만 직업을 추구하면 꿈을 잃게 된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자본과 꿈의 굴레에서 많은 친구들이 현재 고민을 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이 지닌 문제들은 그들 스스로 이미 해답을 알고 있는 노프라블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한 노프라블럼에서 생기는 불안을 크게 부풀리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낯설다는 것에 부딪혀 실패하더라도 그것은 성장의 한 과정일 수 있어요. 그래서 낯설음에 대면하려는 시도는 필요한 거고요. 낯선 공간, 낯선 시간에서 그 불안을 제거하거나 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이용하려는 자세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