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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113호] 테크노사이언스 시대의 사이보그 인간들


조아라 (고려대 과학기술학연구소 연구원, 서강대 강사)



첨단과학기술시대에 인간과 과학기술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과학기술은 인간의 도구일 뿐이라는 도구주의와 과학기술이 인간을 압도하게 될 것이라는 기술공포증은 현재의 특이성을 세세하게 짚어내는 혜안을 가리는 이분법적 통념으로 작동할 뿐이다. 도나 해러웨이를 준거로 인간과 과학기술이 맺고 있는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 착종관계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필자의 생각을 옮겨보았다.

누군가 ‘과학기술은 현대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라는 말에 동의하느냐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쉽게 ‘예’라고 답한다. 눈에 보이는 주변의 모든 것이 과학기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이내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라고 응한다. 그런데 만약 ‘그런 의미에서 과학기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사는 우리 인간은 사이보그이다’라는 말에 동의하느냐고 묻는다면, 이에 대해 선뜻 대답하는 경우는 드물 듯 하다. 왜 이 세 번째 질문은 수긍하기 어려울까? 아마도 과학기술은 인간이 보다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단 혹은 도구이며, 과학기술과 인간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boundary)가 설정되어 있다는 통념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을 ‘가까이에’ 두더라도, 인간은 과학기술 장치를 신체에 삽입하고 이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이보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표상된다.

이 지점에서 STS(Science&Technology Studies) 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문(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1985)”에서 정보통신기술과 바이오테크놀로지와 같은 첨단 과학기술로 점철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사이보그라고 말한 바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순수한(natural)존재라 파악하는 것은 환상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환상은 인간을 사이보그나 머리가 여럿 달린 괴물로 여기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까지 주장한다.

인간 존재와 과학기술의 착종관계

사실 인간이 사이보그라는, 이 공상과학과도 같은 해러웨이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핸드폰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매일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을 뿐만 아니라 음악을 듣고 TV와 영화를 보며 인터넷을 한다. 최근 출시된 스마트폰은 더욱 그 용도가 다양해 미지의 사람들과도 동시다발적으로 대화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핸드폰 사용이라는 실천행위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타인과 소통한다. 이런 의미에서 핸드폰은 인간과 분리 가능한 단순한 물질적 기술 장치가 아니다. 핸드폰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인식과 경험은 새롭게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바이오테크놀로지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최근 인간의 난치병 치료와 관련해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높아졌다. 그런데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기본적으로 인간 배아를 물적 자원으로 사용한다. 때문에 우리는 인간 생명의 시작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져야만 했고 결국 수정 14일을 기준으로 배아를 향후 인간이 될 수도 있는 ‘잠정적’ 인간으로 간주하여 관련 연구를 부분 허용했다. 즉, 핸드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배아줄기세포 기술로 인해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 자체가 재규정된 것이다.

이처럼 과학기술은 비가시적인 수준에서 인간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영역 내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다. 따라서 과학기술이 없는 인간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불가능하다고 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대 사이보그’라는 통념적 이분법은 ‘저 어딘가(out there)’에 정상적이고 순수하게 존재하는 자연을 기준으로 인간을 순수한 자연의 영역에, 사이보그는 비정상적이고 비자연적인 '비인간(non-human)'의 영역에 할당한다. 이에 과학기술은 인간의 목적과 의지에 따라 일방적으로 변용 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 나아가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적인 것, 혹은 본질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 중 어느 하나의 카테고리로 귀속된다. 하지만 앞서의 핸드폰과 배아줄기세포의 경우가 드러내듯, 과학기술은 선험적으로 가치중립적이거나 선한 것 혹은 악한 것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수동적인 도구가 아니다. 역으로, 과학기술과 대립된 선험적 자연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실 이러한 이분법은 근대 계몽주의와 관련된 이분법적 사고관의 영향 때문이다. 근대 계몽주의가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화, 이성과 감정, 객관과 주관, 자아와 타자, 남성과 여성 등을 구분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인간을 사이보그와 나누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론적 이분법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호관계를 인위적으로 단절하고 부정하는가 하면, 둘 중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수동적 존재로 대상화하는데 그칠 뿐이다.

사이보그 인간과 자연의 정치

따라서 우리는 과학기술 시대에 인간을 사이보그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러한 시도는 견고한 이분법적 사고를 균열시켜 다양한 인간/비인간 행위자(actor)들과의 부분적 연대 속에서 새로운 인간, 과학기술, 자연,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추동하는 해방적 가능성을 지니기에 적극 수용해야 할 필요성을 갖는다.

물론 사이보그 인간이 무조건 환영될 수만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군사주의, 식민주의, 인종주의, 가부장제 등이 현대 과학기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거대 자본주의와의 공고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과학기술일 경우 사이보그 인간은 거대 자본주의의 힘에 일방적으로 종속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생물학적 관점을 새롭게 재구성하도록 한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변형식품) 기술의 경우, 대부분의 GMO 연구와 개발은 거대 다국적 기업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 결과 GMO의 위험성은 거대 다국적 기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방적으로 협소하게 규정되면서 GMO 자체가 갖는 잠재적 위험성은 종종 은폐되곤 한다. 이 외에도 사이보그 인간은 현대 과학기술과의 관계 속에서 기후변화, 광우병 등과 같은 수많은 위험문제들에 부단히 결부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보그 인간에게는 라투르(Bruno Latour)도 말한 바 있는 ‘자연의 정치(politics of nature)’가 필요하다. 사이보그 인간들의 자연의 정치는 선험적으로 자연, 과학기술, 인간을 구분 짓는 이분법적인 사고관을 배척하고, 그동안 비가시화되고 왜곡됐던 다양한 행위자들을 면밀히 조사하고 이를 최대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나아가 새롭게 가시화된 다양한 행위자들을 사이보그 인간과 다른 의미에서 ‘또 하나(another)'의 사이보그로서 존중하고 받아들인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사이보그 인간을 비롯한 여러 행위자들의 목소리를 끄집어 낼 다양한 성찰적 실천이 반드시 수반된다.

여전히 우리는 자연적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식 속에 갇혀져 있다. 이에, 우리는 사이보그 인간론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이보그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 마련에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