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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4호] 존재(being)에서 행위(doing)로


박승일(신방과 박사과정)


2008년, 촛불이 한창이던 여름에 쓴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웹 2.0은 정해진 정보가 정해진 루트를 통해 전달되는 포털과는 달리 수동적 수용자(subject)가 정보를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중심이 되고, 기존의 정보를 재배치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안할 수 있는 기획자(project)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중(multitude)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담론 권력 내에서 틀지어진 이데올로기를 쫓기보다 굳게 형성된 상징계의 영역에 실재의 침입을 유도하는 징후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내파’적이다. 웹 2.0은 이러한 속성을 존재적 차원에서 담지하고 있다. 물론 이는 잠재성(virtuality)으로 존재하지만 특정한 맥락과의 절합(articulation)을 통해서 사회적·정치적 양태로 발현될 수 있다.”

웹2.0이 다중(multitude)적 속성을 내포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 현실적 근거는 무엇인가? 기획자(project)는 수용자(subject)와 얼마나 연속 혹은 단절되어 있는가? 상징계의 영역에 실재의 침입을 유도하는 징후적(symptom) 역할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가능하며,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가? 이러한 속성을 존재적 차원에서 담지하고 있다는 것은 주관적 기대인가 객관적 확신인가? 잠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냥 방치해도 좋다는 방관적 자세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혹시 이러한 낙관주의가 현실의 모순을 축소시켜 탈정치화하거나 자칫 신자유주의에 복무함으로써 현실의 적대를 은폐해 버리는,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반된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들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화려한 수사에만 그칠 때 ‘다중’이나 ‘대중 지성’ 혹은 ‘집단 지성’은 자신의 역량을 과도하게 신뢰하는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다. 중요한 것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구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치밀한 분석이며, 동시에 개념과 현실이 조응하는 국면을 발굴해 내는 것이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꾼다?

웹2.0의 매체적 특성이 곧 웹2.0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인터넷을 둘러싼 권력의 작동망은 웹1.0이 웹2.0으로 발전했다고 해서 쉽게 포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 큰 자본의 포섭망에 포획 당하는 과정일 수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다는 통념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매개 없이는 인터넷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을 은폐한다. 점점 더 많아지는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기술적 장치들이 필요하며, 기술이 발전할수록 기술에 대한 의존도 역시 같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에는 자본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실상 자본의 관여 없이 인터넷을 비롯한 대부분의 매체가 작동하기란 불가능하다. 웹1.0에서 웹2.0으로의 전환 역시 자본의 이익과 부합하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단지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개발된 것이 아니다. 인터넷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시장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과 포섭의 방식만 변했을 뿐 포섭 그 자체는 엄연히 잔존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수많은 매체‘들’과 그 매체들에 가해지는 수많은 힘‘들’ 그리고 매체와 경합하는 현실‘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는 그야말로 매체를 진공상태에 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매체를 대표하는 매체 일반은 없으며, 항상 특정 국면에서 작동하는 매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본과 권력의 공모를 극복할 힘이 네트워크에 있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의 확산이야말로 폐쇄된 체제를 개방으로 이끄는 핵심이며, 권위주의 정부를 붕괴시킬 수 있는 첩경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터넷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인터넷이 탈규제·익명성·탈중심성 등의 속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중앙집중식 통제와 배치되고, 이로써 인터넷이 민주주의를 이루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가 마치 자유롭게 댓글을 달고 풍자와 패러디를 하는 것만으로 이룩될 수 있을 것처럼 여기는 성급한 낙관주의를 초래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각은 권위적인 정부가 인터넷을 어떤 방식으로든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도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이미 통제된 매체 환경 위에서 성립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 한다. 이용 요금을 올리는 것에서부터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정부의 직·간접적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심지어 반정부적인 매체 이용 행위조차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은 인터넷을 통한 정치적 변화가 기대만큼 크지 않거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러한 비판은 인터넷과 민주주의가 직접적으로 연계될 수 있다고 상정했던 기존의 통념들이 재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동시에 매체의 선험적 속성들과 그 속성들이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것은 엄밀히 구분되어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트위터나 스마트폰이 네트워크식의 연결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실시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속성이 어떤 현실과 어떻게 만나는지는 여전히 탐구되어야 할 문제로 남아있다. 경제적 토대와 지배적인 사회규칙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간단하게 효력을 상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특정한 매체의 등장이 곧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불분명하고 성급한 기대가 아니라 매체와 매체의 외부가 교통하는 구체적 지점에 대한 보다 냉철한 시각이며, 기술의 진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분별력이다. 이럴 때만이 매체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언설이 기대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 

‘수행성(performativity)’으로서의 매체

버틀러(Judith Butler)는 ‘수행’과 ‘수행성’의 차이를 구분해야 함을 역설한다. 수행(performance)이 이를 행하는 주체의 존재를 전제하는 반면, 수행성(performativity)은 주체를 미리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주체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은 주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주체가 단지 담론적 실천에 의한 효과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즉 “젠더를 표현한 것 뒤에 젠더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체성은 그것의 결과라고 말해지는 바로 그 표현들에 의해 수행적으로 구성(버틀러, 2006)”된다. 수행성의 주체로 어떤 정체성을 상정할 경우 행위를 주제하는 (행위자로서의) 주체를 다시 소환하게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주체란 (또한 젠더란) 권력과 담론에 의해 이상화 되고 내재화 된 규범이며, 강제되고 훈육되어 익숙해진 담론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버틀러에 따르면,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행위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어온 바로 그 행위들을 통해 수행적으로 주체(그리고 젠더)가 구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젠더를 ‘존재being’가 아니라 ‘행위doing’로 이해하는 것은 본래적(주어진) 성이라는 관념을 폐기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성(性) 질서를 교란하는 정치적 실천 혹은 저항의 방식이 될 수 있다. 또한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젠더를 거부하고 다양한 행위들로 젠더가 재구성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정체성의 정치학’, 즉 단일하고 통일된 정체성에 근거한 정치학에 대해 ‘차이의 정치학’을 구성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 
 
버틀러의 논의를 매체의 영역으로 확장한다면, 이 공간 또한 수행성의 공간이며 담론의 효과로써 특정한 ‘국면적 속성’을 담지하고 있음을, 즉 수많은 이질적인 행위(doing)들로 구성된 실천의 영역임을 볼 수 있게 된다. 모든 육체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체 역시 선험적 존재가 아닌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수행성의 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체를 “그것의 실재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행위들과 분리된 존재론적 지위란 없다(버틀러)”는 의미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작동하는 매체‘들’과 별개로 존재하는 실재적 위치로서의 매체란 없다는 뜻이다. (젠더와 마찬가지로) 매체 또한 담론적 실천과 비담론적 실천 사이의 교차점에 위치하면서 각각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일련의 행위들로 구성된다. 담론적 실천은 구체적인 언표 행위들로 표현되고, 비담론적 실천들은 특정한 배치들로 구체화되어 현실 속에 매체가 기입될 공간을 마련한다. 그리고 정체성이 구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체 또한 이러한 실천들 속에서 수행적으로 구성된다.

매체는 사회적 변화의 ‘원인’이 아닌 ‘효과’

앞서 말했듯이, 매체와 사회를 일면적인 관점에서 볼 경우 매체의 발전이 곧 사회의 변화라는 단순화의 위험을 피하기 어려우며, 이는 곧 어느 특정한 요소로 환원할 수 없는 역사적 경합 요인을 하나의 요소로 수렴하는 오류가 되기 쉽다. 인터넷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가상공간의 힘을 과대평가해서 마치 이 공간의 역동적 흐름이 현실공간으로 곧바로 전이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가상과 현실의 질적차이를 간과하게 만들어 결코 동시적일 수 없는 비동시적 요소들을 동시화하는 오류를 낳는다. 필요한 것은 매체가 사회적 실천 속에서 구성되는 방식과 이 가운데 발생하는 갈등과 투쟁의 양상을 보는 것이며, 이는 매체의 내재적 속성이 아닌 현실과 교섭하는 수행성에서 비롯될 수 있다. 매체가 갖는 속성이 담론을 형성하고 국면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담론과 국면이 특정한 매체성을 작동시키는 것이며, 매체성은 이들의 숨겨진 원인이 아니라 효과일 뿐이다. 때문에 매체 영역에서의 변화, 예컨대 스마트폰이나 트위터와 같은 새로운 매체들이 사회적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변화된 사회적 욕구의 표현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욕구들이 없이 새로운 매체가 사회 내에 광범위하게 수용되기란 어렵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