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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14호] 『메트로폴리탄 게릴라』의 저자 박홍규를 만나다.


인터뷰 박승일
정리 곽성우



대학원생들에게 루이스 멈퍼드는 생소한 인물인데요. 20세기 초반의 사상가인 멈퍼드가 현재 재조명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1920년대에 발표한 처녀작『유토피아 이야기』를 시작으로 말년의 기계를 주제로 하는 논의까지, 루이스 멈퍼드의 사상은 조금씩 변해갔고 그 영향력 또한 시대적 맥락에 따라 굴곡이 있었습니다. 어떤 책은 반향을 일으켰지만 또 어떤 책은 무시를 당했고 70년대 즈음엔 거의 잊히다시피 했지요. 전체적인 관점이 요구되는 위기의 시기, 예컨대 1·2차 세계대전 등 시대의 전환점에는 이 사람의 논의가 어느 정도 통용되었어요. 하지만 그 당시 미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맑시스트들에 의해 멈퍼드가 그리는 사회상, 즉 지금으로 치면 자연친화적, 아나키즘적, 지역 사회적, 소집단 중심적인 사회상은 소박한 전원주의라고 평가절하 됐지요. 2차 세계대전 이후 맑시스트들이 거의 사라진 이후에는 미국의 모더니스트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고요. 미국 자본주의가 60-70년대를 거치며 점차 안정화, ‘전문화’ 되면서 멈퍼드가 주창했던 소위 ‘전인적 글쓰기’, ‘전인적 관점’이라는 것이 먹혀들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20세기 말 경 대두된 범세계적인 문제들, 특히 생태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반反-문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문명비판이라는 화두를 숙고하도록 하고 있어요. 멈퍼드나 데이비드 소로, 그리고 자크 엘룰 같은 문명비판가들이 현재 재조명되는 까닭은 역시나 지금 우리의 문명에 대해 그들처럼 ‘전인적 관점’에서 한번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절박함에서 비롯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여기 한국 사회에 멈퍼드를 소환해낸 이유가 있으실 텐데요.

저는 미국 이상으로 한국 사회가 과도한 문명, 즉 기술을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학문과 예술이 심각할 정도로 전문화된 사회라고 생각해요. 그 결과 도시, 생태, 과학, 학문, 예술 등에 대한 논의들이 파편화 되었고요. 예컨대 최근 통섭이나 학제 간 통합이라는 화두가 인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윌슨 류의 통섭이 대단히 반생태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해요. 내실을 따져보면 결국 과학으로 수렴되고 말기 때문이지요. 학제 간 통합도 마찬가지에요.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학제 간 연구의 결과물들은 대부분 하나의 주제 하에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각 관점의 논의들을 한데 묶는 형태를 띠는데, 이는 사실상 파편화된 결과물들을 엉성하게 얽어매는 단순한 결합 이상이 되질 못합니다. 이에 반해 멈퍼드의 사상은 시간적으로는 고대에서부터 현대사회까지, 공간적으로는 도시와 도시, 도시와 시골, 그리고 나아가 예술과 과학을 자기의 관점에서 함께 논한다는 것이 장점이지요. 덧붙여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멈퍼드의 에콜로지 논의가 한국의 녹색평론으로 대표되는 보다 근원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에콜로지 논의하고는 다르다는 겁니다. 적어도 멈퍼드는 도시, 과학, 기술을 전면 부정하지 않아요. 현대 문명의 장점을 충분히 인정하는 한해서 보다 건강하고 생태적으로 조화된 문명을 추구하지요. 따라서 김종철 선생의 소농주의, 천규석 선생의 농업중심주의 등과 멈퍼드의 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저 또한 박정희 이후 지금까지의 우리사회가 산업화사회를 지향하면서 이루어 놓은 것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문제는 산업화가 너무 급하게 진행되며 발생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앞으로 우리가 좀 더 생태적인 문명을 이룩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겠지요. 때문에 저는 과학기술과 예술의 조화, 농촌과 도시의 조화에 대한 추구가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아닌가 생각했고, 그런 의미에서 멈퍼드의 사상을 한국에 소개하고자 했습니다.

멈퍼드가 말하는 ‘소박주의’는 무엇이며 그 구체적 비전은 어떠한지요.

멈퍼드는 거대 도시, 거대 산업 등 ‘거대’라는 형용사가 붙는 현대문명의 특징이 인간을 비인간화 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거대가 아닌 소규모, 이른바 소박한 것이 요청되지요. 멈퍼드가 지향하는 도시는 사람들이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소규모 도시, 중세적인 도시예요. 이상적이라 꼽는 정치체계 또한 미국 초기 타원형의 자그마한 소규모 도시에서 구축되었던 주민자치 내지 참여형 정치체계고요. 문제는 현재의 거대 도시(서울처럼 인구 2000만이 밀집한 도시)내에서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현실화 할 것인가 하는 점인데, 저는 그것이 우리의 상상력에 달려있다고 봐요. 예컨대 거대 도시의 거대 아파트 촌 내에서, 아파트 한 동의 주민들이 창문이나 베란다 혹은 옥상을 공동으로 활용해서 유기농 작물을 재배하는 것도 하나의 시작이 될 수 있겠지요. 한편으로, 근로시간이 단축될수록 복지나 문화에 대한 요구는 늘어나는 반면 국가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때문에 문화와 복지에 대한 욕구를 자치적으로 해결할 필요성이 대두될 수밖에 없고요. 실제로 주부들에 의해 아파트나 주택단지나 조그만 동 단위를 중심으로 공동육아, 공동 레크리에이션, 공동 도서관 등이 조직되고 있다고 해요. 멈퍼드의 소박주의는 이러한 여러 움직임들로부터 현실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박주의’는 신념으로서는 옳다고 생각되지만 이론적 정합성이나 실천적 구속력에 있어서는 조금 빈약해 보입니다.

확실한 것은 현재의 거대주의가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예외적이란 사실이에요. 한국의 역사를 놓고 봐도 그렇고 서양의 경우 또한 현재와 같은 문명은 적어도 19세기 이후의 현상이라는 거죠. 물론 그 전에도 로마제국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지금처럼 거대 과학기술에 의해 생태가 파괴되는 정도는 아니었지요. 이처럼 거대 문명은 분명히 예외적인 현상임에는 분명한데, 이때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은 이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며 그 변화의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하는 것일 테지요. 하지만 저는 변화의 동력을 추상적으로 입론화 해야만, 예컨대 역사의 변화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과 같은 논의가 먼저 충족되어야만 사회의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좀 더 소박하게 이야기 하자면, 그럼 예수가 이론을 가졌느냐, 예수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안이 있었느냐, 이렇게 되물을 경우엔 할 말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죠. 오히려 멈퍼드는 인과론이야 말로 거대주의의 병폐라고 봤어요.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멈퍼드의 논의가 그 당시 사회주의자나 미국의 모더니스트들로부터 비판받게 된 이유의 근저엔 모더니즘이 구축했던 거대 인과론적 논의에 대한 철저한 거부가 있습니다. 거대 사회과학이론이 갖는 정합적이고 논리 정연한 운동법칙을 부정했다는 거지요. 이런 점에서 멈퍼드는 보드리야르 등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모더니즘에서 지적했던 실패, 즉 거대이론의 실패를 미리 정확하게 짚은 사람이지 않을까 싶어요. 어쨌든, 멈퍼드는 변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변화가 좀 더 빨리 이루어지길 바랐기에 문명에 관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쳤던 학자라고 볼 수 있어요. 저 또한 이 거대주의가 계속 거대해지리라고는 믿지는 않아요. 이미 자기 폭발의 위기 속에 있어요. 따라서 현재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모색하며 노력하고 있는 만큼, 그리고 이러한 소소한 움직임들을 소박주의라고 일괄할 수 있다면, 소박주의의 희망이라는 것을 그렇게 비관적으로 볼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멈퍼드는 ‘소박주의’의 이상화된 주체로 르네상스인 혹은 ― ‘스페셜리스트’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 ‘제너럴리스트’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일단 멈퍼드의 르네상스인은 소위 말하는 천재나 창조적 소수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다빈치 같은 사람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제시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르네상스나 중세, 즉 지역 공동체에서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을 지칭해요. 그들의 삶은 농업이나 수공업등의 전문화된 직업들로 분화되었던 것이 아니라 각 분야가 같이 병존하는 삶이었거든요. 삶 속에 예술과 기술이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녹아있었단 거죠.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는 다빈치 같은 천재가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준俊-다빈치였다는 겁니다. 결국 통합된 소규모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데, 현재 한국적 맥락에서 본다면 농촌보다 도시가 기술이나 예술을 접할 기회가 많고, 때문에 이 둘을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겠지요. 각자의 개인적인 관심의 교류 그리고 이에 기반하는 전인화가 가능하다는 얘기에요. 물론 도농교류 등이 보다 활성화 되어야겠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인식에 공감하고 또 전인적 교육이 가능해진다면, 사회조직이나 구성이 바뀌는 근본적인 변화와 함께 제너럴리스트가 탄생하지 않을까 싶어요.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녹색성장’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청계천이나 4대강 같은 사업은 적어도 멈포드적 착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현 정권이 하는 환경사업은 무늬만 생태적일 뿐 생태적 도시환경과는 거리가 있어요. 청계천이든 4대강이든 그 내실이 시멘트로 물을 가두는 것인데, 이는 모든 자연을 차단하고 파괴하는 것일 뿐이거든요.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생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지요. 그곳에 무엇이 사는지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라도 녹색이 된다면야 좋습니다. 단적으로 대구의 경우가 그래요. 대구가 5-6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더운 동네였는데 현재는 그렇지 않아요. 그 이유는 대구시에서 지난 10년 동안 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이에요. 물론 그 사업의 이면에는 문희갑 당시 대구시장과 조경사업가들의 결탁이 있었지요. 4대강 사업을 하게 될 때 건설업자들이 이득을 볼 것처럼, 조경사업가들이 부당이득을 봤고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만 보면 나무를 심어서 온도가 내려간 것은 사실이지요. 그런데 4대강 사업은 이러한 결과라도 초래할 수 있느냐,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나 녹색이 붙는 여러 변용 사업들이 유행하고 있는데, 방금 이야기한 사례처럼 사람들에게 정말로 생태적 이익을 준다면 그나마 좋게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멘트를 떡칠하고 결과적으로도 비생태적일뿐인 사업은 아니란 생각입니다.






"아주 작은 나라, 아주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탓일까. 대한민국이란 말처럼, 걸핏하면 세계최대, 세계최고라는 말처럼 우리는 거대의 신화에 젖어 살아왔다. 그래서 작은 것이 아름답고 진실하다는 것을 잊고 살아왔다. 더이상 작은 것으로 되돌아가서는 안되고 되돌아갈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후퇴고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세상에서 거대하지 않게, 시시하고 약소하며 가난하고 허약하며 서글프고 이름없이 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 삶을 그런 사회를 그런 자연을 꿈꾸며 거대신화에 처음으로 도전했던 멈퍼드를 좋아했다."








문화운동가들이 최근 골목길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골목길에서 공통적인 것을 조망해보자는 논의인데, 이를 멈퍼드 식으로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 혹은 선생님의 의견을 말씀해주세요.

일단 충분히 가능한 시도라고 봐요. 하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조금 부정적입니다. 현재 농촌이 파괴된 이상으로 골목길이 파괴되었거든요. 서울의 북촌, 가해동, 명륜동에 일부 남아있죠. 설혹 남아있다고 해도 거의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상황에서 그곳을 공동체적인 삶의 터로 재조명하고 재건할 수 있을까하는 점은 약간 회의가 듭니다. 물론 도시의 공동체 생활을 확보해나가는 노력의 일환으로서는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긴 한데 특정한 공간에 주목하는 운동들, 예컨대 한옥 재현 등과 같은 운동들에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요. 오히려 저는 대형 아파트단지나 주택단지에서 적절한 생태공간을 마련하자, 그런 운동이 효과가 있고 가능성 또한 높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아파트 공간을 넓히는 사람들의 욕망들을 전략적으로 이용해서, 강남 등과 같은 동네에서 넓은 아파트를 갖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유기농적인 자가 재배를 하도록 유도하는 운동을 벌이는 게 도시를 보다 생태화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 거죠. 물론 보다 멀리 보자면 골목이든 한옥이든 각각의 개별화된 아파트나 주택단지든, 소박한 유기농 공간의 확보는 그 자체로는 한계가 있어요.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워봐야 제한적이지요. 쌀이나 고기 문제 등은 해결이 안 되니까요. 때문에 도농 간의 교류, 즉 유통을 직결화 한다든가 혹은 특정 아파트나 특정 시골마을이 협동조합을 구축한다든가 하는 식의 방법이 확충되어야 한다고 봐요.

기술에 대한 멈퍼드의 관점은 엘룰이나 포스트먼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은 기술을 비판한다는 점에선 공통적이나 결론은 조금씩 다릅니다. 엘룰이 간단히 말해서 기술비난론자라면 포스트먼은 기술비난론자까지는 아니고 멈퍼드에 좀 더 가까운 사람이에요. 앞서 얘기했습니다만 멈퍼드의 주장은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여요. 30-40년대까지만 해도 기술에 대해 낙관적이었어요. 특히 전기 에너지 등에서 많은 기대를 했지요. 원자력 또한 인간적인 기술일 수 있다고 봤고요.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원자력에 대해선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원자력 기술이 전쟁에 의해 군사무기화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퍼드는 인간적인 기술의 가능성을 끝까지 믿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를 절명시킬 수도 있는 기술이 펜타곤으로 상징되는 거대 권력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고 주민들에 의해 민주적으로 통제될 수 있다면, 과학자가 보다 인문적인 전인이 될 수 있다면, 나아가 과학과 기술이 인문과 예술로 통합될 수 있다면, 우리의 기술은 또 다시 세계와 인류를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멈퍼드는 믿었다고 봅니다.

르네상스적 인간상을 모범으로 삼는 멈퍼드가 서구인들의 사상적 피난처인 ‘고대 그리스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잘 구별할 필요가 있는데, 멈퍼드는 그리스 ‘사상’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그리스 ‘도시’로의 회귀를 주장한다는 거예요. 제 개인적으로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비판적이고 그 사람들의 사상을 좋아하지 않아요. 가령 미국 사회에서 네오콘들을 이론적으로 지탱해주는 정치 이론가들의 태도는 다분히 플라톤주의적이지요. 반면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라는 민주적 소도시, 그 직접 민주주의의 발상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찬양을 하는 편입니다. 마찬가지로 멈퍼드 또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사상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이상적인 도시문명의 원형이자 직접 민주주의의 원형인 아테네, 그리고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 문명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봐야 해요. 멈퍼드는 서양의 특정 사상가들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어요. 반면 예수에 대해선 관심이 많았고요. 멈퍼드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이라고 하는, 인간 회의정신의 시초라는 점에선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로마제국을 무너뜨린 사회운동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에 대한 평가와는 사뭇 다르죠. 물론 멈퍼드 또한 서양인이기에 자신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 도시만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분명 한계겠지만요.

멈퍼드를 위시해 여러 학자들을 중심으로 ‘미디어 생태학’이라는 학문 분과가 구축되고 있는데요.

생태주의 언론학이라는 학문 영역이 현재 명확한 이론체계를 갖추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도 한두 권 책이 번역되어 나왔고 미국에서도 최근 활발히 언급되고 논의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말, 21세기 초에 와서 위력이나 변용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미디어들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하는 점에서 멈포드의 논의가 시사점과 계몽점을 던져준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반갑습니다.

라클라우나 지젝 등의 포스트-맑시스트들이 비판하듯, 전인적 관점이라는 것이 자칫 봉합할 수 없는 ‘적대’들을 조화와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은폐해버리지는 않나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러한 비판은 멈퍼드 살아생전에, 그러니까 1920-30년대에도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비판이에요. 보다 더 올라가면 윌리엄 모리스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도 있겠지요. 정통 사회주의자든 수정 사회주의자든 어떤 사회주의자든지 간에, 사회주의자들은 아나키즘이나 생태주의 등이 현실 모순을 오히려 은폐하고 봉합하는 것이 아닌가, 혁신이나 혁명을 저해하고 결과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억압구조를 더욱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지 않는가하고 비판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는 사회주의적 전략을 취하지 않는 다른 어떤 대안들에 대한 사회주의의 매우 전형적인 비판이라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개인적인 입장에서 저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을 듯해요. 그런 주장도 있고 이런 주장도 있다고요. 사회주의적인 논의도 있고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논의도 있어서 여러 논의들이 다양하게 얘기될 수 있는 그런 풍토가 좋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 오히려 반대로 멈퍼드가 질문하듯이,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거대 기술, 거대 과학, 거대 성장, 거대 산업, 거대 국가를 구축하고 마는 구조적 결합을 갖고 있다면, 사회주의자들이 이에 대해서 어떻게 답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소련이나 중국의 경우를 가짜 사회주의라고 부정하면서 진짜 사회주의는 아직 오직 않았다라고 답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무책임한 얘기인 것 같고요. 사회주의자들은 머리가 좋고 현란한 논리를 좋아해서 이것저것 따지려 들지만, 오히려 그러한 점이 사회주의를 망치는 원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대학원이 점차 ‘제너럴리스트’가 아닌 ‘스페셜리스트’를 키워내는 곳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학원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현재의 파편화되고 세분화된 전공 내에서는 학생들의 학문적인 영위는 물론이거니와 교수들의 학문적인 영위는 이룰 수 없다고 봐요. 학부교육도 그렇지만 특히 대학원교육의 경우 대한민국처럼 전문화, 파편화되어있는 곳이 어디 있나 싶어요. 미국도 그렇지 않다고 알고 있어요. 따라서 멈퍼드가 우려했고 또 주장했듯이, 대학원생들이 가능한 현재의 파편화해서 벗어나서 보다 전인적인 관심, 시각, 노력으로 여러 학문분야를 두루두루 섭렵하길 바랍니다. 물론 짧은 기간에는 힘들겠지만, 그렇게 했던 선학들의 예를 참조하면서 자기 학문의 영역도 넓히고 깊이도 심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