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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114호] 샌델이 몰고온 기차에 올라타기


최원 (시카고 로욜라 대학, 철학과 박사수료)



마이클 샌델의『정의란 무엇인가?』가 ‘왜’ 읽히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러한 질문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 글은 오히려 그 책이 ‘어떻게’ 읽히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둔다. 어떤 신드롬이 형성되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으며, 그 이유들이 반드시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도 힘들다. 앞으로 이러한 신드롬이 출판 시장을 변화시켜 적어도 자기계발서만이 시장을 독점하는 상황을 종식시키고, 인문학 서적의 부상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도 아직은 너무 섣부르다. 중요한 것은 샌델의 책이 읽히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닐까? 그것은 어떤 현실, 어떤 정세 속에서 어떻게 대중들에게 읽히고 있는가? 이러한 의도치 않게 생겨난 ‘결과’ 안으로 우리는 어떠한 지적 개입을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언젠가 알튀세르가 말했듯이) 기차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고 훌쩍 올라탈 수 있는 용기, 그러한 ‘유물론자’의 용기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용기는 물론 모든 독특한 상황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용기라고 볼 수 있지만, 특히 샌델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비판적 개입의 경로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용기가 아닌가 여겨진다. 왜냐하면 샌델은 우리에게 반대로, 기차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도착지가 어디인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와의 동일시는 가능한가

샌델은 우리가 각자 단순한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보다 더 커다란 공동체의 이야기, 어디선가 와서 어디론가 가고 있는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해 있는 개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커다란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개인의 ‘미덕’ 및 개인 간의 ‘정의’를 규명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대해 우리가 “동일시”할 것을 적극적으로 제안한다. 과거 80년대 말ㆍ90년대 초에 유행한 좌파의 이론적 담론이나 뒤이어 나온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던 담론이 동일성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몰두했다고 한다면(특히 포스트 담론은 이러한 관점에서 “작은 이야기”를 유행시켰던 것을 우리는 아직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반대로 주어진 동일성을 적극적으로 부둥켜안으라는 역의 주문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마치 이 동일성이 부여해주는 질서가 우리가 마주한 부정의한 현실을 대신 해결해 줄 수라도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복잡하고 갈등적인 현실을 돌아볼 때, 샌델이 보여주는 이러한 낙관적 전망이 어떻게 가능한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는 샌델 자신이 잘 알고 있듯이 하나의 단일한 공동체가 아니다. 가족적, 직업적, 지역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공동체 등 실로 다양한 공동체들이 있으며, 이들은 신이 미리 정해놓은 예정조화설에 따라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공동체들이 아니다. 이들은 갈등하는 공동체들이며, 때로는 물리적인 충돌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적대에 의해 특징지어지기도 하는 공동체들이다. 이 공동체들이 서로를 관용하게 만드는 사회적 유대는 샌델이 말하듯이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특정한 헤게모니적 정치를 통해서) 인위적으로 생산된 것이다. 많은 경우 이러한 유대의 생산 자체가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과거에는 그나마 민족국가가 이러한 헤게모니의 중심을 장악함으로써 상이한 공동체들이 서로를 관용할 수 있는 어떤 공간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민족국가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거센 바람 속에서 헤게모니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 (적어도 ‘중심’에 있는 몇몇 국가들에서는 민족국가의 경계 내에서 얼마간 해결할 수 있었던) 계급 갈등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미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믿었던 종교, 문명, 인종적 갈등들까지 다시 모두 고개를 쳐들고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우리에게는 전통적으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낯선 공동체들의 빠른 출현을 목도하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 폰 등을 통해 형성되는 크고 작은 공동체들 또는 네트워크들은 종종 강력한 여론들을 만들어 내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 공동체들의 본질이나 활동의 메커니즘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기존의 예측을 뛰어 넘는 놀라운 방식으로 기존의 정치적, 제도적 수단들을 무력화시킨다(멀게는 촛불 집회로부터 가깝게는 정부의 인터넷 실명제를 무력화한 ‘소셜 댓글’에 이르기까지 여기에는 많은 사례들이 있다).

대안적 공동체에 대한 욕구와 시민인륜의 정치 공간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원래 존 롤즈의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의관에 대해 반대하면서 나온 것이지만, 양자 모두 민족국가가 아직 헤게모니적 역능을 상당히 발휘하던 때에 전성기를 구가한 입장들이라는 점에서 이들 간의 논쟁 자체가 현재까지 이론적 유효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롤즈에 대한 또 다른 반대는 주지하다시피 로버트 노직과 같은 이의 ‘자유지상주의’의 형태로 터져 나왔으나, 과연 노직의 이론을 ‘정의관’이라고 봐줄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국에 뒤늦게 도착한 샌델의 공동체주의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방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히려 민족국가의 위기 속에서, 그리고 날로 확산되고 있는 삶의 복잡성과 불안정성 속에서, (신)자유주의적이지도 않지만 동시에 (구)좌파적이지도 않은 대안적 이념을 추구하는 대중들의 지적인 노력일 수 있다. 적어도 대중들은 (그들이 어떤 동기에 의해 추동되었든 간에) 그의 책을 읽으면서, ‘공동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공동체에 수립되어야 할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물론 이러한 대중들의 노력은 그 자체로는 모순적이며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동체주의가 (신)자유주의나 (구)좌파적 이념만큼이나 오늘날 위기에 처해있는 이념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에 대해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것이 무능력한 현재의 공동체를 대체할 모종의 ‘대안적 공동체’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을 담고 있다는 사실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하나의 개입지점이 생겨나며, 지식인으로서 우리가 대중들과 함께 책을 들고 읽거나 또 다른 책들을 함께 읽자고 제안해야 할 의무가 생겨난다.

예컨대 우리는 샌델의 철학적 영웅이지만 샌델의 해석과는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 ‘또 다른’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해서,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후기) 맑스 등으로 이어지는 전통에 주목해 볼 수 있으며, 대중들과 함께 이들의 이론들을 새롭게 읽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이들은 사회적 갈등을 사전에 미리 정해진 해답이 있는 문제로 여기지 않았고, 대중의 무지로 인해 생겨나는 사회악으로 바라보지도 않았으며, 다소의 토론 과정을 통한 ‘합의’를 달성함으로써 최대한 해소해야 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반대로 사회적 갈등을, 특정한 조건 하에서 공동체의 역능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는 긍정적인 힘으로 바라봤다. 따라서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회적 갈등이 극단적 폭력으로 치닫지 않을 수 있는 자기-제어적 시민인륜(civility)의 정치 공간을 열어내는 문제였다.

차이와 갈등의 공동체를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보면, 그 핵심을 이루는 “분배정의론”은 단적으로 사회적 갈등의 근원을 이루는 하나의 근본적 아포리아를 지적함으로써 논의를 출발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곧,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기여도에 비례하는 ‘상대적 평등’을 정의로운 것이라고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는 동의하지만, 그 기여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기준을 내세우고 싸우게 된다는 아포리아 말이다. 귀족은 능력(덕)을, 부자는 돈을, 그리고 평민(데모스)은 자유를 공동체에 대한 기여도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기준들은 보다시피 서로 통약 불가능한(incommensurable), 이질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하나의 초월적이고 더욱 보편적인 기준을 내세워 갈등을 봉합할 길은 없다. 공동체 전체의 자원과 권력의 분배를 위한 보편적 기준을 둘러싼 이러한 투쟁이 영속화됨에 따라, 공동체 전체가 붕괴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정치학』 전체를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는 데에 바치고 결국 ‘혼합정체’라는 문제설정을 도출해내는 것인데, 이것의 핵심은 ‘정체’ 안에 적절한 세력관계와 갈등적 다원성을 각인시킴으로써 하나의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주권자가 누구 또는 어떤 집단이든 간에, 주권자가 얼마나 많은 ‘미덕’을 소유하고 있든지 간에, 반드시 부정의한 정체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갈등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우리는 비교적 최근에 시도되고 있는 신공화주의(neorepublicanism)의 다양한 기획들에 주목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헤르만 판 휜스테렌은 『시민권의 이론』(근간)에서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구)공화주의의 대안들이 모두 낡아버린 현재의 이념적 정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운명 공동체(community of fate)”라는 새로운 기획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것은 (샌델의 공동체주의처럼)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출발해서 하나의 공통된 운명적 목적지(destiny)를 향해 가고 있다고 가정되는 공동체의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구성원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그 대표적 형상을 이주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서로 이질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서로 원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함께 살 수밖에 없는 공통의 운명(fate)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공적인 방식으로 논의하고 타협하고 갈등하기 위한 정치적 공간으로서 공화국을 바라보는 관념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념들을 대중들에게 제안하고 함께 고민함으로써 대안적 공동체를 모색하는 그들의 논의에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지금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