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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5호] 신의의 인간 박종철, 언제 어디서나


김태호 (박종철출판사 대표)

박종철(朴鍾哲). 1987년 1월 14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4년이 조금 안 된 어느 날, 서울 남영동에 있는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비밀 조사실에서 수사를 받다 고문에 목숨을 잃은 대학생의 이름이다. 정보기관은 혈안이 되어 찾던 어떤 운동권 학생의 소재를 후배인 박종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 연행했다. 고문이 있었고, 박종철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절이었다. 1979년 12월 12일에 불법적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그에 반대하는 시위와 집회는 곤봉과 최루탄으로 해산시키고, 시민과 학생들을 연행하여 감옥으로 보내고, 결정적으로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은 군인 집단의 우두머리가 참으로 희한한 방식으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박종철이 목숨을 잃은 1987년은 전두환이 마지막 임기를 보내게 되는 해였다.

고문의 ‘피해자’ 또는 민주항쟁의 ‘기폭제’ 그 이상

1986년 내내 야당과 국민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권력과 싸움을 벌였다. 전투경찰이 없으면 거리는 시위대로 가득했고,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조직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졌다. 북한이 금강산에 댐을 만들어 물로 공격할 것이니 더 큰 댐을 지어 막자며 국민 모금 운동을 펼치던 때였다.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언론은 서울대 학생이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신속히 알렸다. 이때 경찰 관계자의 해명이 그 유명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었다. 많은 국민이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앞길이 창창한 대학생의 죽음에 마음이 아팠던 사람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야만적인 권력기관에 분노한 사람들, 정통성이 없는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 그의 어머니나 할머니 나이의 여성들은 전투경찰에게 꽃을 꽂아 주며, 길을 터 달라고 했다. 보도블록과 화염병을 던지며 과격한 방식으로 체제와 맞서려던 학생들도 있었다. 지금은 ‘민주항쟁기념일’이 된 6월 10일까지 거리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박종철의 이름을 부르며 싸웠다. 고문의 무고한 ‘피해자’ 또는 1987년 민주항쟁의 ‘기폭제.’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당시의 운동권 학생들은, 특히 나를 포함하여 그의 짧은 대학 시절을 가까이에서 함께했던 몇몇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박종철이 많은 국민을 일어서게 한 깃발이었다면, 우리에게 종철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엄중한 깃발이었다. 집권 세력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고문이 가해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고문 사실을 폭로하지 못하도록 고문과 협박이 덧붙여졌다. 극심한 고통을 줄 뿐 목숨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또는 흔적이 남지 않도록, ‘고문 기술자’가 양성되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다른 ‘박종철’이 더 있을지 모르나, 대부분 고문에 굴복했다. 목숨을 걸고 동지를 지키자는 약속이 지켜지는 일이 정말이지 드물었다. 박종철은 죽음으로 그런 고문에 맞선 인간이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신의의 인간’이었다. 정의로운 젊은이라면 그때 어떤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

박종철은 죽어서야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다. 선배인 나와 종철이의 친구 하나는 그가 죽어서야 그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 그의 살아서의 이야기를 전하자고 했다. 그래야 왜 그가 ‘피해자’가 아닌지, 말하자면 그것이 그가 택한 길임을 알릴 수 있을 것이었다. 1964년 부산 출생. 재수. 1984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입학. 대학생 형과 먼저 대학생이 된 친구들의 영향으로, 입학과 동시에 학생운동 시작. 그 뒤의 종철이의 생활은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대다수와 같은 식의 생활이었다. 만남, 학습, 토론, 설득, 집회, 시위, 구류, 구속, 부모와 가족에 대한 미안함, 다시 학습, 만남, 결의. 정의로운 젊은이라면 그때 어떤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

가장 어려운 약속을 지킨 사람

물론 한 인간의 굳은 결의가 팽팽한 긴장에서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이, 게다가 종철이처럼 살갑고 곰살맞은 사람의 삶이 건조한 것은 아니었다. 농촌활동 도중에 위경련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위해 밤새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플라스틱 양동이가 타는 줄도 몰랐던 사람이었다. 동료들과 먼 길을 떠나면 무거운 짐을 메는 사람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겨울 외투를 구속된 후배에게 넣어 주는 사람이었다. 비밀스런 모임이 경찰의 주목을 받자 가방을 빼앗기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안전하게 피하도록 책임을 다한 사람이었다. 어떤 장면에서나 크든 작든 궂은일을 도맡았고 약속한 바는 지킨 사람이었다. 1987년 1월에 서울대 학생 하나가 신림동의 하숙집에서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었다. 종철이 자신도 이를 알고 있었다. 책상과 욕조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방에 들어서자 종철에게 상황은 분명해졌다. 커다란 덩치의 수사관들이 자신의 머리를 욕조에 처박는 순간, 종철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상의 소소한 일에서 남을 배려하고 헌신적이었고 약속을 지켰던 종철이는 어려운 약속을 그렇게 지켰다. 종철이는 고문에 맞서 동지를 지킨 사람, 가장 어려운 약속을 지킨 사람이었다.

1987년 당시 ‘재야민주화운동가’였던 사람들은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로 박종철을 기념했다. 이 단체는 부침을 겪다 얼마 전에 사단법인 박종철기념사업회로 사업을 정비하고 있다. 매년 1월 14일 전후의 일요일에 마석의 묘역을 참배하는 것은 이 단체의 준비로 진행된다. 종철이의 선배, 동료, 후배 몇몇은 기념사업회와 별도로 출판사를 시작했다. 그 출판사의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박종철출판사는 신의와 신념을 위해 죽은 우리의 벗을 기억하고자 1990년에 설립되었으며, 그와 함께 꿈꾸었던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1988년 초에 나온 앞서 말한 책 『그대 온몸 깃발 되어』가 더 이상 인쇄되지 않음을 알고, 일부 내용을 수정하여『박종철 평전』도 냈다. 박종철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읽은 책이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니까.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흐른 시간만큼이나 한국 사회도 많이 변했고, 박종철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바로 그해 10월에 헌법이 개정되었고 12월에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했다. 두 번의 대통령 선거를 더 치르면서 집권당이 바뀌었고, 지난 선거에서 다시 여와 야가 교체되었다. 그리고 박종철기념사업회와 관계가 있던 재야인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정치인이 되었다. 당시 고문 가담 수사관을 조사한 검사가 현재 여당의 원내대표이기도 하다. 1987년에 박종철을 알게 되었고 그를 1987년 6월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에서 벌어진 변화가 ‘박종철 문제’를 해결했다고 보일 수도 있다. 그가 목숨을 잃은 곳, ‘남영동 대공분실’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바뀌었고, ‘509호’ 조사실은 당시의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다. 추모식에는 경찰청의 사람도 참가한다고 한다. ‘박종철을 생각하는 인권장학회’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박종철을 기념하는 사람들도 있다. 박종철을 만난 적도 없는 그의 학교 후배들이 이리저리 기금을 마련해, 중학생 또는 고등학생들에게 인권의 소중함과 박종철의 이름을 기억하도록 장학금을 주는 단체이다. 이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박종철 평전』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한다고 한다. 이 밖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방식으로 박종철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해마다 1월이면, 내게 또는 박종철출판사로 연락이 온다. 추모 행사와 관련된 것을 묻는 사람도 있고, 취재 요청도 있다. 그의 이야기가 드라마로 제작된 일도 있고,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여러 번 방송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책임을 다하려 했다.

시대와 대결하는 이에게 언제나 ‘깃발’

시대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걸고’ 그 문제의 해결에 앞장서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소수이지만 언제나 있었다. 박종철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 그가 한 일이 많지 않게 보이는 것은 너무 어린 나이에 담담하게 자기 길을 갔기 때문일 뿐이다. 길거리에 정복 차림의 전투경찰이 막무가내로 가방을 뒤지고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는다 해서, 황당한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지는 않는다 해서, 비밀 고문실에서 극악한 방식으로 고문이 일어난다는 뉴스가 없다고 해서, 박종철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 설립이 법률상 보장되고 1970년과 비교해 근로기준법이 잘 지켜진다고 해서 전태일을 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온갖 영역에서 온갖 방식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파괴와 죽음으로 몰아넣고 일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시대와 대결하고 그 문제의 해결을 앞장서려 하는 사람들에게 전태일과 박종철은 언제나 ‘깃발’일 수밖에 없다.

종철이가 죽은 지 20년이 되던 해 나는 한 인터넷 신문에 기고했던 글의 일부를 옮겨 본다.



“‘민중이 해방되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투박한 희망에 모든 것을 걸겠노라 약속하고 동지들과는 목숨만이 갈라놓을 것이라 다짐하던 그때의 박종철을 알던 사람들은 그를 ‘약속을 지킨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를 직접 알고 그와 직접 약속한 사람이 아니라도 그를 ‘신의의 인간’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20년이 한결같고, 1월의 어느 날이 특별하지 않다. 그가 지킨 약속에 값하며 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