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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5호] 죽음을 증언하는 검은 페이지의 삶


이성혁 (문학평론가)


1989년 3월 7일 새벽, 기형도 시인은 종로에 있는 한 삼류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숨졌다. 만 29세. 그리고 같은 해 5월, 그의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곧 기형도를 뒤따라 세상을 떠나게 될, 당대의 평론가 김현이 이 시집에 감동적인 해설을 썼다. 요절한 시인의 시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을 평론가의 해설이 실려 있는 이 시집은 1990년대에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독재 체제에 항거하는 데 기꺼이 참여했던 1980년대의 시가 대낮의 시라고 한다면, 기형도의 시는 밤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1990년대의 청년들은 <입 속의 검은 잎>에서 어두운 곳에 감추어져 있었던 자신의 검은 자화상을 발견하곤 했다. 

입속의 검은 잎, 낯선 나와 마주치기 

기형도의 시를 읽어보면, 마치 그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한, 그것도 그의 내면 깊은 곳까지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이 느낌은 환각일 뿐이겠지만, 이 환각이 아마도 <입 속의 검은 잎>을 그토록 많은 사람이 찾게 한 원인이기도 하다. 이 시집을 통독하고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떤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옛 친구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가지게 되는 상실감. 그런데 망자와의 그런 친근감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그 친근감은 독자들이 감지한 ‘옛 친구’가 바로 독자 자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기형도가 자신의 시에 자주 썼던 대명사 ‘나’는 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겹쳐놓을 수 있는 빈 자리였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기형도는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病」에서)라고 쓴 바 있다. 이 구절의 화자인 ‘나’는 이미 주어를 잃고 헤매는 자, 자기 자신이 낯설게 된 자다. 그래서 ‘나’에게 낯선 자인 시 속의 ‘나’의 진술은 “낯선 풍경화”에 대한 묘사가 된다. 그래서 이때의 ‘나’는 자아가 자신과 합치시킬 수 없는, 주어를 잃은 주어다. 저 주어는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역시 주어를 잃어버린 수많은 ‘나’들-독자들-이 ‘나’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저 ‘나’는 당신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주어를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당신 얼굴이 갑자기 낯설게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갑자기 울부짖고 싶지 않는가? 아래의 읊조림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기형도 시의 주어를 잃은 주어인 ‘나’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자들이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진눈깨비」에서

<입 속의 검은 잎>은 주어를 잃어버린 ‘나’의 어떤 여정을 보여준다. 그 ‘나의 여정은 기형도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여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록 기형도가 짧은 삶을 살았고 그래서 많지 않은 작품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의 시 세계는 간단하지 않다는 점을 미리 지적해야겠다. 그는 그 두껍지 않은 시집 안에 여러 테마를 시화하고 있으며 여러 형식과 문체를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면이 한정된 이 글에서 그의 다채로운 시 세계를 전반적으로 모두 언급할 수는 없고,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나’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는 시편들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시편들이 독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기도 하다. 

기억, 유년의 상실체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받쳐주고 있는 뼈대 중 하나는 ‘기억’이다. 기형도 시인의 기억은 풍성하지 않다. 그의 기억은 상실로 채워져 있다. 그에게는 유년 시절의 기억마저도 따스하지 않고 춥다. 그의 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시 중 하나인 「엄마 걱정」에서 시인은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라고 쓴다. 그리고 그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유년 시절을 그는 “내 유년의 윗목”이라고 표현한다. 유년의 기억은 찬 윗목에 앉아 있다. 원초적 상실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체험은 기형도 시편들의 깊은 곳에 자리 잡는다. ‘엄마’의 부재와 가난, 그리고 외로움과 두려움.  

그런데 “찬밥처럼 방에 담겨”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병든 아버지의 존재 때문이기도 하다. 기실 기형도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시를 더 많이 남겨 놓고 있다. 「겨울판화」 연작시라든지 「위험한 가계」와 같은 시들은 병든 아버지와 어려서 죽은 누이에 대한 기억을 시화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기형도 전집>의 연보를 보면 그 시작(詩作) 작업은 기형도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연보에 따르면, 시인이 열 살 때(1969년) 부친이 중풍으로 쓰러지시면서 비교적 유복한 편에 속했던 집안은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진다. 그리고 시인이 열여섯 살 때에는 바로 위의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다. 기형도 시인의 원체험은 이러한 상실의 아픔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년의 상실 체험은 성인의 삶에서도 반복된다. 이는 뿌리내린 기억의 힘이 어떤 운명을 형성하면서 유년의 체험이 미래의 삶에서도 반복되기 때문에 일어난다. 역시 독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시 중 하나인 「빈 집」은 그 ‘빈방’에서의 유년 체험이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인 ‘사랑’을 빈집에 가두어놓고는 쓸쓸한 가슴을 안고 거리로 나간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울먹이던 아이는, 이제 성인이 되어서도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되는 상황을 반복해서 맞는다. 빈방에 홀로 남아있던 아이는, 이제는 희망과 꿈과 기억과 사랑을 그 빈방에 유폐시키고 집을 떠난다.

검은 진실, 말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해 말해야 한다는 것

사랑을 잃고 무작정 떠난 것이므로 목적지는 없으리라. 그리고 사랑을 잃고 기억을 버리려고 하는, 그리하여 주어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植木祭」에서)라고 시인이 말하듯이. 이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을 쓸쓸하게 드러내는 매체는, ‘가는 비’다.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지만,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가는 비 온다」에서)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사람들의 모습은 음산하다. 죽음을 각오한 자에게 시는 이 도저한 생기 없는 풍경에 견디지 못하여 입을 다물어버리기 직전에 뿜어져 나오는,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오후 4시의 희망」에서)라는 탄식과 같다. 

이제 시인은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흔해빠진 독서」에서)라고까지 말한다. 그는 이 죽은 자들을 왜 추억하려는 것일까? 죽은 자들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기 위해서일 테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 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공포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가 증언하려는 죽음들, 그것은 「입 속의 검은 잎」에서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으로 상징화된다. 그런데 그는 그 “검은 잎이 두렵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같은 시에서 “그의 장례식”에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가야 하는 것”…, 시인은 어떤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나’-독자-처럼 상처투성이의 삶을 살았을, 아버지와 누이와 같은 ‘죽은 자들’, 그 말할 수 없는 자들에게 가야하며, 그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의무일 것이다. 
 
기형도 시인이 공포를 느끼면서도 죽은 자들을 대신해 말하고 있는 장례식장은, 주어를 상실하고 헤매던 그가 결국 도달한 곳이다. 이곳에 머무르면서 시인은 ‘나’에 대해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영혼’(「오래된 書籍」에서)이라고 지칭한다. 여기에 이르면 독자들은 도저한 비관주의를 보게 될지 모른다. 기형도의 죽음이 마치 자살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한다고 그를 힐책하는 사람도 생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에서 시인은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꿈꾸어야 한다, 단/한 줄일 수도 있다//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진술하고 있기도 하다. 그 “하나의 목적”이 진실을 의미한다면, 시인이 이 구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은 ‘거짓’(허구)을 통해서라도 검은 진실을 증언해야 한다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닐까. ‘나’-독자-의 내면이 죽어가고 있다면 죽어가고 있다는 진실을 시인은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의 “가야 한다”는 의무일 것이다. 그 의무에 따라 기형도 시인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시집을 남겼다. 이 검은 페이지를 비관에 빠진 자의 넋두리로 치부할 순 없다. 검은 진실을 드러내고 증언하는 일은 삶에 죽음을 불어넣고 있는 이 허위의 세계에 대한 고발이자 부정이고 항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