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115호] G를 쥐라 하지 못하는 더러운 세상: G20 포스터 패러디의 주인공 박정수를 만나다


인터뷰 및 정리 박승일



G20 그래피티 작업이 굉장히 큰 이슈가 됐어요. 신문과 방송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해 좌담회까지 열렸고요. 이러한 반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냥 작업하고 사진 찍어서 트위터에 올릴 생각을 했었어요. 트위터에 올리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했었거든요. 그런데 경찰한테 잡히고 이후 구속영장이 청구되면서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사회적 파장이 발생한 거예요. 솔직히 이렇게까지 크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이 더 큰 의미를 불러일으킨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타이밍이 적절했던 것 같아요. 경호법이 11월 1일부로 공표됐는데, 기사가 11월 2일인가에 처음으로 보도 됐거든요. G20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였던 거죠. G20과 관련해 예상됐던 저항, 비판의 움직임이 아직 본격화되기 전에 사건화 되어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 같아요.
 
첫 시도이자 동시에 유일한 시도이기도 했잖아요?

 
그렇죠. G20에 대한 문제제기, 비판, 저항의 첫 번째 포화였지요. 예술행위가 일종의 총탄이 된 거예요. 처음이라서 더 큰 의미를 가졌던 것 같고 사람들도 크게 반응한 계기가 된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처음은 아니에요. 성격은 조금 다르겠지만 이전에 발생한 미네르바 사건이나 촛불 역시 이명박 정부의 상징적 이미지에 대한 파괴 혹은 훼손이거든요. 이번 퍼포먼스 역시 상징이미지를 전장의 중심에 놓고 이들 이미지에 대한 비틀기를 통해 비슷한 효과를 얻었다고 생각해요.
 
두 가지 충격이 동시에 있었는데, 상징이미지에 대한 풍자도 충격이지만 오히려 구속영장이 청구됐다는 게 더 큰 충격이기도 합니다.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공안당국의 대응에 대한 충격이겠지요.

 
실질심사를 받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이 그렇게 충격적이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당사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검사의 태도나 내부의 분위기를 봤을 때 사건이 공안화되는 과정이었고, 때문에 수순에 따라 당연히 구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각오까지 하신 건가요?
 
각오를 했지요. 대비까지 했고요. 예상했던 것보다 결과가 늦게 나왔거든요. 저녁 8시쯤에는 결과가 나올 줄 알았는데 한 열 시까지 기다렸어요. 그 상황에서는 ‘아, 이제 구속이구나’라고 생각했죠. 어쨌든 제 입장에서는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에 대해서 의아하다는 생각보다는 수순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여겨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정부가 이런 일로 영장을 청구하는 게 충격적이라고 말하는 게 반갑더라고요. 한 쪽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하는 그 기간 동안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이라든가 의식이 전과는 많이 달라진 거잖아요. 공안적 행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시민적 의식이 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이런 점에서 반갑고 의미 있는 반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소하게 묻힐 수도 있는 사건이었는데, 정부가 무식하게 대응해서 사건의 의미도 증폭되고 사람들의 반응도 더 커진 것 같아요. 조연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 셈이네요.

그러게요. 어떤 사람들은 엑스맨이라고 하더군요. 검찰이 내부의 안티세력이 아닐까하고. 그간 이명박 정부가 하는 행태들이 사람들에게 일종의 희극적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 같아요. 시대에 안 맞는 권위주의적인 모습이나 과거 독재 정부의 행태를 답습하는 게 대표적이지요. 그런데 시민 의식이 전과 다르고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이 바뀐 상태에서는 이런 것들이 구시대적 잔재로 희극화되어 나타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검찰의 태도 역시 희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쌍팔년도도 아닌데 구속수사라니요.
 
이 사건을 기획하셨을 때는 발랄한 태도로 임하셨을 것 같아요. 어떠셨나요?

 
그래피티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는 발랄하고 즐겁게 임했죠. 행위 자체가 과거의 운동권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일종의 예술적 행위이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긴 임했는데, 작업을 하는 당일에는 비장하다고 해야 할까요? 전투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죠. 어쨌든 경찰과 맞서거나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요. 아무래도 법의 벽에 부딪치는 행위이기 때문에 긴장이 됐어요. 하지만 긴장하면서 그림을 그릴 때는 심리적인 방어선을 넘어선다는 것에 대한 희열이 있었어요.
 
희열이요?
 
금지의 선을 넘는데서 오는 쾌감이 굉장히 컸던 것 같아요. 어떤 선을 넘어섰다는 느낌이 제 안에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 역시 한국인이기 때문이죠. 해서는 안 되거나 못하게 하는 문화적 금지의 선이 분명히 있는 것 같거든요. 하물며 사람들은 보도블록에 분필로 낙서하는 것도 잘 못하잖아요. 재미있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실제로 하는 것은 잘 못해요. 귀찮기도 하거니와 어떤 선을 넘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런 행위를 했을 때 다른 사람의 반응, 예컨대 경찰 조사 같은 압박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요. 그래서 그 선을 넘는 것에 대해서 큰 희열을 느낀 거죠.
 
쥐를 굉장히 정교하게 잘 그리셨어요. 쥐로 표상되어 왔던 이명박 대통령을 희화화하기 위해서 쥐를 그리신 건가요? 그림을 그리셨을 때 의도하신 게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저도 한국인이라서 이명박 대통령의 별명이 쥐 이미지와 겹쳐지는 걸 의식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도안을 할 때에는 G20에서 G라고 하는 이니셜을 발음(G=쥐)했을 때의 형상을 뽑아나는 게 더 중요하게 작용했어요. 이명박을 쥐 이미지로 패러디한 그림은 이미 인터넷에 많이 있잖아요? 이명박의 얼굴과 겹쳐지게 만드는 그림. 그런데 그것과는 다르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오히려 이명박이 안 떠오르도록 보이게요.
 
어, 그건 의외네요?
 
이명박이 안 떠오르도록 사실적인 쥐를 그리고 싶었어요. 그냥 쥐를 그리고 싶었던 거죠. 의미의 폭이 훨씬 넓게요.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동시에 쥐에 부여된 이미지, 즉 권세나 부에 대한 탐욕스러움, 다중의 건강한 의식을 갉아먹는 이미지, 인간 삶에 꼭 필요한 공동체적인 것을 훼손하는 그런 이미지까지 포함해서 그리려고 했어요. 그래서 이명박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사실적인 쥐에 가깝게 표현하게 되었죠. 그리고 뱅크시의 그림들에서 이미지를 차용해서 이를 혼성해서 만들었고요.
 
쥐의 이미지가 이명박 보다는 G20의 G가 좀 더 이미지화 된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쥐가 상징하는 탐욕이나 교활함 등을 G20이라는 거대 시스템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요. 굳이 사람을 찾자면 이명박뿐만 아니라 20명의 정상을 다 쥐의 이미지로 표현해야 했죠.
 
그럼 스무 마리의 쥐가 필요한 건 아닌가요? (웃음)
 
G20이잖아요. 20마리의 g를 포함하는 거대 구조, 체계로서의 큰 G.
 
아, 큰 G요?
 
스무 개의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 그들을 다 쥐의 이미지로 포착하고 싶었던 거죠.
 
G20이 국격이라고 선전하는 포스터에 쥐 한 마리를 그림으로써 이를 웃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셨어요. 이러한 작업이 갖는 효과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포스터에 쥐를 그리는 발상은 지젝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정치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언어나 그림 등의 상징적 이미지들을 이용합니다. 지젝은 정치권력이 상징적 이미지들의 체계와 관련해 어떻게 발생되고 유지되는지를 논의해요. 나아가 정치권력을 지탱하고 있는 그러한 상징체계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무너지는가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지요. 이런 차원에서 쥐는 G20 그룹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정치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자 동시에 그러한 정치권력을 희화화하며 무너뜨리는 하나의 이미지적 총탄, 예술적 총격으로서의 의미가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 내용적 의미 외에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렸다는 행위 자체에도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러한 행위를 통해 “아, 이런 것을 해도 되는 구나”라는 생각들이 가능하게 된다는 거지요. 상상력을 정신의 차원에서 행위의 차원으로 이전하는 것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도록 촉구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겁니다. 요컨대 68혁명의 구호, 즉 ‘현실적이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처럼 실제적인 것과 가능한 것 사이의 구획선을 무너뜨리는 행위적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재현을 통한 효과뿐만 아니라 있고 행위 자체의 효과도 있다는 말씀이신데요.

 
그렇죠. 아, 이게 가능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사람들이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평을 넓혀주거든요.
 
반대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고 벌금이 부과되는 것을 보면 ‘역시 안 하는 게 낫겠다’라고 냉소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걱정이 되는 점이 그거에요. 인터넷 기사들을 봤는데, 주로 정치적인 논의나 구속수사의 부당성에 관련된 논의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논의들 보다 그래피티 예술가들이 그래피티의 가능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글들이 무척 반가웠어요. 동지를 만난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이 사건의 가장 큰 수혜자나 의미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공공미술을 하는 사람들, 포괄적으로 말해서 예술가들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 예술이 가지고 있는 정치성을 환기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고요. 나아가 제도권에 흡수되거나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던 예술가들이 다시금 거리로 나와 정치와 만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강하게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말씀드렸듯이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게,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더 겁을 먹지 않을까, “저건 구속감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더 방어적이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들어요. 물론 저는 한편으로는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어쨌거나 이를 통해서 법의 극단적인 지점이 드러나게 되었으니까요. 단순히 경범죄로 처리될만한 일이 현재 공안적 사건으로, 즉 공안적 관점에서 반국가적인 행위로 규정이 되고 일종의 상징적 테러행위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라는 거지요. 이렇게 극한을 경험했으니, 이후에는 편안하게 놀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해본다는 겁니다.
 

앞서 말씀하셨던 80년대의 운동을 보면 선전, 선동의 요소가 강하잖아요. 깃발 들고 전진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현재 진행되는 공공예술들의 특징을 보면 굉장히 소소하고 심지어는 대의를 보여주지도 않는 것 같아요.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요?

 
예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은 정치에 내재하고 있는 동일성, 대의, 합의 등 이런 경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예요. 다른 방식의 표현과 행위가 가능하다는 게 예술이 가지고 있는 힘이잖아요. 예술가들이 표현하는 ‘차이’가 어떤 정치적 대의에 동일화되거나 수단화되는 게 아니라 분산적이고 이질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통념을 깨는 게릴라적인 행위로, 예술적 저항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진행될 것 같은데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응원 메시지들이 많이 왔더라고요. 어떠셨어요?
 
꽤 많이 왔어요. 갑자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돼 버렸는데(웃음). 이번 기회에 그런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할 생각이에요. 그 중에는 정말 반가운 사람도 있어요. 토론토 G20 회의 때 시위를 조직했다가 구속되어서 지금은 가택연금 상태에 있는 활동가 한 분이 편지를 보냈거든요. 굉장히 반갑고 동지애를 느꼈어요.
 
작업은 혼자 하셨는데 연대가 생겼네요.
 
그렇죠. 그런 게 제일 큰 효과죠. 플러스 알파가 된 거죠.
 
운동 양식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대규모 파업에서 1인 시위로, 다시 그래피티 작업과 같은 퍼포먼스 형태로요.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진행될까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새삼 느낀 것이 언론의 힘인데요, 이런 행위가 실천적 성격을 갖지만 여전히 표상의 장에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에 언론이 보도를 해주지 않았다면 그 반향이 실제로 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여기에는 정치적인 행위가 매스 미디어라는 또 다른 표상의 장에 흡수될 가능성이 존재하지요. 그렇다면 매스 미디어와는 다른 자율적인 매체를 통해 이루어져야겠지요. 예컨대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봐요. 또 한편으로, 거대 언론에 의존하지 않는 예술적 상상력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또 다른 아이디어들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단초로 그쳐야 되지 계속 똑같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봐요. 예술은 반복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서, 뒤샹처럼 미술 전시회에 변기를 갖다놓고 ‘샘’이라고 하는 걸 반복하면 아무런 의미나 효과가 없는 것처럼. 그 예술에 담겨있는 의미를 파악해야지 행위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앞으로 모든 표현을 퍼포먼스로 하자는 것은 우스운 행위가 될 수밖에 없고, 다만 이 행위의 의미를 곱씹어보자는 겁니다. 이러한 행위가 법의 한계선, 그 금지선을 아주 가벼운 일상적 방식으로 무너뜨렸다는 것. 이러한 이해를 공유한다면, 이 후의 행위들은 꼭 그래피티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고 봐요.
 
예술은 반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번의 시도가 굉장히 중요하면서 동시에 어려울 수밖에 없잖아요.
 
그게 예술가들이 가진 운명이면서 동시에 위력이기도 해요. 매순간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감각이나 삶의 어떤 지점, 한계선들을 넘어설 것인가 고민해야 되고, 또 예민하게 느껴야 하거든요. 항상 민감한 촉수를 가져야 한다는 게 예술가의 고뇌이자 위대한 힘이겠죠.
 
공부하신 전공과는 상관없이 예술가로 자리매김하고 싶으신 건가요?
 
넓은 의미에서는 그래요. 예술이 좁은 의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면요. 정치적 행위 역시 넓은 의미에서 예술적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감각적인 것을 재편하는 것, 곧 볼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하는가는 정치적인 문제에 다름없기 때문이죠. 예술적인 하지만 좁은 의미의 예술이 아니라 일종의 감각학이 정치적 행위에 도입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한국사회에서 저항의 정치가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서강대에서 학생들이 G20과 관련해서 학술 토론회를 기획했는데 학교 당국에서 금지 조치를 내렸던 사건이 있었어요. 인문학을 전공한 총장이라서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그게 전력이 없는 게 아니에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박홍이 있었거든요. 당시 보수 우익의 최전선에서 활약하신 분이잖아요. 서강에 그런 전통이 없는 건 아니에요. 전통이 있는 학교에요(웃음). 졸업한 후에 서강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어느 학교보다도 빠르게 신자유주의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자유주의 이념으로 똘똘 뭉쳐서 대학의 기업화, 자본화에 앞장서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 쪽에서는 알아서 기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이에 저항하는 메세지를 던졌다는 게 대비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학생들도 이 둘 사이에서 헷갈려 하는 것 같아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뒤쳐지기 않기 위해 알아서 스펙을 관리하는 쪽이 있다면, 반대로 이로부터 배제되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멀어지는 쪽이 있을 텐데요. 이런 점에서 후배들에게 고민의 지점을 던져주신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어떤 면에서는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의식을 갖는 것이 오히려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신자유주의의 힘은 기존의 경계들을 무너트리는데 있거든요. 학생과 노동자, 대학과 기업처럼 서로 다른 단위의 체계와 경계들을 무너뜨리고 하나로 재편한다는 것. 그래서 대학은 학문의 전당, 기업은 자본의 전당이라는 통념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거든요. 학교도 하나의 상품이고 기업이라는 생각을 하잖아요. 학생의 돈을 받아서 열심히 재테크하고 부동산 투기하는 등 영리로 삼고요. 대학은 학생들을 금융 노동자 내지는 소액 투자자로 여기거든요. 지식을 이미지 상품으로 팔면서 실제로는 기업 운영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왜 학생들은 자신들을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소비자로만 생각할까요. 대학에 몸담고 있는 시간을 신자유주의 사회로 편입되기 전의 준비시간으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왜 자신들을 이 사회의 정치경제적 시스템과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는 이익 집단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대학은 신자유주의적으로 운영을 하는데 어째서 하부조직은 그 생각을 못하냐는 말이에요. 그들도 당연히 노동자로서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공부가 갖는 노동의 의미와 성격을 인식해야 돼요. 제 말은 신자유주의의 첨병이 되라는 게 아니라 자신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로 여기지 말고 역으로 이기적으로 이용하라는 말이에요.
 
학교만큼이나 신자유주의적으로 생각하면 누가 인문학을 하겠어요? 다 경제나 경영을 하지요.
 
그래피티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 강사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의문을 갖더군요. 낯설다는 거예요. 그것도 왜 40대가 그런 짓을 했을까. 그런 의아함 뒤에는 모종의 틀이 있어요. 대학 강사와 40대한테는 정치적인 예술 행위가 어울리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문계는 현실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어요.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놓여있는 현실의 논리와 메커니즘의 작동 방식에 더 예민할 수 있는 게 인문학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잖아요. 인문학은 자기 존재에 대한 반성적 규정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을 강요하거든요. 그거 빼고 인문학에 무슨 본질이 있겠어요. 그렇다면 인문학을 한다는 것이야 말로 돈을 번다는 차원을 넘어서 더욱 더 현실에 대한 개입, 참여와 뗄 수 없는 학문을 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제 행위의 의미도 그런 거예요. 경계를 허물고 상상을 동원하는 것과 현실에 개입한다는 게 다른 말이 아니에요. 현실적이라는 게 돈을 버는 것으로만 축소되어 마치 돈을 안 벌면 현실과 유리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런데 돈을 버는데 매몰되는 것이야말로 현실로부터 철저히 유리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앞으로의 공부나 활동에서 계획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일단 이 사건에 대해서 천천히 깊게 생각을 해보고 싶어요. 그렇게 제 행위의 의미를 곱씹고 이를 공부로 연결시키고 싶네요. 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낡은 통제 메커니즘이 전면화되고 확산되고 있는가를 분석해 볼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컨대 공안이라고 하는 것이 과거에는 남북 대치 상황 속에서 이념적 의미를 갖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번 사건은 이념적 성격을 갖지 않더라도 국가의 권위나 기능을 훼손하는 행위라면 얼마든지 공안화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어요. 공안의 의미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거지요. 이명박 정부 들어서 행정 자치부가 행정 안전부로 바뀌었거든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행정의 의미가 안전 일반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공안의 의미가 더 이상 이념적인 범위에 한정되지 않고 행정적 범위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네르바 사건도 일종의 공안적 사건이 되는 것이고 단순히 정부의 기능이나 명예를 훼손하는 것도 공안의 관점에서 취급되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이런 공안을 뒷받침하는 통제의 기술들인 감청, 감시 등의 확산에 대해서 공부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형성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들을 통해서 연대의 망을 구축해볼 계획이고요.

제가 혹시 놓친 부분이 있나요? 꼭 지면화하고 싶으신 말씀이라던가.
 
서강대 학생들이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나요? 6두품이라는 생각?
 
(웃음) 많죠. 서울대는 차치하고 연고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체질이에요(웃음). 그렇기 때문에 항상 경계에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양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골과 진골에 비해서 훨씬 더 권력과 부에 대한 열망에 강하게 빨려 들어가게 되는 위치이기도 하고, 반대로 아예 반골 쪽으로 갈 수 있기도 하고 말이지요. 과거 서강대에는 6두품에서 반골로 가는 경향이 좀 있었는데요.
 
반골쪽으로의 움직임은 많이 사라졌어요.
 
제발 좀 거기서 벗어나기를 바라요. 6두품에 대한 자긍심? 저는 후배들이 그런 자긍심을 가져주길 바라요. 주류를 삐딱하게 볼 수 있는 시각 말이에요. 이상하게 서강대에 예술가들이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이 자리가 참 좋은 위치에요. 경계의 위치이기도 하고요. 잠재성과 가능성의 위치라니까(버럭). 박찬욱, 문성근, 신해철을 봐요. 그 분야의 중심과는 약간 다른 선을 긋거든요. 불안정하거나 주변적인 위치라고 체념하기 보다는 긍정적인 위치로 전유했으면 좋겠어요. 저부터 그렇게 해야겠지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