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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5호] 20세기 전태일과 21세이 글로벌 리더십

임승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저자)


얼마 전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분신을 했다.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불법파견에 문제에 관한 대법원의 판결을 계기로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점거농성을 하고 있는 가운데 발생한 일이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23살 파릇파릇한 몸뚱이에 파란 불꽃을 댕긴 지 벌써 40년이 지난 20세기의 일이건만, 21세기의 전태일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저 법률을 지키라는 소박한 요구에 자신의 몸을 불사른다.

얼마 전 실업자나 구직자도 노조를 설립할 수 있다는 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이 실업자나 구직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인 것이 법적으로 정당하다는 의미다. 참 노조 만들기 힘들다. 청년들이 모여서 노조를 만드는 데 법원까지 들락날락 거려야 하니 말이다. 20세기의 전태일이 분신한지 4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21세기의 청년들은 노조라는 단어조차 생경한 채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으로 고통 받고 있다.

나라가 정말 개판이다. 똑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에 비해 절반밖에 안 되는 임금에 4대 보험은 고사하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짐승처럼 일해야 하는 비정규직이 도처에 깔려 있다. 차라리 비정규직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아예 일자리를 얻지 못해 타의에 의해 놀고 있는 청년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그 무슨 4대강을 파느니 마느니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느니 마느니 하면서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다. 정말 성질 같아서는 다 엎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대학의 죽음, 기업 맞춤형 인재 양성소

대학에서는 소위 ‘글로벌 리더’라는 용어가 난무하고 있다. 조선일보에서는 그 무슨 Global에 Green의 앞 글자를 따서 ‘G세대’ 운운 하면서 지랄염병을 하고 있다. 글로벌 리더니 G세대니 하면서 롤 모델로 내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대략 이러하다. 중학교까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갑자기 고등학교를 미국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거기서 나름 열심히 해서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한 후 전문직이나 CEO를 하면서 골프도 치고 고위 인사들과 교류도 한다. 그래, 참 잘났다. 까짓 거 성공했다고 부럽다고 대범하게 박수 쳐주자. 그런데 이 사람들이 과연 ‘리더’인가? 무슨 리더가 비정규직에 청년실업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놔두고 자기만 잘 먹고 잘 사는가? 자기 잘나서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일망정 결코 리더는 아니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을, 그것도 국제적으로 그렇게 사는 사람을 ‘글로벌 리더’라 부르면서 대학생들에게 롤 모델로 부르짖는 세상이니 대학이란 곳이 돌아가는 판도 빤하다. 한마디로 지금의 대학이라 불리는 곳은 ‘기업 맞춤형 휴머노이드 생산 공장’에 다름 아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는 불편하다. 자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부려먹기 힘들다. 그래서 기업은 소위 산학(産學)협동이라는 미명 하에 대학 공간으로 침투해서 자신이 가진 최강의 무기, 즉 돈으로 대학의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기업의 입맛에 맞는 교육을 제공하는 분야에는 넉넉하게 돈을 대 주는 반면 자신의 이윤추구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쪽은 지원을 끊는다. 그런 교육은 ‘영혼’을 만들어내는 불온한 교육이니까. 여력이 되는 기업들은 아예 대학을 통째로 접수하기도 한다. 그런 대학들에서는 다른 대학보다 훨씬 심하게 기업 맞춤형 휴머노이드 생산 공장이 되어 가고 있다.

어떤 진보적인 싱크탱크의 임원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대학생 열 명 중 한두 명이 고민하는 문제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원인이 있지만, 대학생 열 명 중 여덟아홉 명이 고민하는 문제라면 그것은 사회 구조가 문제다.”

스페인 제국주의에 맞서서 중남미 쿠바를 해방시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호세 마르티라는 분은 이런 얘기를 했다.

“게으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격이 고약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곳은 불의가 있는 곳이다.”

진짜 리더의 조건, 공동체에 대한 고민

과연 우리 청년들이 대부분이 갑자기 이전에 비해서 천성이 게으르거나 성격이 고약해져서 집단으로 힘든 상황에 빠진 것일까? 유전적으로 한 세대의 대부분의 청년들이 동시에 게으름 돌연변이 성격파탄 돌연변이가 발생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런 유전자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그런 돌연변이가 발생할 확률은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도 되지 않을 것이다.

게으르지도 않고 성격도 고약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집단으로 이런 일을 겪고 있다면 결론은 하나다. 사회가 잘못됐다. 그것도 지독하게 잘못됐다. 왜냐면 지금 상황이 너무나 지독하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잘못된 구석이 있으니까 상황이 이렇게 지독하지 않겠나. 문제가 자기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당연히 문제를 풀기 위해서도 우리의 내면보다는 외부에 있는 잘못된 부분에 메스를 대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나버린다. 나 자신의 스펙을 쌓는 데에만 치중하는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영어실력을 쌓고 남들보다 조금 더 상식을 외우고 남들보다 조금 더 학과 성적을 잘 받아서 낙타는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그 좁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나쁜 짓 빼고, 아니 가끔은 나쁜 짓 포함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살 떨리는 경쟁에서 몇몇은 살아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 했던 얘기를 뒤집어 보면 열 명중에 한두 명은 그런 문제에서 해방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되니까. 부러운 놈들. 하지만 그들이 리더일까?

진짜 리더가 필요하다. 모두가 힘들어하고 있는 잘못된 상황에서 자신만이 탈출하는 사람은 능력 있고 똑똑하고 뛰어난 사람일지는 몰라도 리더는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고통 받고 있는 그 상황의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서 그 문제를 해결 하는 데에 모두의 힘을 모아낼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리더다. 하지만 과연 스펙 쌓기와 학점 따기에만 여념이 없는, 그래서 우선은 나 혼자라도 그 아수라장을 탈출하고 보자는 분위기만 가득한 현재의 대학에서 진정한 리더가 나올 수 있을까? 영혼 없는 교육에 취해 더 성능 좋은 기업 맞춤형 휴머노이드를 목표로하는 현재의 대학에서 리더가 나올 수 있을지 진실로 의문이다.

21세기 진정한 리더, 전태일

그래서 전태일 분신 40주기에 다시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진지하게 곱씹어 보게 된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生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전태일의 1970년 8월 9일 일기에서

전태일, 그는 당시의 참혹한 노동현장에서 노동자 모두가 함께 느끼고 있는 고통과 슬픔, 울분을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모아낸 진정한 ‘리더’였다. 그는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거대한 현실에 맞부딪혀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내었다. 20세기의 전태일이 만든 그 길을 따라나선 수많은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자들의 정당을 만들었다. 하지만 21세기로 접어든 현재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광풍이 몰아친 후폭풍으로 노동자 서민의 생계는 완전히 파탄이 나고 비정규직에 청년실업에 자살률 1위의 부끄럽고 참혹한 현실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이다. 우리에게는 그 무슨 글로벌 리더가 아닌 21세기의 ‘전태일’이 필요하다. 길이 막힌 곳에서 길이 되어줄 리더,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으로 슬퍼하는 노동자와 청년학생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리더,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의지하며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친우(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 전태일의 유서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