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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115호] 그대 이름 이곳에



우리가 이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쉬운 물음이 아닙니다. 어쩌면 저마다 답이 다 다를 것 같아요. 아마도 이들을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에 따라 혹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요. 지금 대학원을 다니는 우리들에게 이들의 이름은 조금은 생소한 하지만 낯설지는 않은 애매한 이름일 것 같습니다. 박종철이나 기형도의 이름은 특히 그렇지요. 김수영도 고등학교 때 배운 시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그나마 유재하나 김광석은 음악으로 남아있기에 조금 익숙해 보입니다. 혹시 이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리운 나머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분들도 계신가요? 아, 저기 한분 계시네요. 전태일이라고요? 얼마 전이 전태일 열사 40주기였지요. 그런데 아직 처음 질문에 답을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왜 이들의 이름을 꺼냈을까요? 화두를 던집니다.
 
기억상실증 환자는 과거의 기억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도 동시에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아마도 어제의 시간이 오늘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에 기반해 내일의 전망이 가능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어제의 기억을 잊는 것은 동시에 오늘과 내일을 잃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 단순히 물리적인 기억, 즉 머릿속에 떠오르는 표상으로서의 기억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이런 기억은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게 마련이지요. 오히려 어느 순간 뒤통수를 치면서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기억, 현재의 나를 불현듯 과거와 마주하게 하는 계시적인 기억, 그리고 이 기억을 지우는 순간 미래의 자신 역시 안개에 휩싸이는 그런 기억, 아마 감이 잘 안 잡힐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일종의 깨달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부끄럽지만) 제 예를 들자면, 군대에서 처음 사격을 했을 때의 다짐, 실수로라도 사람 모양의 표적을 맞추지 않기 위해 과락을 선택했던 그 다짐이 마르고 닳도록 희석되던 즈음, 심지어 그런 다짐조차 잊고 살았던 어느 날, 예비군 훈련에서 내기 삼아 사격을 하던 자신과 마주쳤을 때, 갑자기 비의지적으로 상기된 어제의 기억으로 무릎이 꺾이던 경험이라면 감이 좀 오시나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이들의 삶이 우리의 삶에 불가분하게 기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살아냈던 시간이 우리로부터 격절되고 화석화될 때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역시 색을 잃고,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추억의 대상으로만 남게 됩니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기억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기억은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슬픔이며, 친구를 잃은 고통이며, 삶을 배반한 현재에 대한 쓰라린 채찍질입니다. 하지만 기억은 과거에서 오지 않고 현재로부터 옵니다.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마주치는 지금-여기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이며, 잊혀지고 있는 것들을 소환해 내어 현재라는 시간 속에 위치시키는 적극적 행위가 바로 기억입니다. 이는 전태일과 박종철의 삶을 사는 것이자 유재하와 김광석의 고뇌를 나누는 것이며 김수영과 기형도의 정신을 잇는 것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기억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이들의 얼굴을 모자이크로 엮습니다. 기억은 순차적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게 아니라 먼 과거부터 가까운 과거까지 뒤죽박죽 섞여 있다고 합니다. 때문에 과거의 어느 한 순간을 단절해서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고등학교 3학년 당시의 4월 20일을 기억하시나요? 과거를 기억하는 건 현재의 내가 개입한 결과이자 동시에 미래의 나를 구성하는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흑백으로 남아있는 이들의 얼굴을 어떻게 채색할지는 오롯이 우리의 몫입니다. 다만 이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용기만 있으면 됩니다.

편집장 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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