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120호] 진단과 처방-'뫎의 의학'을 향해서

 

 

 

진단과 처방 뫎의 의학을 향해서

우리는 왜 아플까서평

 

노대원 (문학평론가, 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웃음이 사라진 병원에서

 

그러나 내가 정말로 아프기 시작한 것은 늙은 간호원이 병실 앞에 내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걸어준 후, 수의(囚衣) 같은 환자복을 주었을 때였다. [] 입원한 다음날, 한 떼의 의사들이 병실로 몰려와, 겁에 질려 있는 나를 전범(戰犯) 다루듯 사납게 벽 쪽을 향하게 한 다음, 주사 바늘로 옆구리를 찔러 굉장한 양의 노르께한 액체를 빼내었고, 나는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유난히 하얀 병실 벽을 마주 바라보며 그들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약간 울고 있었다.

그리고 작업을 끝마치고 사라져가는 그 집행인들의 흰 가운에서 병실 벽처럼 차디찬 체온을 절감했다. (최인호, 견습환자,『타인의 방 』, 문학동네, 2002, 12)

 

   「견습환자(1967)는 소설가 최인호의 등단작이다. 이 단편소설은 웃음으로 상징되는 인간적인 활력과 온기를 잃어버린 현대 산업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풍자하고 있다. 특히, 사회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라는 비판적 태도는 소설의 공간을 병원으로, 주인공을 환자와 의사로 설정하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소설에서 치료의 대상은 환자가 아니라 바로 의사나 간호원 들이다. 입원환자가 된 주인공은 웃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의료진들에게 존중받아야 하는 인간이 아니라 마치 시체나 죄수 또는 사물처럼 취급당한다. 마침내 우리의 주인공은 사설 코미디언 같은 무거운 책임의식을 갖고 그들을 웃기기 위해, 환자의 위치에서 스스로 웃음의 의사가 되려 한다.

   그러면, 전혀 다른 의사를 생각해보자.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감동적인 영화, <패치 아담스>(1998)에 나오는 의사는 어떨까? 몸의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하는 유쾌한 의사말이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그런 멋진 의사를 현실에서 만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의사 개개인의 성향과 역량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려는 것은, 그래서 어설픈 의사가 되어 진단하고 처방하려는 것은, 현대의학의 어떤 빈틈, 혹은 오만과 오해가 만들어낸 한계에 대해서다.

 

진단 : “간 때문이야!” 아닐걸?

 

   정신분석학자 대리언 리더와 과학철학자인 데이비드 코필드가 함께 쓴『우리는 왜 아플까 』역시 현대의학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주로 정신신체의학 분야에서 축적된 연구 결과를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논의한다. 정신신체의학(psychosomatic medicine)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마음과 몸을 함께 다루는 의학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정신신체질병(psychosomatic illness)은 없다고 한다. “주요 질병 가운데 오직 마음의 문제 때문에 걸리는 병은 하나도 없다. 마음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질병도 없다. 결국 몸과 마음은 잠재적으로 얽혀 있다.”(16) 정신신체의학은, 기존 의학처럼 전공영역에 따라 질병을 분류해서, 몸과 마음이 상관하는 어떤 특정한 질병들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신체의학은 질병을 다루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어떤 질병이든 심신의 관계를 고려해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질병이 단지 신체의 이상만이 아니라 심리적 요인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식이 실제 의료 과정에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거나, 심지어 일부 의사들은 그 관점을 일부러 무시하기까지 한다는 데 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연세대 의대 강명신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현대의학에서는 정신이나 행동의 이상마저도 신체 부위의 이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20세기의 첫 10년간의 변화를 두고 한 말은 이렇다. “질병은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체 기관에서 일어난 일이다.”(62) 오늘날, 병원에서 개인의 삶과 개성은 고려해야 할 대상이 아닌 듯하다. 병원에서 환자의 몸이란 부분의 합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의 질병에 하나의 원인이 있다는 생각은 합리적 관점이 아니라 체계적 신념에 가깝다.”(41)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 베리 마셜은 박테리아가 위궤양을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헬리코박터 균을 마셨다. 그는 실제로 위염에 걸렸고, 노벨상을 받았다. 그러나 세계 인구 가운데 3분의 1에서 3분의 2가 위장에 헬리코박터 균을 보유하고 있지만, 모두가 위염이나 궤양에 걸리지는 않는다. 마셜은 처음에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절박한 심정으로 헬리코박터 균을 마셔버렸다고 한다. 박테리아가 병을 유발하려면 정신적으로 긴장해야 한다는 증거도 될 수 있다고, 저자들은 해석한다.

   이런 비판적 시각이나 문제의식은, 우리가 병원에서 실제로 겪고 있는 일들과 멀지 않다. 어깨와 다리가 모두 아픈 사람이 있다. 정형외과에 가서 어깨 통증에 대해 말하고 다리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순간, 의료진으로부터 진료시에는 한 가지씩만 이야기하라거나 다시 접수해서 다리에 대해 진료를 받으라는 말을 듣는다. 같은 진료 영역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정도니 다른 전공 의사들과의 협업이나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진료는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는 몸의 한 군데가 아프면 다른 부위와의 상관관계를 궁금해 한다. 이럴 때, 대체로 많은 의사들은 다른 부위와의 관계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단언하거나 환자의 의문을 가볍게 무시한다. 의사의 이런 의학적 판단은 아무리 과학적으로 정확하고 타당한 것일지라도, 환자를 한 인간이 아니라 단지 신체의 일부로, 혹은 질병의 차원으로 떨어뜨린다.

 

처방 : 대화와 내러티브, 그리고

 

   건강이란 무엇인가? 디드로는 오래 전에 말했다. “사람이 건강할 때는 몸의 어느 부분도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만약 어떤 부위가 통증을 통해 그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준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가 건강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건강이란 침묵이다. 조르주 캉길렘은 데카르트, 디드로부터 현대의 유명한 외과의사에 이르는 건강의 개념을 인용하면서 건강과 침묵을 동일시했다. 그렇다면 역으로, 건강하지 않은 상태는 침묵이 아닌 것, 즉 어떤 말하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우리는 왜 아플까 』의 저자들이나 정신신체의학에 동조하는 의사들은 아마도 그렇다고 답할 것 같다. 그들이 되풀이 강조하는 것은 잘 듣기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지만, 증상은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다. 증상은 고통을 누군가에게 인지시키고 다른 사람을 부르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성이라는 진단은 환자의 심인성 측면을 부각시키는 듯하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 말이 실제로는 개인 삶에 대한 관심을 덮어버리는 이른바 덮개개념으로 작동한다고 꼬집는다. 스트레스는 분노와 슬픔, 좌절, 그리고 우울함까지 무엇이든 설명해버린다. 현대의학은 개인이 삶을 자세히 풀어내고 이야기하는 차원을 거부한다. 스트레스라는 말은 내러티브 차원을 없애는 데 유용하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잘 듣기와 내러티브를 복원하고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정신분석과 의학의 관계를 논하면서 라캉은 이렇게 주장했다. 의학은 무엇보다 요구에 답하는 작업이다. 환자가 어떤 것을 요구하거나 불평할 때, 의사는 환자가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 라캉은 정신분석이야말로 전통 의학의 마지막 유물이라고 말했다.”(432~433)

   의학이란 대화적 실천이다. 전통의학에서는 대화가 부족한 까닭에 사람들은 점점 대화를 중시하는 대체의학과 보완의학으로 관심을 돌린다. 누구든 건강을 돌보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과 말 모두에, 즉 삶 전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난해한 한 소설가가 몸, , 맘을 한데 합쳐 쓴 이라는 조어를 이렇게 창조적으로(?) 오독해서 사용하면 어떨까 싶다.

   그러면 이 책의 저자들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의 깊이와 너비는 어디까지일까? 혹시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질병의 심인성 측면을 과도하게 부풀리면서 위축된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은 아닐까? 이들이 질병의 사회정치적 차원에 대해 제기하는 질문은 그러한 삐딱한 의혹에 대한 답변이 될 것이다. “건강은 공동체가 운영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정치적 문제다. 의학도 폴리스를 운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228)

   심장질환에서 식단과 흡연 문제는 개인과 사회 집단의 관계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1940년에 라캉은 지적했다. 최근 연구 결과에서도 실제로 경쟁적태도를 보인 사람들에게서 사망률과 같은 위험 요인이 높게 나왔다고 한다. 이에 비해 공동체를 이루어 상부상조하는 로세토 마을사람들의 심근경색 사망률은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정신신체의학의 지지자들은 환자들의 정신적, 사회적 상황에까지 관심을 둔다. 의학이 진정으로 대화적 실천이라면, 삶과 삶이 어우러지는 그 시대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서도 대화해야 하지 않을까? 그 질문은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하며 만들어나갈 새로운 내러티브의 출발점이다.

 

 

대리언 리더, 데이비드 코필드 지음,『우리는 왜 아플까』, 배성민 옮김, 동녘 사이언스(2011)

'기획'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0호] 삶을 짓는 소비  (0) 2012.04.10
[120호] 초록색 엄지(Green Thumb)와 몽상의 정치  (0) 2012.04.10
[119호] 가위 바위 보  (0) 2012.02.27
[119호] 이 세상, 마지막 휴대폰  (0) 2012.02.27
[119호] 건망증, 바닥  (0) 2012.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