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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19호] 도피성

정한아


죽은 사람도 꿈을 꿀까. 내가 물었을 때, 너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지. 창밖은 캄캄한 밤이었어. 너는 너무 많이 지쳐보였어. 온종일 차를 달려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왔지만,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았지.

너를 불편하게 할 마음으로 그런 질문을 한 건 아니었어. 나는 늘 네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지. 내가 하는 말은 대부분 너를 피곤하게 할 뿐이고 그럴 바에야 입을 다물고 있는 게 훨씬 낫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말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어. 침묵은 두 사람 사이에 감춘 것을 모두 다 드러내는 법이니까. 그것이 너와 나 사이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와 선명하게 보여줄까 봐, 두려웠어.

어린 시절 그런 동화를 본 적이 있지. 춤추기를 멈추지 못하는 빨간 구두의 소녀 이야기. 소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걸 알면서도, 춤추기를 멈출 수가 없어. 결국 소녀는 다리를 잘라내고, 구두는 미친 듯한 춤사위를 품고 멀리 사라져버리지. 나는 때때로 소녀의 남은 생에 깃든 침묵을 생각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노파가 된 소녀에게 자신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그건 아마 빨간 구두를 신고 춤을 췄던 때일 거야.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제일 비싼 값을 치른 것을 소중히 여기지. 그래, 죽음이 없다면 그 누가 삶을 사랑할 수 있겠어.
 
산등성을 얼마쯤 올랐을까. 멀리서부터 희미한 불빛이 보였어. 너는 내가 손짓한 곳을 바라보았어. 붉은색의 철문은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것처럼 입을 꽉 다물고 있었어. 문이라기보다는 막다른 벽처럼 보였지.

성문 앞에 모여든 사람들은 얼추 삼사십 명이 되어 보였어. 하나같이 꾀죄죄한 옷차림에 바싹 마른 꼬챙이 같은 인상이었지. 대개 젊은 사람들이었어. 나는 그들이 대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것인지 궁금했어. 뭐, 우리와 마찬가지겠지.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거나, 그와 함께 온 사람이거나. 인파 속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번호표를 뽑았냐고 물었어. 그는 우리에게 34라고 적인 종이를 건네주었어. 문이 열리면 그 순서대로 들어가는 거라고, 순서를 어기지 말라고 했지. “문이 언제 열리는데요?” 네 물음에 남자는 싸늘하게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쳐다보았어. “그걸 누가 알겠소?”

그는 여기 도착한 지 한 달이 넘었다고 했어. 그러더니 먹을 게 있으면 조금 달라고 말했지. 나는 남자를 노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어. 하지만 그 사이 너는 남자에게 벌써 음식을 꺼내 주었어. 남자는 순식간에 한 덩이 빵을 먹어치웠지. 나중에 빵을 남겨두지 않은 걸 후회할거라고 하자 너는 “소용없어요.” 라고 말했지. “뭐가 소용없다는 거야?” “후회해도 소용없다고요.” 너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구불구불 늘어선 줄의 끝자락에 자리를 잡았어. 성문에서는 가장 먼 곳이었지. 우리 앞에는 교복을 입은 여자애가 커다란 짐 보퉁이에 기대 잠을 자고 있었어. 제 방 침대에라도 누운 듯 편안한 모습이었어. 계집아이의 앙상한 다리는 온통 멍투성이였지. 너는 말없이 그 아이를 내려다보았어.

너를 처음 본 건 작년 가을이었지. 처음 화실에 왔을 때, 너는 회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지. 대학 입시까지 남은 2년간 미대 실기 준비를 하고 싶다고 했어. 왜 미대에 가려고 하느냐 묻자, 너는 간단히 “어쩌다 보니까요.” 라고 대답했지.

너는 성실한 학생이었어. 매일 제일 일찍 나와서 붓을 빨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그림을 그렸지. 친구도 없이 홀로 다니는 모습이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선생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겉모습이 쿨하거나, 말솜씨가 쿨해야 돼. 미대 졸업 후 곧장 화실을 열어 입시생들을 가르쳤지만, 나는 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어. 얼굴이 예쁘장하거나 말솜씨가 있었다면 좀 나았을 거야. 하지만 나는 어느 한 군데 쿨한 구석이 없었어. 늘 지나치게 심각하고, 복잡했지.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지. 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두려워했어. 늘 그 소리가 날 쫓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 그런데도 왜 선생이 된 거냐고, 언젠가 네가 물었던 적이 있지. 나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하는 대신 “어쩌다 보니까……” 라고 대답했어. 너는 조용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었어. 

 “어른이 돼도 달라지는 건 없군요.”

맞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달라질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른이 되는 거겠지. 10여년 병상에 계셨던 어머니는 간병인의 손길을 견디지 못했어. 돌처럼 굳어가는 어머니의 몸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 텅 빈 집에 돌아와서 라면을 끓여먹고, 이틀이나 긴 잠을 잤지. 다시 잠에서 깨면 뭔가 다른 일들을 해보리라고 생각했어. 이를테면 긴 여행을 떠나거나, 제빵학원에 다니거나, 살사 댄스를 배우거나 하는 일들. 하지만 그 중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았어. 그래도 달라질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 병원과 학원을 오가면서 유기한 나의 청춘이 이미 시간의 풍화 속에서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거야. 그렇지만 오해는 하지 마. 그런 종류의 스릴을 느끼기 위해서 너와 도망친 것은 아니야. 사실, 너와 도망치기 시작한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어. 사실 떠나고 싶다는 말을 먼저 한 것은 너였지.

너는 부모님이랑 자주 다투고, 매일 화실이 문을 닫을 때까지 남아서 그림을 그렸어. 부모님이 미대 진학을 반대한다고 했지. 학생들이 다 빠져나가고 텅 빈 화실에서 우리는 종종 라면을 끓여먹고, 화집을 꺼내 보고, 라디오를 들었어. 나는 네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라고만 생각했어. 너와 같이 있다가 집에 들어가면, 텅 빈 고요가 유독 견디기 힘들었지. 종종 너의 가족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 꼭 너와 닮은 사내아이가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 그것이 내 첫 번째 욕망이었어. 너와 함께 있고 싶다는 것. 그 밖에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어.

화실 여선생이 남학생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 후 정확히 보름 만에 수업을 듣던 아이들이 전부 다 빠져나갔어. 미대 재학 때부터 꾸려온 화실 문을 닫는 데는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 소문은 꽤나 악질이었어. 너의 부모님, 누나들이 직접 찾아와 이젤을 넘어뜨리고, 물통을 뒤엎고, 난동을 피웠어. 그들은 모르지. 진짜 관계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소란이 끝난 시점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네가 나를 가엾게 여기기 시작하면서부터. 너는 손이 따뜻해서, 그 손이 몸에 닿으면 어느 새 노곤한 기분이 들곤 했어.

네가 도망을 치자고 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그러자고 했지. 그래, 우리는 도망을 쳤지.

아무도 우리를 판단하고, 손가락질하지 않을 곳으로. 얼마든지 오랫동안 붙어 있어도 좋은 곳으로. 나는 트렁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쑤셔 넣었어. 겨울점퍼, 담요, 휴대용 스토브까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건지 둘 다 몰랐지. 처음 도망칠 때는 분명히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계속 도망치는 동안 점점 불확실해졌어. 그래, 우리 사이에 말로 소통할 수 있는 것들은 점점 더 줄어들었지. 하지만 도망치기로 선택한 것은 나였어. 그러니 끝까지 가보는 거라고, 침묵이 길어질 때마다 홀로 그렇게 되뇌었어.

빵을 먹으려고 할 때, 우리 앞에 쪼그리고 자던 여자애가 잠에서 깨어났어. 그 애는 반쯤 갈라진 목소리로 자기도 좀 나눠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지. 너는 망설임 없이 네 몫의 빵을 떼어 주었어. 빵을 다 먹어도 기운을 차릴 수가 없어서 우리는 자리에 나란히 누웠지. “물을 좀 마시고 싶어.” “이따가 떠올게요.”

나는 잠시 누워 하늘을 보다가, 네게 물었지. “너는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니?” “후회요? 그야 늘 후회스럽죠.” 너는 눈을 감고 있었지. 눈 위에 작은 조약돌을 올려놓고서. 나는 그 조약돌을 들여다보면서 “나와 함께 도망친 것을 후회하지 않니?” 하고 물었지. “하지 않아요.” 너는 눈을 감은 채 말했어. “선생님은 돌아가고 싶으세요?” “돌아갈 수 없어, 난.” “그럼 안 돌아가면 되죠.”

밤이 깊어지면서 별이 높이 떠올랐지. 근래 이렇게 빛나는 별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려는데, 너는 이미 잠들어 있었어. 나는 너의 눈 위에 놓인 작은 조약돌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지. 너의 꿈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저 문이 도대체 언제쯤 열릴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을 청했어.
 
정한아
2006년 제4회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는 『달의 바다』, 『나를 위해 웃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