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120호] 결혼들

 

 

 

결혼들

결혼, 에로틱한 우정에 대한 몇 가지 소고

 

양경언 (문학평론가, 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강요된 종착지로서의 결혼사랑이라는 필요조건

 

   어쩌면 당신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오해를 동반한 채 결혼이라는 말()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그 오해를 달리 표현해 사랑이라 하자. 사회가 부여한 하나의 제도로서, 혹은 삶의 필수적인 지표로서 결혼을 무리 없이 포장할 수 있는 배경이 바로 사랑이다. 하여 결혼은 연애 이후 지속가능한 사랑의 실현을 위한 진전된(?) 관계 맺기의 방식으로 논해지거니와 생애주기에서 응당 거쳐야할(?) 과정이므로 기왕이면사랑하는 사람과 맞이해야만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요컨대 결혼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는 말로 편리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니. 이만큼 정의가 불확실한 말이 또 어디 있나. 우리들의 곤궁은 결혼의 필요조건으로 거론되었던 사랑의 가능조건을 질문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을 매개하는 사랑이란 무엇을 일컫는가. 어디까지나 이성애에 국한된 것이자, 또한 이후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데에 불편이 없을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것이기도 하다. 이는 정상성을 획득한 가족 관계의 확립을 위해서 사랑을 동원해왔던 그동안의 사정을 눈치 채게 한다. 한마디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선택했다고 여기기에는, 그에 개입하는 사회적인 맥락들이 너무나 많아 이 선택이 과연 자연스러운 생의 과정의 일부인지 의심하게 한다는 것이다. ‘결혼에 대한 논의에서 유달리 사랑이란 말을 강조했던 의도가 무엇이었겠나. 아마 사랑에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그를 가능케 하는 조건들에 대한 요구가 팽창하고 있음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서구사적으로 봤을 때에도 결혼은 성욕을 관리하고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또한 사회적인 재생산을 담당하기 위한 방편으로 진행되던 것이었다. 오히려 사랑을 위한 결혼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다. 이 과정을 통해 부권의 창출을 위한 섹슈얼리티의 관리와 젠더 역할의 고정화가 유지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다른 결혼은 가능한가?’라고 질문했을 때, 이 질문이 간과하고 있는 두 가지를 짚어낼 수 있어야겠다. 첫째, ‘결혼이라는 관문이 인생에서 반드시 도달해야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 ‘결혼그 자체의 당위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치열하게 질문할 수 있는가. 혹은 질문하기에 대한 시도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둘째, ‘다른 결혼이라는 표현이 젠더 역학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사랑의 문법을 창안해내는 데에 종래에는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으며, 그 때 사랑은 어떤 관계로 실현 가능한가. 그 관계는 굳이 결혼이라는 표현을 빌려와야만 설명이 가능한 것인가. 최근 비혼(非婚)’을 고민하고, 제도 밖의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해 고민을 하는 이들이 이전에 비해 가시화되는 일련의 과정은 어쩌면 결혼에 대한 진지한 성찰 및 논쟁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경보일지도 모른다. 관련된 성찰 및 논쟁이 아예 없었단 말이 아니라, 더욱 정치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다. 경제적인 이유나 정서적인 안정 등 다양한 이유로 파트너와 함께 삶을 꾸려나갈 것을 선택한 이들에게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결혼이 전형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강요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한 부담감(?)을 갖는 이들의 고민이나 결혼이 아닌 다른 형태를 실험하고 있는 이들의 생활이 그 자신들의 삶을 가벼이 여기기 때문에 유동적인 관계와 역할을 수용하는 것은 아님에도, ‘어른들이 보기에 이들은 결혼이 제공하는 안락한 측면을 거부하는, 상대적으로 자유를 선호하는 이들로 비춰지기도 한다. 일부 사람들의 결혼이 아니면 안된다는 고정관념과 한편 다양한 관계의 가능성이 결혼이라고 묶이는 순간 차단될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어떤 이들의 고정관념 사이에서 결혼에 대한 담론은 위태롭게 길항하고 있다. 사이, 창궐하는 것은 결혼을 하기 위해 수행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연애 각본에 대한 이야기(가령 프로포즈를 하지 않는 남성은 죄악시 되거나, 혹은 연애하기에 적합한 여성과 결혼하기에 적합한 여성은 따로 있다는 방식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사이트들이며, 또한 결혼정보회사, 결혼식을 올리는 데에 복무하는 각종 업체(예식장, 웨딩촬영업체, 신혼여행 담당 업체 등)가 내놓는 패키지 상품들, 당사자들이 원치 않는다 해도 부모의 체면 때문이라며 진행되는 막대한 비용의 결혼식이다.

   사랑의 실현 방식 중 선택할 수 있는 하나로 결혼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식의 애매한 문장을 긍정하기에는, 한국 사회에서 이 결혼이라는 말과 결혼을 매개하는 사랑이라는 말은 확실히 너무 많은 겹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결혼이라는 방식과 그 관계에 대한 질문은 우리의 삶에서 정상성의 규범으로 용인 받는 관계에 대한 질문과 다름 아니다. 결혼의 정상성에 대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을 때, 결혼은 사랑의 불변하는 종착지로 기능한다.

 

결혼을 질문하기, ‘사랑을 재고하기

 

   한국이 아닌 사회에서 다른 결혼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을까.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결혼, 에로틱한 우정은 프랑스 사회에서 결혼이 수반하는 문제와 그에 대한 대안을 나름대로 강구한 책이다. 브뤼크네르는 프랑스 사회가 현재 사랑과 결혼을 혼동한 나머지 결혼을 길들이고 사랑을 마음껏 풀어놓는 바람에, 사람들이 결혼은 덜 하고 이혼은 더 많이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저자의 문제의식은 결혼이 명백히 필요하다고 전제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결혼자체의 당위를 질문해야 하는 한국 사회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입장이다.

   프랑스 정부는 1999년에 팍스(PACS)’라는 공동생활약정을 법안으로 채택해, 18세 이상의 동거인들에게 결혼하지 않고도 법적 부부가 누리는 사회적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주고 있다. 팍스는 구속력이 강한 결혼과 자유로운 동거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동성애자 커플에게도 같은 효력을 발휘한다. 제도 밖 형태의 가족은 가족으로 조차 인정받지도 못할 뿐 아니라 한부모가정에 대한 사회적 배려 및 인식이 아직도 낮은 수준에 불과한 한국의 실정과 비교해 보았을 때, 프랑스 사회는 한 단계 진일보한 차원의 복지 수준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저자가 불안해하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법적으로 동거가 자유롭게 허용되고, 이혼 절차 역시도 간소화되어 있는 프랑스 사회는 사람들이 제도로부터 중압감을 덜 받는 대신에, 개인이 관계에서 지녀야 할 책임감을 점점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사랑의 변덕스러움만을 추구할 때 결국 파편화된 관계만이 상처처럼 남고 말 것임을 걱정한다. 프랑스 사회에서의 결혼이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보다 확장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임을 이해한다면, 브뤼크네르가 주장하는 바에 따라 이혼이 남발(?)’하는 프랑스 사회에서 결혼이란 말의 격상은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사랑이 전지전능하다고 믿고 결혼에 뛰어든 자들이 사랑에 대해 겪는 실망감을 파혼 혹은 이혼, 관계의 절단으로 표현한다는 데에 있다. 프랑스 사회에서 사랑은 결혼의 필요조건이자 동시에 쉽게 결혼을 끝낼 수 있는 가능조건으로도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다른 결혼이란 (이미 결혼그 자체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제도적으로 실행되고 있으므로)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된 열정에 속지 않는 관계를 일컫는다. 어찌 보면 추상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사뭇 진지하게 당부한다. 서로 세심하게 배려하며 각자의 일에도 열정을 다 할 것, 사랑의 경계를 뛰어넘어 우정 어린 관용, 상호 존중 등의 다양한 시도를 포괄하는 부부관계를 창조할 것. 감정의 문제를 너무 간편히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결혼을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은 결혼까지의 서사 뿐 만이 아니라 결혼이후의 서사 역시도 다양하게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설명으로 읽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서로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관계란 두 사람의 공동 세계를 구축하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는 관계이자 동시에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된 관계이다. 이 같이 저자가 제시한 다른 결혼의 상은, 가족 형태의 다양성을 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 한창 진행 중인데다가 여전히 젠더 역할의 고정화가 분명한 한국 사회가 실현하기에는 멀고도 어려운 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다른 결혼에 대해서 상상하기도 힘든 현실에 있는 우리들이 야기할 수 있는 미래상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요구되는 것은 결혼이라는 자장으로 조직할 수 있는 공동체 상의 다양성이자 동시에 사랑의 문법을 계속해서 발명해낼 수 있는 능동성이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그를 위해 풀어야 할 숙제는 산더미다. 하지만 용어의 규범적 의미에 엎드려 절할 필요가 없다고 저자도 말했듯, ‘결혼만을 꼭 해답으로 국한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결혼이란 말 자체의 폐기 혹은 존속에 대한 논쟁을 위해서는 더 욱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혹은 거부가, 불편함에 대한 표시가 필요하다. 이는 당연하게 여기는 삶의 조건에 대해서 그것이 왜 당연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결혼, 에로틱한 우정』, 이혜원 옮김, 뮤진트리(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