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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121호] 프랑스 대선과 그리스 총선 그리고 유럽의 향방

프랑스 대선과 그리스 총선 그리고 유럽의 향방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의장)

 

56일 전 세계의 눈길이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로 향했다. 그런데 같은 날 유럽의 다른 곳에서 프랑스 대선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선거가 실시되었다. 바로 그리스 총선이다. 프랑스에서는 중도좌파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을 누르고 결선투표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그리스에서는 그간 5%대 지지율에 그쳤던 급진좌파인 급진좌파연합(SYRIZA)이 제2당으로 부상해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사건 모두 경제 위기에 휩싸인 유럽의 미래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의문이 든다. 과연 정권 교체만으로 재정 위기가 해결의 조짐을 보일 수 있을까? 좌파가 집권한다고 해서 기존 우파 정권들과는 다른 획기적인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까? 만약 유로존 위기에 대한 좌파의 대안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리 좌파, 아니 급진좌파가 집권한다 해도 세상이 크게 달라질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 과연 유럽 좌파들은 그러한 대안을 준비하고 있는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로중앙은행 앞에서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좌파의 대안 : ‘유럽-활용/변형론

좌파의 대안은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뉜다. 하나는 유로존을 유지하면서 유럽연합의 제도적 틀을 활용해 위기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다(‘유럽-활용/변형).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재정 위기 국가들(대개 유로존 내 주변부 국가들)을 통화 연합이라는 올가미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유로존에서 탈퇴하고 더 나아가 통화 연합 자체를 해체시키자는 제안이다(‘유럽-탈출/해체). 이번에 집권한 프랑스 사회당이 바로 유럽-활용/변형론 입장에 서 있다. 프랑스 사회당의 노장 미셸 로카르 등 유럽 중도좌파의 거물들이 공동 서명하여 작년 7월에 발표한 제안이 새 사회당 정부의 입장을 예시해준다고 볼 수 있다. 서명자들 중 경제 이론가인 영국 출신 스튜어트 홀랜드는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서 채권 발행을 통한 전 유럽 차원의 재정 확대 방안을 제시한다. 홀랜드는 1930년대 대공황 때 미국 연방정부가 수행한 역할을 유럽연합 기구들이 떠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럽 차원의 재정 확대를 통해 위기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종류의 유럽연합 채권 발행을 통해 가능하다.

하나는 연합 채권(Union Bonds)’이다. 연합 채권은 시장 매매용이 아니라 회원국 채무를 유럽연합 차원으로 이전하기 위한 수단이다. 유럽 안정성장협정(SGP)이 정한 국가 채무한도인 GDP 60% 수준을 넘어선 국채를 모두 연합 채권으로 전환해 유럽중앙은행(ECB)이나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으로 이전하자는 것이다. 연합 채권은 물론 기존 채권에 비해 저리로 책정될 것이며,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각 국 채무의 SGP 초과분을 유럽연합 기구로 이전함으로써 이제 더 이상 국제신용평가기관이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수단은 유로 채권(Eurobonds)’이다. 유로 채권 역시 ECB 같은 유럽연합 기구가 발행한다. 이것은 시장 매매용으로서, 중국 등의 신흥국 중앙은행이나 국부 펀드가 구매할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유럽연합은 이 채권 발행 수익을 모두 전 유럽적인 경기 부양책에 투입한다. 홀랜드는 특히 보건, 교육, 도시 재생, 환경, 녹색 기술, 중소기업 지원 등에 집중 투자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중국 등 신흥국들은 유로화 붕괴를 막아서 국제 통화 질서의 다원성을 유지할 수 있으니 좋고(달리 말하면, 달러 패권을 약화시킬 수 있어서 좋고), 유럽 국가들은 현 위기를 극복할 2의 마셜 플랜을 추진할 수 있어서 좋으니, 실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 홀랜드의 논지다.

하지만 이 대안에는 결정적 장애물이 존재한다. 바로 독일이다. 지금까지 독일 정부는 독일 납세자들의 추가 부담 그리고 자국 국제 수지의 변동을 동반한 어떠한 해결책도 거부해왔다. 이것이 이제까지 독일 메르켈 정부가 프랑스의 협력을 얻어 긴축, 자유화 그리고 사유화의 삼위일체정식을 재정 위기 국가들에 강요한 근거이기도 했다.

 

좌파의 대안 : ‘유럽-탈출/해체론

이 때문에 좌파의 또 다른 일각에서는 유럽-탈출/해체론이 점점 더 관심을 끌고 있다. 다른 어느 곳보다도 위기의 현장인 그리스 등지에서 그렇다. 실제로 이러한 대안을 가장 앞서서, 가장 정연하게 발전시키고 있는 것은 코스타스 라파비차스(런던대학 동양-아프리카스쿨 교수) 같은 그리스 출신 경제학자들이다. 이들은 재정 위기국 정부(물론 좌파 집권을 전제로)가 능동적으로 채무 불이행을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고 나서 국가 채무에 대한 국제적 감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 국채의 막대한 부분은 채권 은행들이 그리스가 SGP의 국가 채무 한도를 넘어섰음을 알면서도 대출한 시장 실패의 소산이다. 또한 그리스 국내법 조항을 어기며 발행된 채권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상당한 규모의 채무 탕감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반드시 동반되어야 할 것이 유로존 탈피다. 라파비차스 등은 그리스가 유로화를 버리고 자국 통화인 드라크마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국제적 선례도 존재한다.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에 미국 달러화에 페소화를 고정시켰다가 21세기 벽두에 치명적인 경제 위기에 빠졌다. 네스토르 키르치너의 좌파 페론주의 정부는 페소화의 통화 주권을 회복한 뒤 평가 절하와 외채 재조정을 통해 경제를 회복시켰다. ‘유럽-탈피/해체론자들은 그리스 역시 자국 통화로 돌아가 평가 절하를 단행해서 채무 부담을 줄이고 국내 산업을 육성해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과정에서 일정 기간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 어떤 혼란도 현재 유럽연합과 IMF가 그리스에 강요하는 긴축 정책보다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며 그 고통도 덜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최소화하고 역사 발전의 계기로 반전시키기 위해서 위기국 정부는 채무 불이행 선언, 유로존 탈퇴와 함께 노동 중심의 구조개혁을 병행해야 한다. 은행을 국유화하고 제조업을 집중 육성하며 기업 활동 및 경제 정책 결정에 대한 노동자와 시민사회의 참여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결국 그리스를 비롯한 위기국들의 이러한 선택은 현재의 유럽 통화 연합의 해체로 이어질 것이다. 유럽 내의 새로운 사회 세력 관계에 바탕을 두고 국제 연대 노력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이러한 해법이 아르헨티나 모델이라 불리며 급진좌파 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그리스 공산당이 유로존 탈퇴 입장을 당론으로 확정했고, 급진좌파연합 내에서도 일부 분파가 이를 지지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지난 5월의 총선 이후 가장 주목받는 정당이 바로 급진좌파연합이다. 위에 소개한 그리스 경제학자 라파비차스도 이 당에 희망을 걸고 있다. 지난 선거에서 불과 4.6%를 얻었던 이 당은 이번에 16.78%를 득표했다. 1974년생인 이 당의 젊은 대표 알렉시스 치프라스의 표현대로 평화적 혁명에 준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급진좌파연합 내에도 상당수 분파가 채무 불이행-유로존 탈퇴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당론은 재협상 요구 이후에 상황에 따라 유로존 탈퇴 가능성을 고려하는 게 맞다는 쪽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독일을 비롯한 유럽연합 엘리트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위협이다. 실제로 지금 치프라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유럽 금융 시장을 요동시키고 있다. 5월 총선 뒤에 연립정부 협상 과정에서 치프라스는 연정을 함께 구성하는 데 필요한 5대 조건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첫째, 연금, 임금 삭감 등 그리스인들을 빈곤으로 몰아넣고 있는 모든 조치들의 즉각적인 철폐.

           둘째, 노사 단체협상 파기 등 노동자의 권리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모든 조치들의 즉각적인 철폐.

           셋째, 의원 면책 특권의 즉각적인 철폐 그리고 최대 득표 정당에게 50석을 추가로 몰아주는 현행 선거법 개혁.

           넷째, 그리스 은행들에 대한 감사 및 그 결과의 공표. (사실상의 국유화 전단계 조치)

              다섯째, 그리스 국채에 대해 국제적으로 감사하고 그 감사 결과를 공표하기 전까지는 모든 채무에 대해 모라토리움을 선언할 것.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며

이는 유럽연합 엘리트들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고, 그리스 내 기성 정당들도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조건들이다. 그래서 연정 구성은 실패로 끝났고, 그리스는 6월 현재 제2차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급진좌파연합을 통해 세계를 향해 외친 그리스 민중의 목소리는 이미 분명하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 세계 기득권 세력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스 유권자들이 이런 상황을 목격하고 다시 실시되는 6월 총선에서는 어쩌면 반긴축 좌파 세력의 지지도가 더욱 높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돼서 만약 제2차 총선 이후 급진좌파연합이 주도하는 연정이 들어선다면, 그리스 새 정부와 유럽중앙은행-유럽연합-IMF 사이의 구제금융 조건 재협상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재협상 과정의 긴장과 충돌로 인해 결국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다. ‘유럽-활용/변형론이든 유럽-탈출/해체론이든 모두 이미 몇몇 명망가나 학자의 주장을 넘어서 현실 정치의 의제로 올라와 있다. 물론 아직은 둘 모두에게 시간이 열려 있다. 하지만 새 프랑스 정부의 유럽-활용/변형시나리오가 잘 작동할지의 여부가 유럽-탈출/해체론이 최후의 대안으로 채택될지의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함수 관계는 존재한다. 이 점에서 좀 더 다급한 쪽은 유럽-활용/변형론이고, 아마도 그 여유 시간은 1-2년을 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