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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22호] 바보는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하다

 

 

인터뷰 및 정리 김아영

 


“오늘날 60억 인류는 미토콘드리아의 세포질 유전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생로병사의 답을 찾는 신성불가침 영역을 스스럼 없이 이야기 하는 <콩고, 콩고>의 저자 배상민(36). SF라는 장르 때문이었을까.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너무도 긴 여행을 선보이는 그의 책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소설은 당대를 반영하는 유산이라 했던가. 다행히도 작가는 자신의 글을 통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을비에 젖는 추석을 앞둔 지난 9월 28일 곤자가 플라자에서 그를 만났다.


 

 

인류 진화의 발생이 콩고라고 주장하는 <콩고, 콩고>는 서기 1만년을 무대로 막을 여는 SF 소설. 이야기는 크게 네 가지 구조로 진행된다. 만년 후 고고학자 이야기, 현재의 ‘담’과 ‘부’의 이야기, ‘율’과 관련한 병원이야기, 마지막으로 의사와 담의 취조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담’과 ‘부’, 그리고 ‘율’이 다 무엇이냐고? 이들은 다름 아닌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다. 먼저 ‘부’와 ‘담’의 이름은 최초의 인류라는 의미를 가진 아담과 이브에서 차용했다. ‘율’은 규칙과 관련된 인물이라 ‘율’이라고 칭했는데, 붙이고 보니 어감이 괜찮았다. 소설에서는 스스로 진화된 인류라고 믿는 ‘부’와 ‘담’이 이야기를 주도해나간다. ‘부’는 유서 깊은 사창가 집안에서 태어난 똑똑한 여자아이. 한편 침팬지보다 못한 IQ 78의 대두 ‘담’은 미혼모의 아들이다. 창녀의 딸이기에, 바보이기에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는 ‘담’과 ‘부’는 합심하여 세상을 ‘왕따’시킨다. 소외된 이들의 입장에 서서 현실에 대해 과감히 맞서는 소설, <콩고, 콩고>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다. 한 번 읽어보시라.)

 

<콩고, 콩고> 소설 이름이 특이하네요. 연거푸 발음하면 할수록 말맛이 귀여운데요, 뜻이 궁금합니다.

“인류의 기원은 아프리카 기원설이 정설이죠. 네이버와 네셔널지오그래픽에 의하면 콩고라는 땅에서 인류가 지속적으로 탄생한다고 해요. 아프리카에서 인간의 프로토타입들이 등장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최종적으로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출현했다고 하거든요. 어찌 보면 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땅이 콩고가 아닐까 해서 이름을 콩고로 지었어요. 오늘날 전 세계 60억 인류는 한 명의 어머니에게 수렴이 되고, 이러한 미토콘드리아 모계 유전이 시작된 최초의 무대도 콩고가 아닐까 하고요.

 

펑키음악처럼, 진지한 이야기도 진지하지 않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책을 쓰셨나요? 소설의 분위기가 평범하지는 않던데요. 이를테면 구성 방식이라든지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소설의 기술 방식에서 볼 때, 진지한 이야기를 진지하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 ‘한국문학이 갖고 있는 진지함에 대한 동경 말하기를 굳이 나까지 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거든요. 사실 한국문학에 나오는 인간들은 늘 패배하는 사람들이에요. 저는 패배하는 사람들이 아닌, 끝까지 세상에 맞붙는 인간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제 작품을 문학이라고 범주화 시킬 수는 없겠지만 기존에 있는 것을 뭔가 다르게 써보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펑크음악 같은 느낌의 글을 써보고 싶었던 거죠.

 

혹자의 신랄한 비평을 본 바 있습니다. 남성 작가가 웃긴 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개그 본능 혹은 로망이 아니냐는 내용이었는데요.
작가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글을 쓴 게 아니기 때문에 딱히 웃겨보고 싶진 않았어요. 아마 펑크음악과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는 것과도 연결되는 이야기일 텐데요. 지금은 ‘달파란’이란 이름으로 영화음악을 하고 있는 강기영씨가 제가 대학교 1학년 시절 ‘삐삐밴드’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때 그 음반에 정말 매료됐던 기억이 있어요. 음악 자체는 가볍고 신나는 반면 가사 내용은 너무도 심오하고 해석의 여지도 많았거든요. 저는 시를 쓰듯이, 그렇지만 너무 폼 잡지 않은 채, 또 다른 우리 시대를 이야기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 소설이 펑크음악 가사 같은 그런 심오함 때문에 대중들에게 외면을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콩고, 콩고>와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쓰다 보면 비문도 많아지고 말로 재간을 부려야 해서 힘이 들긴 합니다. 다 쓰고 나면 너무 유치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저도 이제부터는 남들처럼 진지한 문체로 써야겠다 싶어요. 예를 들면 박민규씨도 처음엔 굉장히 웃기는 글들을 썼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진지 모드로 돌아가는 것을 봤어요. 그도 약간은 제가 느꼈던, 그런 괴로움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입니다.

 

소설은 당대를 반영하는 알레고리어야

 

<콩고, 콩고>는 픽션입니다. 그렇지만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사실 ‘읽기’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허구도 실제 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저는 모든 역사소설이 어떤 알레고리를 따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당대를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이거든요. 사실 현재를 반영하지 않는 소설은 의미가 없다고 봐요. 마찬가지로 미래를 그리는 것 또한 지금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현실을 어떤 식으로 반영할 것인가 하는 거예요. 저는 특히 고고학자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구조적으로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담’과 ‘부’는 세상 가운데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그들이 겪고 있는 현재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담’과 ‘부’의 시대적 현실을 더욱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현재를 반영하되, 구조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시간을 만 년 정도 벌려놓았던 것입니다.

 

그 구조적인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소설에서 등장하는 병원도 구조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한 알레고리들 중 하나에요. 병원을 통해 사회구조적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요, 이를테면 우리 사회의 압축적인 단면과 약간의 이상향들을 병원 안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저는 아주 오랜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는데요(배상민씨는 현재 우리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1학기 신입생이다), 요즘 생활하다 보면 느끼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 가장 크게 느끼는 부분은, 서로 손잡는 것에 너무 인색하다는 거예요.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개인화를 부추기고 있거든요. 그런 것들의 핵심은 바로 연대를 떨어뜨려 놓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홀로 서 있는 인간은 다루기가 쉽다는 게 함정이죠. 95학번인 저의 대학생활을 돌이켜보면, 그땐 서로 뭉쳐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학생들은 학교에 너무 쉽게 굴복하는 것 같아요. 등록금이 올라도 제대로 된 시위 한 번 못하는 것이죠. 뭉쳐있는 개인은 구조의 지배자들에게 대항하기가 쉬운데, 홀로 존재하는 개인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구조적인 이야기의 일례라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인간을 자꾸만 개인화시키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손을 잡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그냥 보여주면 너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저는 소설 속에서 정신병동을 빌려왔어요. 의사가 ‘담’이라는 주인공을 계속해서 심문해 나가는데 그 과정이 ‘담’의 기억 속에서 2000년대의 과거와 자꾸 맞물리거든요. 만년 후 로제타스톤이 인류를 지배하는 정체를 드러내는 과정과도 연관이 되고요. 만년 후 세상, 현재 병원의 세상, 그리고 담과 부가 나왔던 세상, 이렇게 세 개의 브릿지를 이용해 ‘담’의 기억 속의 과정을 넣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가장 화두가 되는 키워드는 아무래도 대선인데요. 서민복지, 빈부격차, 양극화를 기반으로 보수와 진보담론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콩고, 콩고>는 마치 ‘모두가 잘 사는 사회’라는 이상과는 반대되는 현실을 블랙코미디로 풍자하는 내용 같습니다.


 

이것 역시 개인화와 연관 지어 설명할 수 있는데요. 대선에서 복지보다 더 근본적이고도 시급한 문제는 바로 개인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거예요. 사실 우리는 잘나지 않았거든요. 내가 잘났다는 것은 한정된 사회 내에서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아 와야 하는 구조임에 틀림없어요. 이런 일들은 전지구적으로 봐도 그렇고요. 결국 극단적인 개인화의 흐름이 복지에 대한 요구로 수렴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복지에 대한 요구와 열망들은 아래에서부터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철수나 문재인, 박근혜와 같은 대선후보 개개인을 영웅화시켜서 그들이 마치 우리를 구원해 줄 것 같은 메시아적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지난 2002년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통해 메시아를 만들려 했잖아요? 그런데 결국 메시아 스스로가 목숨을 끊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결국 인간은 개인 자신이 허약하다는 건 알지만, 서로 손을 잡고 같이 갈 생각 대신 메시아를 통해 구원받으려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올해 대통령이 누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당선자가 집권 기간 동안 강한 의지를 가지고 일을 한다면 국민들이 원하는 복지를 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과 같이, 또 다시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당선된다면 그 복지는 언젠가 공중분해 될 수 있어요. 실제 지난 10년 동안 이뤄놓았던 복지가 날아가는 것을 목격했잖아요.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곧 국민들 개개인이 허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하고요. 따라서 우리가 복지를 열망하고 고민하기 이전에 인간 개개인은 허약한 존재라는 것을 미리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게 됐을 때는 복지나 메시아로 투항하려 하지 말고, 서로 손을 잡고 스스로 일어나야 하는 게 아닐까요?

 

세상에 바란다, 바보가 많아졌으면

 

갑자기 바보 담론으로 화제가 전환됐다. 그가 생각하는 바보에 대한 조작적 정의는 이렇다. “바보는 자기 스스로 손해를 본다는 이미지가 굉장히 강합니다. 자신의 것이지만 자기 것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들을 말하죠.” 우리가 흔히 누군가에게 무엇을 달라고 요구했을 때, 가진 것을 순진하게 내어 주는 상대를 보며 “어허, 쟤 진짜 바보네” 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누가 뒤통수를 때려도 실실 웃는 인간들, 그리고 그런 모욕을 감수하려는 인간들도 역시 바보의 범주에 해당된다. 아무래도 그는 바보 아닌 바보의 이야기를 하려는 듯 보였다.
 
책의 맨 뒷부분에 나와 있는 ‘작가의 말’을 보니 바보 이야기가 나오던데요. 그 바보 이야기 좀 해주세요.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덤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바보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들이 바보 같아지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불합리한 구조가 존재해야합니다. 자신의 희생을 각오한 사람들만이, 즉 분노한 사람들만이 자기의 모든 것을 던져 저항하려고 하거든요. 이를테면 안중근 혹은 윤봉길 의사와 같은 사람도 어찌 보면 바보인 거죠. 죽을 줄 뻔히 알고 자신만의 길을 가기 때문이에요. 결국 불합리한 사회구조가 이 같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듭니다. 결국 이들이 똑똑한 바보이기도 하고요. 소설 속에서는 ‘부’가 똑똑한 바보고, ‘담’은 그냥 바보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현 정치인들 중 바보 같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솔직히 얘기하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끝으로 바보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봐요. 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가야만 해요. 가는 게 좋은 거고요. 그런 바보가 계속 만들어진다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극악하다는 얘기거든요. 누군가를 두고 바보라고 말 할 때에는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보고 판단해야 하거든요. 지금 안철수 원장이 부상하고 있지만, 그 분의 인생을 보면 바보짓을 한 건 별로 없어요. 성공을 위해 달려왔던 사람이고요. 그런데 성공한 사람치고 양심적이라는 겁니다. 박근혜 후보 역시 좋은 배경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무언가를 한 적은 없잖아요. 기득권으로 살아왔으니까요. 이를테면 자기 목숨을 내 놓는 다든지, 자기 전 재산을 털어 나눠줬다든지 하는 똑똑한 바보, 그런 바보가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는 시대는 이제 지나간 것 같아요. 그냥 바보들이 똑똑한 바보를 따라가는 시대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진보 성향의 인사들만 바보의 범주에 해당되는 것 같은데요?

저는 진보가 정의롭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봐요. 진보는 기존의 틀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몸부림이고, 그건 기본적으로 이기심의 발로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보통 ‘진보는 정의롭고 가난하다’ 이런 식으로 틀을 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강남사람이 진보적이면 이상한 사람 아냐 라고 생각하잖아요. 아니, 강남에서 잘 사는 게이라고 하더라도 진보적일 수 있지 않나요. 자기의 권리가 억압되니까요. 결국 진보를 정의나 바보와 같은 선상에 두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진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사
 
오백만 년 후를 예상하며 내 놓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 속에는 인간 대신 문어가 등장한다. 문어의 시대를 예고하며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였다. 똑똑한 문어가 등장해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듯, 인간 역시 똑똑해지거나 바보가 될 수 있으며, 이런 것이 자연의 올바른 선택이 아닐까 한다는 것. 이런 그의 관심사는 바로 진화와 역사다.


 

책에서 DNA와 같은 단어도 등장하던데요. 유전자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유전자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는데 진화에는 관심이 많아요. 저는 진화가 퇴화를 포함한다고 생각해요. 진화는 결국 선택과 집중이잖아요. 잘 하는 건 키우고 못 하는 건 없애는 것, 환경에 적합하게 맞추는 것이 진화죠.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은 환경에 대한 관심까지는 아니지만, 인간이 뇌를 발달시키는 쪽으로 선택과 집중을 하다 보니 너무 똑똑해졌다는 거에요. 그래서 다른 생물들을 못살게 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거든요. 예전에 <지구가 멈추는 날>이라는 할리우드 B급 영화를 보던 중 저승사자 같은 키아누리브스가 나타나 이렇게 이야기 하던 게 기억이 납니다. “나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왔다. 그런데 지구를 구하려면 인간을 제거해야 한다.” 우와, 그 통찰이 정말 멋있어요. ‘그렇다, 지구를 구하는 방법은 인간을 다 없애는 것이구나. 그러면 다른 생물들이 살아날 것이고, 대기는 깨끗해질 것이며 오존층의 구멍은 다 메워지겠지. 인간만 없으면 생태계는 다 회복될거야’ 하는 생각을 했죠. 어쩌면 그 생각의 연장선일 수도 있는데요, 자연이 강제적으로 인간의 머리를 퇴화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화는 자연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거니까요. 지금까지 인간이 계속 똑똑해지는 방법으로 진화해왔다면 어느 순간에는 다시 원점으로 내려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렵네요. 그렇다면 역사에 대한 얘기도 해 주세요.


저는 이야기로서의 역사를 좋아합니다. 이야기가 있으니 역사가 있는 것이고요. 각본에 없는 드라마니까 더 좋고요. 저는 주로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데요, 왜냐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거든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군신화, 또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일화나 고사를 보면 정말 신기해요. 무려 몇 천 년 전의 일을 다 알고 있는 거잖아요. 강태공도 무려 삼천년 전 사람이고, 예수님도 이천 년 전 사람인데 그들이 당시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게 신기한 거죠. 아마도 만년 뒤에 현재를 본다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기준에서 만 년 전을 보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았을 수도 있어요. 그 땐 정치라든가 교육, 교통에 대한 별다른 문제가 없이, 그냥 친구들끼리 모여 살았으니까요. 자식을 낳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크는 것이고요.
 
혹시 초자연적인 현상에도 관심이 많으신가요?

네. ‘귀신이 있는가 없는가?’ 이런 거 있잖아요. 귀신이 없으면 세상이 재미없을 것 같아요. 공포 영화도 다 없어질 거고요. 귀신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런데 외계인은 별로입니다. 우리보다 너무 똑똑한 애들이 있다면 좀 불안해지지 않을까요? 그냥 적당히 바보스런 외계인도 있어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너무 똑똑해서 UFO 타고 날아오는 이런 외계인을 원하지는 않아요.
 
상민씨는 언제나 자신의 삶을 외부와 연동시켜 왔다고 말한다. 80년대가 바깥세상을 반영하는 외부 과잉의 글쓰기 시대였다면, 현 시대에는 자신을 내부로 끌어안는 독백체 글쓰기들이 많아졌다는 것. 그런 그가 다음 작품의 소재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용산사태이다. 어마어마한 공권력의 집행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다 한들, 이와 같은 상황에 반응하는 글쓰기를 별로 본 적이 없다는 통탄에서 출발한다. 논문도, 다른 어디에서도 성찰하지 않는 무관심이 우리 개인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자기 침잠의 글 대신 가치 있는 글을 써라
 
글을 쓰고 싶어 하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 합니다.


가치가 있는 것들을 썼으면 좋겠어요. 뭔가 주절주절 이야기하고 싶다면 그냥 일기를 쓰면 되거든요. 굳이 일기 수준의 글을 가지고 남의 시간과 돈을 요구해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남이 읽기 원하는 글이라면 ‘남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고 글을 썼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요즘 문제는 저자가 자신의 내부를 너무 깊게 파고들어가는 글들이 많다는 거예요. 얼마 전 학부생들 글을 봤는데 자기 침잠의 세계에 대한 글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물론 그런 자기반성이나 자기성찰이 필요해요. 그런데 제가 답답함을 느끼는 건,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구조의 지배자들이 다루기에 굉장히 좋은 시스템이죠. “난 아프고 힘들고 실업자야” 자꾸 이렇게만 이야기 한다면 나아지는 게 없어요. 그럴 땐 남 탓을 좀 해야죠. 바꿔달라고 요구해야 해요. 그렇게 하려면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고요. 특히 어릴 때 혼자서 외로웠단 얘기가 엄청나게 많은데요. 지금도 ‘나는 방황 중’인 친구들이 한 25%, 50%는 ‘어릴 때 외로웠음’, 그래서 지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친구가 2명 있었어요. 그런 것들은 그냥 일기에 쓰면 되죠. 주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들과 자신을 비교해보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지는 글쓰기를 했으면 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유식한 말에 대한 양해를 구하며 이태리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이야기를 꺼냈다. “용산 사태에서 실제 망루에 있었던 사람들은 호모사케르나 다름없어요. 물도 끊고, 전기도 끊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막았잖아요. 그들에게도 선거권이 있다지만, 법적·정치적 인간으로 인정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사태를 국가가 방조하고 있는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호모사케르가 존재한다고 보는 겁니다.” 포털사이트 지식인의 힘을 빌리거나 평론가의 글을 참고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배상민씨. 그에게는 작가라는 자의식보다 문필가의 능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그가 과연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 사회에 나설지 궁금하다.

 

 

* 호모 사케르란 고대 로마에서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는 형벌을 받은 죄인들을 가리키던 용어이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사형을 당하지는 않지만, 시민으로서의 법적인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는 지극히 단순한 생명체이다. 극단적인 경우 누군가 호모 사케르를 살해한다 해도 살인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그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속에도 호모사케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용산은 바로 이런 사건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 존재하기에 그는 요즘 용산에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