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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122호] PIETA 자비를 베푸소서...

PIETA 자비를 베푸소서...

*영화 ‘피에타’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음.

 

 

김하늘 기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부인 ‘돈’과 인간존중의 보편적 가치, 

우리 사회는 무엇을 우위에 두고 있는가.

 

중국의 사상가 양계초는 백성의 의무로써 ‘공덕’을 요구했다. 공덕은 개인의 영역을 벗어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행위를 하도록 하는 덕을 말한다. ‘내 것 지키기’에 바쁜 세상에서 양계초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개인으로서 이루는 것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사회를 위해 하는 일들이 과연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한 최선인가. 진정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조차 드러낼 여력도 없이 이 사회의 구석에 매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밤으로의 긴 여로’의 작가 유진 오닐은 아내에게 보내는 헌사에 자신의 작품을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극’이라고 했다.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의 묵직한 여운을 잊지 못한다. 장르와 시대를 불문하고 그 가치를 인정할 만한 작품은 인간이든 사회든 본연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허영과 착각에서 벗어나 세상의 잔혹함과 자신의 한계를 똑바로 마주해야만 나올 수 있는 일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이미 많은 예술가들이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작가의 고통이 그대로 녹아있는 자전적 작품은 보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다. 김기덕 감독의 그것도 그랬다. 그는 자신의 아픈 과거를 모티브로 여러 영화를 만들어 냈고, 자신이 목격하고 경험한 사회의 현실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요즘 들어 ‘사회적인 것(The Social)’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는데 김기덕 감독은 영화로써 '사회적인 것'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우리가 외면하고 싶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사회가 어떤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쩌면 이성적인 이해를 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감정노동이 어찌나 심했던지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도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봤다가는 그 후유증을 감당하기 어렵다. 마치 네오레알리즘 기법의 영화들이 단 한 컷의 미화도 없이, 너무도 사실적인 나머지 그 먹먹함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의 거친 영상과 감정 흐름의 방식은 그 어떤 비교도 거부하며 그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철저히 ‘돈’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단 한번도 ‘돈’이라는 소재를 소홀히 하지 않은 채 모든 이야기를 풀어간다. “돈이 뭐예요?”라는 물음에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지.”라고 대답하는 미선과 강도의 대화는 이 영화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개발 전의 청계 상가를 배경으로 그리고 있어 장면 중간 중간 지속적으로 흐르는 기계음은 ‘돈’이라는 소재와 어우러져 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그 어떤 감정도 없이 목적만을 위해 가동되는 기계의 무자비함은 인간을 불구로 만들기 위한 행위에도 어김없이 작동하고, 한 때 사람들의 생계 수단이던 기계는 그들의 피와 살점을 집어 삼키고 나서야 가동을 멈춘다. 돈 때문에 불구가 된 채무자들, 빚을 갚지 못하는 영세 상인들을 불구로 만들어 보험금을 갈취하는 사채추심업자 강도의 인생은 이것이 단지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님을 잔인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단 한번이라도 맘껏 돈을 써보려고 빌린 거라며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는 남자와 “죽으면 보험처리가 복잡해집니다.”라고 말하는 강도의 대사는 지금 누구나 편히 쉬고 즐기는 공간인 청계천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이 존재했음을 알리는 동시에 이 사회가 중요시해야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한 사람의 인생이 돈 300만원의 가치를 넘어서지 못하는 영화 속 현실과 자본주의 혜택을 받는 화려하고 편리한 생활 간의 극명한 차이는 우리가 잊고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이 작품이 더욱 절망적이고 안타까웠던 이유는 강도는 단 한순간도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희망도, 절망도 없다. 당장의 현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한과 분노만 남은 그의 모습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저주조차 하지 않는다. 악마 같던 강도는 처음에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에게 분노하지만 곧 연약한 아이처럼 어머니에게 집착한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던 자’에서 ‘지킬 것이 생긴 자’가 된 후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과거에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어머니에게 보복이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미선이 강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기 전 강도가 너무 불쌍하다고 오열하는 장면과 어머니만은 살려달라며 자기가 대신 죽겠다고 무릎을 꿇고 울부짖는 모습은 관객에게 이것이 단순히 개인의 비극으로 축소될 수 있는 일인가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그러나 자기가 어머니라고 믿고 있던 사람이 복수를 위해 나타났음을 알고 나서도 죽은 자가 입고 있던 스웨터를 입고 함께 누워있는 강도의 평온해 보이는 모습은 차라리 희망적이라고 볼 수 있다. 장면은 처절하지만 절망적인 세상에 ‘사랑’이라는 희망이 존재함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아가페적인 모성을 보여주지만 모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그것을 틀에 박힌 형식이 아닌 반전과 함께 비틀어 표현한 김기덕의 연출법도 놀랍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철갑을 두른 사람은 없다. 아무리 악한 인간도 사랑을 알게 되면 아이처럼 유순한 사람이 된다. 자신이 불구로 만든 사람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고 끔찍할 정도로 참회의 죽음을 택하는 그의 모습은 이것이 단 한 사람의 비극이 아닌, 돈이 깡패인 세상에서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한번쯤은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피에타’는 김기덕 혼자만의 소재가 아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각각 다른 스타일의 피에타를 표현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예수와 성모마리아 얼굴이 아닌, 마치 엄마의 품에서 잠든 아이 같은 표정으로 죽은 예수의 얼굴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과 다르다. 이런 면에서 김기덕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 영화 포스터에서 조민수(엄마 역)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듯한 이정진(강도 역)의 얼굴도 이러한 모티브를 받은 듯 보인다. 그의 얼굴에서는 고통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이 모든 고통과 절망을 끝냈다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작품의 사연이 궁금해야 하는 것은 모든 예술가들이 가져야 할 지향점이라는 점에서 김기덕은 멋지게 성공했다. 역사 속 예술가들과 함께 시대에 길이 남을 또 하나의 피에타를 창조해낸 것이다.

 

김기덕 감독은 이 영화로 칸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국제 영화제로 손꼽히는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국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천재성을 인정받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이전에도 김기덕 감독의 천재성은 알려졌지만, 흥행영화를 만들어야만 인정을 받는 세상에서 관객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듯한 거친 영화는 조금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긴 영화감독이 되었다.


그의 영화를 ‘훌륭하다’, 혹은 ‘형편 없다’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의 영화가 세계적인 영화제의 최고상을 받아서가 아니다. 그의 영화는 관객의 입장에서 한 순간도 편한 장면이 없을 정도로 보기 불편한 영화임에 분명하다. 엔터테인먼트적 성격 없이, 관객과 타협하지 않는 그의 스타일은 앞으로도 흥행을 유도하기에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과, 비극적이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회의 단편을 이렇게 용기 있게 그려낼 수 있는 영화감독이 또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대답할 자신이 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흥행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흥행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좋을 만큼의 거장이 되었다. 그가 또 어떤 영화로 이 시대의 아픔을 끄집어낼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내오레알리즘: 네오리얼리즘이라고도 말하는 네오레알리즘은 2차 세계대전 전후 사실주의를 추구했던 이탈리아 영화의 경향이다. 파시스트 정권 하 예술적인 억압에 대항하면서 형성된 영화 운동으로 전문 배우와 아울러 비전문 배우들이 연기하는 보통 사람들, 일상적인 사회 문제와 에피소드 등을 담담한 영상과 편집으로 표현하는 기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