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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2호] 사회적인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범주

사회적인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범주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현대 산업사회가 출현한 이래로 사회적 연대가 위협 받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긴 하지만, 마치 작용-반작용의 법칙처럼, 유대가 어려워질수록 타인과의 정서적 유대를 열망하는 대중적 욕구는 더욱 강해지는 듯하다. 이렇게 관계성을 통해 지금의 다차원적 삶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는 대중적 상상의 중심에 바로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있다. 최근 대선의 핵심 의제가 여야 가릴 것 없이 경제 민주화로 귀결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라 볼 수 없다. 그동안 사회로부터 탈착근화되었던(dis-embedded) 경제를 그들 각각의 맥락으로 재착근화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회과학적 지식-담론의 세계에선 사회적 경제 같은 담론이 부상하고 이와 관련하여 (때로는 무관하게) 사회적 자본 개념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이 현실화된 사회책임투자, 사회책임경영, 사회적 기업, 마이크로-크레딧, 공정 무역, 윤리적 소비 같은 새로운 경제적 관행들은 비교적 낯익은 풍경이 되고 있다. 명시적, -명시적으로 사회적이라는 접두어가 유행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적인 것의 일반적 특성

 

그렇다면 이 사회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론적으로 학자들마다 그리고 논의의 맥락에 따라 사회적인 것은 그 위상이나 초점이 각양각색이다. 사회적인 것은 어떤 때에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이중적인 기대 구조(루만)로서, 또 어떤 때에는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보드리야르)로서, 또 다른 때에는 시민사회나 전체사회가 가지는 속성으로서 언급되곤 한다. 이는 상대적 용어로서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 몇몇 논자들에 의해 정의 내려지고 비교적 잘 통용되는 데 비하자면 징후적인 현상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사회과학에서 그동안 언급되어 왔던 사회적이라는 형용사의 용법을 정리해보면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분류가 가능하다. 첫째로는 원리적 속성을 나타내는 사회적인 것이 있다. 예컨대 우리가 소셜 네트워크라 했을 때의 사회적인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때 사회적인 것은 개인들 사이의 연결 원리를 묘사하는 표현이 된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크다는 맥락에서 사용되곤 하는 뒤르켐의 ‘sui generis’ 역시 사회적인 것을 원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했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는 실체적 속성을 나타내는 사회적인 것이 있다. 이것은 종종 ‘social’(사회적인) 말고 ‘societal’(사회체적인)로 대체 가능한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혹은 사회 붕괴 현상이라 할 때 사회적인 것은 단순히 집합적인 차원을 넘어 어떤 외재적 실체를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GemeinschaftGesellschaft 같은 개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럴 경우 사회적인 것은 공동체와 같이 어떤 몸체를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셋째로는 규범적 속성을 나타내는 사회적인 것이 있다. 사회적이라는 말은 종종 시민사회적 특성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예컨대 사회 운동이나 세계 사회 포럼같은 표현에는 국가나 시장 그리고 정치나 경제와는 다른 (시민)사회를 수호하고자 하는 윤리적 의미가 들어 있다. 이러한 규범적 속성이 앞선 실체적 속성과 다른 점은 사회적인 것’ = ‘윤리적인 것’ =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는 모종의 등치관계를 형성하고 따라서 가치 판단에 있어 어떤 도덕적 우위를 함유한다는 데 있다.

 

사회적인 것의 탄생

 

그러나 사회적인 것을 사회 자체만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어떤 불편함이 따르게 된다. 역사적인 견지에서 봤을 때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상상과 표상은 정치나 경제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 대다수는 사회를 정치나 경제와 별개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관습에 익숙해졌지만, 그러한 구분은 분석적인 차원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서 사회는 정치와 관계 맺는 한에서만 사회였고 마찬가지로 경제와 관계 맺는 한에서만 사회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명제에서 사회적이란 말이 고대 그리스에선 이미 정치적이란 뜻을 함유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사회적인 것이 정치경제학의 탄생에 부응 또는 대응하여 공적이고 정치적인 장으로 난입한 사적이고 경제적인 요구로서 맥락화됐다는 사실 등은 사회적인 것이 결코 사회 그 자체로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님을 방증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회적인 것을 이해할 때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렌즈가 필수적임을 절감하게 된다. 원리, 실체, 규범 등 어떤 특징을 갖고 있든지 간에 사회적인 것이 현실의 어떠한 맥락 속에 배치되어 어떠한 효과를 수반하는지를 봐야 한다는 제안인 셈이다. 우선, 사회적인 것이 탄생하던 19세기 유럽에서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요구를 순치하고자 했던 일군의 자유주의적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와 다르다는 의미에서 종종 새 자유주의 혹은 사회적 자유주의라고 일컫는 이러한 태도는, 노동의 권리를 노동에 대한 권리로 전위시키면서 사실상 노동 착취를 합리화하고 제도화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장기 수익성을 보전하)고자 하는 시도로 연결되었다. 프랑스의 제3공화정과 영국의 페이비언주의 등이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또는 사회적 국가가 비로소 출현함을 알리는 전조들이었다.

 

사회적인 것에 관한 두 번째 쟁점은 이러한 사회 보장 체계가 민족적인 한에서만 성립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부르주아 지배 질서는 인민 주권이라는 트로이 목마덕분에 다수의 피지배자들을 체계 내로 포섭해야 하는 정치체의 딜레마를 안고 있다. 이 포섭의 과정에서 정치적경제적상징적 배제의 분할선이 자국민과 외국인 사이로 재배치되기에 이르렀다. 시민권 없이 인권을 보장 받을 수 없는 현대 민주주의 체제를 감안하자면, 사회 보장과 국적(, 민족성)이라는 쟁점은 사회적인 것의 탄생이 우리가 관습적으로 기념하는 것과는 다르게 언제나 또 다른 배제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역사였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쟁점

 

19세기 말 자본주의가 사회적인 것을 통해 위기를 관리했던 방식은 최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위기에 일정 정도 기시감으로서 작용한다. 그동안 우리는 사회적인 것의 위기와 종말을 우려해왔지만 그와 동시에 이전과는 다른 맥락에서 재부흥하는 현상들을 목도하게 된다. 정치권에서는 빅 소사이어티나 공정사회 같은 말들이 나오고, 경제 분야에선 사회적 책임 같은 쟁점들이 의제화되고 있으며,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협동조합이나 윤리적 소비 등이 새로운 삶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신자유주의적 축적과 통치에 대응하는 방식이란 점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 피지배계급의 적개심을 축소시키고 규범적 균형을 내세운다는 점은 19세기 말 당시 상황과 기묘한 형식적 상동성을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사회적인 것은 그 관념 자체가 무엇을 가리키든 간에 역사적 조건 속에서는 이데올로기 범주에 해당하게 된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란 항상 피지배자들의 상상의 특유한 보편화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사회적인 것이란 관념이 하나의 이데올로기 구성체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인 것은 종종 네트워크, 지속가능성, 공정성, 친밀성 같은 거부할 수 없는 덕목들을 동반하고(규범적 교리), 사회자본론 같은 지식에서 시작하여 자원봉사활동 같은 관행에 이르며(담론적이데올로기적 장치), 계급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일련의 자율적 행위 체계를 이루고 있다(내면화된 신념).

 

다만 21세기의 현실은 19~20세기의 사회적인 것을 통한 위기관리와 눈에 띄게 다른 점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장기수익성의 달성과 정치적인 것의 전위 그리고 배제의 새로운 분할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반복될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과거와 같이 그 중심이 국가에 소재할 조짐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국가는 중요하지만 오늘날 사회적인 것의 부흥에는 시장과 시민사회의 주도적 역할이 돋보인다. 달리 말해 위기관리의 주체가 다원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럼으로써 우리가 하나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는 점에 있다. 이론적 아나키즘의 추세 속에서 시장과 시민사회의 비중은 더욱 강화될 소지가 있다. 여기서 최악의 시나리오란 이런 것이다. 사회적인 것의 보장이 국적을 통해 이뤄졌던 과거와 달리, 시장의 측면에서는 경제활동인구(나 더더욱 최악의 경우에는 투자자)를 중심으로, 그리고 시민사회의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민주적 참여가 용이한 중간계급 등을 중심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최상의 시나리오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장밋빛 미래에 대한 조증을 극복하고 최소한 그 모든 불가능성의 조건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사회적인 것 그 자체로는 해답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