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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123호] 내면의 교류에 목마른 우리에게 내려진 단비

내면의 교류에 목마른 우리에게 내려진 단비

 

김하늘 기자

혁명가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쫓기는 신세에서도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로 말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는 이 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는데, 그것이 영화의 제작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혁명이나 좌익과는 거리가 먼, 아쉬울 것 전혀 없이 잘 나가는 영화감독인 그에게 트로츠키의 말이 그의 마음에 어떤 혁명의 불씨를 당겼던 것일까.

 

# 가벼움과 무거움

 

요즘 세상은 가벼움에 지배당하고 있는 듯하다. 무거움 혹은 진중함과 양립하지 않는 가벼움은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연약하고 무의미하다. 문화적인 자극을 위해 개봉 영화들의 이국적이고 화려한 배경과 현란한 그래픽에 눈을 뺏기다 보면 어느새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이 끝나있다.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영상을 뽐내는 영화의 홍수 속에서도 우리는 갈증을 떨치기 힘들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의 아무 생각 없이 취하는 휴식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선택의 폭이 차고 넘치지만, 문화적인 자극을 바라는 영화팬들에게 생기는 갈증은 고질병이 되어 버렸다.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대립쌍은 모든 대립들 중에서 가장 신비스럽고 타의적이다"라고 말했다. 이 세상이 양분법적 대립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에 반대하여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완벽한 분류는 무의미할 뿐 아니라 우리 삶은 그 두 가지를 다 필요로 하고 있다고 보았다. 베니니의 영화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비율을 알맞게 버무린 영화이다. 극대화된 슬픔을 보여주는 것은 눈물도, 오열도 아닌 웃음이었다. 그는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우리나라에서 개봉한지 벌써 10년도 넘은 영화이다. 그 세월이면 잊혀질만도 한데 몇 번을 보아도 새로운 대사를 음미하게 되는 '볼 때마다 새로운 영화'이다. 유쾌함의 극치를 보이는 주옥같은 대사의 향연과 대조되는 시대적 배경은 비극적이고 암울하다. 베니니는 이탈리아인들에게도 가슴 아픈 역사인 홀로코스트를 자신의 필름에 담아냈다.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번제’를 뜻하지만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은 이 말을 ‘유태인 대학살’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만들어 버렸다. ‘민족의 수난’으로 치자면 우리나라도 빠지지 않지만 유태인에 비견할 만큼은 아니었다. 유태인은 숫자가 적고 그들의 나라조차 갖고 있지 않음에도 미국이나 유럽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유태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다. ‘베니스의 상인’의 악랄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으로 대변되기도 하고, 세계인의 책장에서 여전히 지혜의 상징으로 꼽히는 ‘탈무드’의 지혜를 가진 민족이기도 하다가,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답답하고 이기적인 민족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등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민족이기도 하다. 현재는 시오니즘을 실현하기 위한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세계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언론과 재계를 좌지우지하고 있기도 한 엄청난 저력을 가진 민족이기도 하다. 그들의 존재감 때문일까. 우리 역사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악랄한 범죄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일어났다. 홀로코스트는 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로부터 시작해 가장 최근 개봉작인 '사라의 열쇠', '소피의 선택' 등 유태인 말살정책을 다룬 영화는 많지만 베니니가 그린 홀로코스트의 비극에는 단지 슬픔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들과는 다르다.

 

이탈리아식 유머를 통해 베니니의 개성을 한껏 뽐낸 ‘인생은 아름다워’는 1930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한창일 때이지만 따뜻하고 푸르른 시골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평화로운 배경과는 대조적으로 주인공의 등장은 처음부터 어수선하기만 하다. 어떤 영화인지 전혀 모르고 본다면 이러한 어수선함에 적응이 되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내심을 조금만 가지면 ‘마시멜로 이야기’처럼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아껴 두었던 마시멜로를 맛보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 Buon giorno, principessa! (안녕하세요, 공주님!)

 

홀로코스트에 의해 희생된 한 가족의 이야기는 “Buon giorno, principessa! (안녕하세요, 공주님!)이라는 한 마디로 시작된다. 레스토랑 웨이터인 귀도와 초등학교 선생님인 도라는 언뜻 보기에도 잘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지만 귀도는 적극적이고 끈질긴 구애 끝에 도라의 관심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여러 번의 우연한 만남에서 귀도는 도라와 마주칠 때마다 “안녕하세요, 공주님!” 을 외친다. 그의 진실한 마음을 느낀 도라는 귀도의 마음을 받아 들여 조수아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초반부를 귀도와 도라의 사랑 이야기로만 알고 넘어가면 섭섭하다. 가진 것은 없지만 당당하고 위트가 넘치는 귀도라는 인물에 주목해 본다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탈리아의 생활양식과 파시스트에 대한 베니니의 풍자는 귀도라는 인물을 통해 재현된다. 귀도는 상류층들을 자기 마음대로 비웃고 있는 듯하지만 정작 그는 그런데는 관심조차 없는 순박하고 유쾌한 인물이다. 또한 영화 곳곳에서 지금까지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베니니식의 정치관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례를 보자면 도시로 상경해 숙부를 찾은 귀도는 숙부가 젊은이 몇의 행패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쫓아버리지 그랬냐는 귀도의 말에 숙부는 "침묵만큼 큰 저항은 없다"고 조용히 대답한다. 베니니는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이런 방식으로 나타냈을지 모를 일이다. 귀도가 도라를 만나기 위해 학교에 찾아가 로마에서 온 장학사 흉내를 내는 장면은 마치 코미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흥미롭다. 이탈리아인의 우월함을 아이들 앞에서 설명하라는 교장 선생의 다소 파쇼적 발언에 귀도는 천연덕스럽게 웃통을 벗고 순수 혈통 아리아인의 '배꼽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영화 중간중간 펼쳐지는 언어유희와 역설적인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은 이 영화의 깨알 같은 재미를 더해준다. 또한 베니니는 영화 곳곳에서 민족적 ‘우월감’을 갖는 것을 경계하고 있지만 이탈리아인들의 민족적 ‘자부심’을 드러내는데는 주저하지 않는 듯 보인다. '이탈리아인으로서'로 시작하는 수 많은 대사들과 관공서나 학교 등 어디를 가나 가장 훌륭한 장식처럼 걸려진 삼색기(Tri colore)가 그렇다.

 

# 유태인과 개는 출입금지

 

운명의 여신은 행복한 자를 질투한다 했던가. 도라가 다른 남자와 약혼식을 하는 날 누군가 숙부의 말에 ‘유태인의 말’이라고 써 놓은 것에서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귀도는 그런 일에 전혀 개의치 않고 ‘유태인의 말’을 타고 개선장군처럼 도라를 원치 않는 삶으로부터 구해낸다. 우여곡절 끝에 아들 조수아를 낳고 조그만 서점도 차려 꿈을 현실로 실현시켰지만 그 행복도 잠시, 이탈리아에도 홀로코스트의 어두운 그림자가 덮치기 시작한다. ‘유태인과 개는 출입금지’ 표시가 붙은 상점이 점점 늘어나고, 귀도가 차린 조그만 서점에도 ‘유태인의 가게’라는 글귀가 붙어 모든 책을 반값에 팔아도 손님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도라의 어머니로부터 결혼을 인정받고 조수아의 생일이기도 한 날, 어머니와 함께 외출했다가 돌아온 도라는 남편과 아들이 수용소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갔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도라는 유태인이 아님에도 남편과 아들을 따라 같은 기차에 몸을 싣는다.


한편 수용소에 도착한 귀도는 조수아에게 생일 이벤트로 오랫동안 계획한 게임이라고 말하며 안심시킨다. 호기심 어린 조수아의 눈과 아들에게 끊임없이 우스갯소리를 하는 귀도 주위로 비통함과 절망에 잠긴 사람들의 얼굴이 교차된다. 결국 귀도는 죽는 순간까지도 아들이 이 비극적인 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수아를 즐겁게 해줘 조수아는 끝까지 이 상황이 진짜 게임을 하는 상황이라 믿는다. 독일이 패망하고 수용소에 정적만 남았을 때, 조수아가 자신의 은신처에서 나오자 진짜 탱크가 조수아를 향해 다가온다. 조수아는 탱크를 타고 1등의 기쁨을 누리고 엄마와 재회한다. 그리고 성인이 된 조수아의 '이것이 자신의 이야기'라는 나레이션과 함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영화에서는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도 우연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베니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데 일상의 특징들을 이용한다. 도라 역시 이런 에피소드를 겪으며 이 우연들이 마치 귀도와의 필연이라 여기게 된다.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에피소드들은 영화의 동화 같은 면을 부각시킨다. 혹자는 홀로코스트라는 무거운 주제를 너무 희화화한 것이 아니냐고 말 할지 모른다. 하지만 베니니는 그만의 스타일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충분히 상기시켜주고 있으며,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극단의 상황에 처해있는 인간을 ‘절망’이라는 시각만으로 조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깬 부분일 것이다.

 

 # 베니니식 혁명

 

지난 2011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원작자 루비노 로미오 살모니가 세상을 떠났다.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살아남은 유태인은 극소수에 불과한데, 역사의 증인들은 이제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져 가고 있다. 부끄러운 역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잊기 보다는 자주 끄집어 내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빠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잊혀져 간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인에게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는 측면에서 베니니의 영화는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극을 희극적으로 연출하겠다던 야심찬 시도, 어둡고 암울한 블랙유머가 아닌 유쾌한 농담처럼 파시스트들을 조롱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블랙 유머는 인간 존재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전제로 해 어둡고 무거운 어조를 지녔다는 특징이 있지만 그의 유머는 어둡지 않다. 오히려 아무런 악의가 없어 보이는 농담들처럼 느껴져 조소나 풍자한 장면을 보려면 영화를 다시 한 번 돌려 보며 일일이 찾아봐야 할 지경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뼈가 없어 보이는 유머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이나 세태에 좌절하지 않고 절대 굴하지 않는, 심각한 일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는 강인한 인간을 나타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는 깐느 영화제에서 특별대상 수상과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우리나라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극장에 개봉했을 당시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입소문만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사랑하고, 홀로코스트의 아픔을 가슴으로 함께 느꼈다.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는 이탈리아 영화 천재의 역작이라는 찬사와 채플린의 아류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는 판단은 잠시 미뤄두고 웃다가 울다가 정신없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