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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128호]공부는 사랑의 정치다 / Corée Spécial 공부란 무엇인가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4호에 처음 게재되었던 것으로, 잡지사 측의 허락을 얻어 이곳에 발췌, 수록한 것임을 밝혀 둔다.

 

[칼럼] 공부는 사랑의 정치다

Corée Spécial 공부란 무엇인가

 

조정환 _ 도서출판 갈무리 공동 대표

 

 

우리에게 '공부'만큼 분열적 의미를 갖는 단어도 드물다. 대개의 사람들이 공부에 대해 갖는 일차적 이미지는 '끔찍함'이다. 어째서 이런 이미지가 공부라는 단어를 지배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공부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강제의 과정은 태내에서 시작해 유치원·초등학교·중등학교로, 대학교에서 직장 교육으로, 다시 재교육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마치 빚을 갚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빚쟁이처럼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공부는 처음부터 끝까지가 억지다. 그래서 지겹고 끔찍하고 싫다.

그런데 이 끔찍함의 이미지에 이상하게도 '부러움'의 이미지가 뒤따른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나의 비교 대상이 되고 따라야 할 모범이 된다. 그에게 주어지는 영광·권위·보상이 클수록 공부하기는 내게 더욱 절박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애써 공부를 해보려 하지만 그것이 절박할수록 그 끔찍함은 더욱 커진다. 우리는 공부와 관련해 부러움과 끔찍함 사이에서 찢어져 있다. 그것은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정말로 하기 싫은 것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것이 공부다.

 

대체 누가 우리에게 이 끔찍한 공부를 강제하는가? 우리는 왜 공부 잘하는 이를 부러워하는가? 공부를 해야만 '좋은' 성적을 얻어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스펙을 쌓아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공부를 해야 실패자가 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경쟁은 저 끔찍함을 받아들이게 하는 사회적 조건이다. 부러움은 우리 자신을 자발적으로 강제하도록 만드는 심리다. 각자는 한편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한편에서는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쟁취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공부를 한다. 비록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아닐지라도 생존과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므로 공부를 한다. 책에 쓰인 것을 두뇌에 강제로 주입하고, 교사의 가르침을 신체에 강제로 기입한다. 그리하여 책, 교사, 부모, 성직자, 지식인, 최고경영자(CEO)가 말한 것에 순응한다. 공부를 통해 나는 사회에 적응한다. 나는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된다. 주지하다시피, 그 사회는 소수의 권력자와 자본가가 다수의 노동하는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본주의 사회다. 나는 자본주의가 왕성하게 돌아갈 수 있는 노동의 생피를 나날이 제공함으로써만 성공한 사람 '위너'가 된다.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 사람 '루저'가 되어 사회의 밑바닥으로 밀려났다가 삶의 세계 바깥으로 추방당한다. 공부하라! 그러면 보상받겠지만 끔찍할 것이다. 공부하지 말라! 그러면 덜 힘들겠지만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사교육과 공교육으로 이뤄지는 제도화된 공부는 본질적으로 자본의 이익을 위해,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해, 이윤과 이자와 지대의 취득을 위해 구축되고 또 그것들을 위해 가동되는 공정이다. 양계장의 닭들이 양계업자에게 알과 살코기를 제공하기 위해 모이를 먹고 호흡하고 배설하는 등 생명활동을 하듯이, 제도화된 공부 공정에서 사람들은 오직 자본가에게 잉여가치를 제공하기 위해 읽고 듣고 말하고 쓴다. 양계장의 닭이 느끼는 허기와 포만, 맛과 향내가 모두 양계업자의 이윤을 위한 장치이듯이, 사람들이 공부의 과정에서 느끼는 기쁨·슬픔·희망·낙담은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이윤을 위한 장치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이전의 자본주의와 차이가 있다면, 훈육적 공부 과정을 마친 사람들의 노동력을 이용한 이전의 자본주의와 달리, 공부 과정 그 자체까지 잉여가치 창출의 메커니즘 속에 끌어들였다는 점일 것이다. 대학은 이제 노동자를 생산하는 공장일 뿐만 아니라 채무노예, 즉 빚쟁이를 생산하는 공장이기도 하다.

 

자본을 위해 강제되는 공부이고, 결국 강제노동을 위해 사용될 공부라는 점이 공부의 저 끔찍함을 생산한다. 자본주의적 강제노동이 중층의 위계를, 보상의 사다리를 갖는다는 점이 공부에 대한 부러움을 생산한다. 사회연대성을 파괴하고 스펙에 따라 이뤄지는 신자유주의적 임금체제는 이 부러움과 끔찍함을, 그 분열을 극단화한다. 자본주의적 공부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들 각자에게는 공포스럽고 공허한 것이다. 우리의 학교들이 양계장이나 양돈장처럼 살풍경한 폭력 현장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부는 이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보이지 않는 것을 응시해야 하고, 숨겨진 장소를 찾아야 한다. 한자에서 '工夫'는 큰()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그 노력은 도구()를 사용해 막힌 것을 뚫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요컨대 공부는 주어진 것에 대항하면서 그것을 뚫고 넘어서는 투쟁이다. 공부를 의미하는 라틴어 'Studiare''열심'을 의미하는데, 그 열심은 밀고 찌르고 두드리고 때리는(Steup) 열심을 의미한다. 한자에서와 유사하게 그것은 현실의 문제를 타개해나가는 투쟁의 강렬함을 가리킨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공부는 주어진 현실을 타개하면서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정립해나가는 인간 진화의 내적 추동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인간 내재적인 이 열심의 노력으로서 공부를 '노동'으로, '학업'(學業)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에 강제노동의 굴레를 채우고 공부의 진화적이고 혁명적인 에너지를 억압한다. 학업에는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과 답이 있다. 그것은 잉여가치를 증식시킨다. '잉여가치를 증식시키는 데 더 크게 기여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학업으로서의 공부에 이미 주어진 문제다.

 

공부의 이런 구조 속에서 인간은 자본의 노예일 것을 지속적으로 강요받는다. 이 구조에서 벗어나 공부의 숨겨진 의미를 회복하려면 이것과는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억압하고 숨기는 것을 드러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잉여가치화의 틀을 뒤집어 그 포획망을 뚫고 도주하는 것이다. '잉여가치화'의 문제틀을 '자유화'의 문제틀로 역전시키는 것이다. 자본되기의 반복 과정을 인간되기의 영구 과정으로 변형하는 것이다.

 

책과 언어는 공부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여러 도구 중 하나일 뿐이다. 잉여가치화의 제도는 우리 사회 속에 편재하는 그물망이다. 그것은 교과서나 신문·방송, 법률 등으로 나타날 때는 언어 속에 새겨지지만, 일상의 습관으로, 몸의 자세로, (공장·학교·군대·관공서·병원·교회·백화점·법원·은행·증권거래소 등과 같은) 기관들과 조직으로 육화돼 있다. 이 다양하고 다층적인 제도를 바꾸는 것으로서의 공부는 언어와 책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없다. 다른 언어를 획득하는 것만큼이나, 다른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 다른 몸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며 '우리'를 다르게 조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요컨대, 사회적 삶 전체를 다르게 조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공부는 인류학적 변형의 노동이다.

 

나의 공부 과정에 대해 생각해본다. 잘 훈육된 '모범생'으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한 이후부터 제도공부와의 불화가 시작됐다. 대학 교육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실로 아무것도 없다. 삶의 원기를 준 것은 연이은 학사경고로 복종을 강요하는 대학이 아니라, 그 밖에서의 우정·사랑·글쓰기였다. 공식 대학원 과정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공부의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도록 만든 것은, 그 대학원 건물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진 금지된 공부, 즉 헤겔·루카치·마르크스 읽기였다. 그 즐거움은 '민중미학연구회' 구성 혐의로 구속수감되며 '처벌'받았다. 역설적인 것은, '처벌'이 나를 진정한 공부로 더욱 깊이 이끌었다는 것이다. 1987년 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항의로 감옥에서 인권투쟁을 벌이던 젊은 동료들과 그들의 불굴의 저항이야말로 내가 분과학문의 저 좁은 형틀을 깨고 나오도록 도와준 스승이었다. '학술단체협의회' 구성에의 참여와 <노동해방문학> 창간 과정에의 참여는 학문과 문학이 어떻게 주어진 사회의 모순을 타개하는 실천적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을지 집단적으로 고민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낡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은 낡은 나 자신의 변형을 요구했는데, 그 변형에는 아픔만이 아니라 큰 기쁨이 따랐다. 이 기쁨은 10년간의 수배로 다시 '처벌'받았지만, 이 기간에 내가 서울 갈현동·불광동·북가좌동·구로동·화곡동과 인천 간석동의 골방을 돌며 마르크스·레닌·하먼·캘리니코스·네그리·하트·홀러웨이·푸코·들뢰즈를 공부하며 느꼈던 깨달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으로 남아 있다. 수배 기간에는 북한산이나 관악산의 후미진 나무 그늘 아래를 만남과 공부의 장소로 이용해야 했지만, '다중문화공간 WAB'을 만든 뒤에는 도심에서 집단적 공부를 시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중네트워크센터''다중지성의 정원'으로 이어진 제도 밖 집단공부의 성과는 '도서출판 갈무리'의 출판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었다.

 

책을 중심으로 돌아보면, 나의 공부에는 크게 세 가지 계열이 있다. 하나는 <아우또노미아>에서 <인지자본주의>로 이어지는 계열로, 주로 책·저자들과의 만남과 그 속에서 이루어진 이론적 성찰을 기록한다. 전체로서의 삶과 사회에 대한 이론적 관심은 주로 여기에서 표현된다. 또 하나는 현실의 사건이나 역사적 사건과의 만남을 통한 각성을 기록하는 계열이다. 2008년 촛불봉기가 거리에서 내게 준 깨달음을 기록한 <미네르바의 촛불>, 그리고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건이 준 충격과 각성을 기록한 공동 저작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은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과의 만남을 기록했다. 5·18 민중항쟁이 준 역사적 깨달음을 기록한 <공통도시>20세기 운동에 대한 탐구를 기록한 <21세기 스파르타쿠스>는 역사와의 만남에서 얻은 성찰을 기록한다. 세 번째 계열이 있다. 그것은 번역이다. <디오니소스의 노동>처럼 고독하게, <다중>처럼 소수 사람의 협력을 통해,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처럼 집단적 세미나를 통해 이루어진 번역 작업은 나의 사유를 장인적으로 가다듬는 데 중요한 기능을 했다.

 

<유체도시를 구축하라>의 저자 사부 코소는 출간 기념 강연회에서 "당신의 이력에는 별다른 학력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이토록 학술적인 작업을 해냈는가? 당신은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라는 한 청중의 질문에 "나의 공부는 연애편지, 정치활동, 그리고 번역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답했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대학은 공부를 혐오하게 만들었지만, 연애·투쟁·번역은 성적·성과와는 무관한 독서와 글쓰기의 길로 나를 이끌면서 다른 공부에의 열정을 키워주었다. 연애는 개체적 분리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 번역은 타자되기에 대한 사랑이다. 정치는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한 사랑이다. 공부는 주어진 것을 타개해나가는 사랑의 노동이다. 이처럼 사랑으로서의 공부는 제도로서의 공부에 대항하며 그것을 변형시키고 넘어서는 정치적 열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