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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29호]역사기술방법의 정치성: 미메시스와 아이스테시스




역사기술방법의 정치성: 미메시스와 아이스테시스


이택광 _ 경희대 영미문학과 교수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의

<무언의 발화: 문학의 모순에 대하여>

1998년 한 권의 책이 ‘소리 없이’ 출간된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의 <무언의 발화: 문학의 모순에 대하여>(La parole muette : Essai sur les contradictions de la littérature)가 그것이다. 흥미로운 제목이었지만, 이 책의 출간은 평범한 일처럼 보였다. 문학에 대한 저작 한 권이 세상에 나온 사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목적은 명확했다. 이 작은 책이 노리는 과녁은 바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이었기 때문이다.

1966년에 출간되어서 푸코에게 유명세를 안겼던 <말과 사물>은 랑시에르의 책이 나올 무렵 문학비평에서 중요한 텍스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영미 권에서 푸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점에 있었고, 인문학의 중심에 있는 ‘인간의 기원’에 대한 푸코의 진술은 문학비평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게 만드는 지각변동을 초래했다. ‘인간의 탄생’ 순간을 극적으로 진술했던 이 책은 마지막에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범주도 영원할 수 없다는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간의 죽음’은 이에 대한 저항담론(counter-discourse)인 문학을 통해 선언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방식으로 근대적 에피스테메(episteme)를 만들어낸 장치가 문학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 푸코였다면, 랑시에르는 <무언의 발화>에서 이런 명제를 더욱 비판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푸코가 인문학에 대한 담론의 형태(discursive configuration)를 추적함으로써 비연속적인 역사를 주장한다면, 랑시에르는 소리 없이 진행된 과거의 혁명에 대한 연구를 통해 비연속성 자체를 거부한다. 이 글은 이런 특성에 주목해서, 어떻게 랑시에르의 역사기술방법(the method of historiography)이 푸코의 그것을 비껴나가고 있는 것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랑시에르는 푸코보다 더 발본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담론 중심으로 역사의 비연속성을 고찰했던 푸코의 문제의식을 넘어가려고 시도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푸코는 비연속적 역사를 ‘발견’함으로써 권력의 작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를 통해 푸코가 달성한 성과는 근대 계몽주의를 구성하는 중요한 두 요소인 탈신비화(demystification)와 해방(emancipation)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었다. 말하자면, 푸코는 연속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역사의 단절들을 발견함으로써 실천에 개입한 담론 변화의 선행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푸코의 주장에 대한 랑시에르의 입장은 무엇인가? 바로 푸코가 단절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지점에 ‘혁명’이라는 역사의 순간을 기입하는 것이었다. 이런 랑시에르의 의도는 자연과 언어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술된 푸코의 ‘비-역사’와 대비해서 공동체의 힘을 중심으로 ‘근원적 역사’를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모더니즘, 반재현적 미학의 억견(doxa)

권력과 지식에 대한 푸코의 질문은 역사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이라는 그의 역사기술방법론을 통해 도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과학적 지식이 특정한 시간에 만연한 ‘문화’의 에피스테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말은 과학적 지식을 통해 사회변화가 유래되었다는 믿음을 회의에 빠트린다. 이런 관점에서 푸코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닮은꼴’로 언어를 파악한다.

상사(similitudes)가 여전히 언어작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대가 르네상스였다. 이런 까닭에 이 시기에서 지식을 생산하는 수단은 바로 해석능력이었다. 언어에 재현된 ‘자연의 진실’을 적절하게 독해할 수 있는 능력이 곧 권력이었다. 고전주의에 이르면, 재현의 에피스테메는 자연사나 경제학, 그리고 문법학에 복속되어버린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이 시대에 목격할 수 있는 지식생산의 특징이었다. 사물에 대한 규정은 질서에 대한 보편적인 과학의 발전을 요구했고, 이에 근거한 동일화와 차이화가 과학적 지식을 만들어냈다. 고전주의 시대에 언어는 사고를 재현했고, 언어는 그 사고에 다시 질서를 부여했다. 문법학의 등장이 이를 말해준다는 것이 푸코의 생각이다. 일반 문법의 출현은 기호의 질서를 탐구하면서 ‘담론’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구성했다.

랑시에르는 푸코의 전제를 구성하고 있는 미학적 서사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고전주의와 모더니즘을 습관적으로 구분하는 그 방식에 질문을 던진다. 이런 인식을 만들어내는 근거는 재현을 중시했던 고전주의가 재현을 배척한 모더니즘을 통해 극복되었다는 생각이다. 푸코가 지적했듯이, 고전주의의 재현은 문화적 코드화이기도 하다. 이런 코드화에 대항해서 모더니즘은 특이성의 반재현성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미학적 지평을 열었다는 것이다.

예술적 모더니즘의 패러다임은 고전주의 시대가 자연에 가까운 작품을 만들어내도록 일련의 규칙을 예술가에게 강제했다고 가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는 권력의 자리를 비호하는 규칙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파악했다. 모더니즘은 고전주의 예술에서 질서를 부여받은 자연의 규칙에서 벗어나서, 표현과 언어, 그리고 형식에서 단절을 초래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모더니즘은 정치적 해방과 반재현적인 미학을 서로 결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더니즘이 만들어낸 것은 결코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억(doxa)들이었을 뿐이다.

랑시에르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물론 모더니즘에 대한 획기적인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 그의 목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푸코처럼 ‘역사기술방법’을 통해 다른 관점을 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과 다른 지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을 발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역사기술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랑시에르는 미학에 대한 새로운 비평이론의 구성을 기획하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미학은 인식과 관련을 맺고 있다. 랑시에르의 관점에서 모더니즘의 억견 고찰할 수 있는 방법은 이행이나 단절의 관점에서 예술사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술의 미학체제”를 탐색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랑시에르는 “개인 천재성의 표현으로 문학을 보는 관점과 사회의 표현으로 문학을 보는 관점은 동일한 텍스트의 두 판본일 뿐”이라고 말한다.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구분이 없다는 진술인 셈이다.

오해와 달리, 랑시에르의 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이율배반을 감추는 기만으로 간주한다. 예술 장르의 차이를 해체하는 것과 예술 매체의 특질을 붕괴시키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랑시에르가 노리는 것은 모더니즘에 내재한 어떤 합목적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독사를 해결하기는커녕 복고적인 측면에서 19세기 재현의 예술체제로 복귀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 랑시에르의 지적이다. 이런 까닭에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단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서 지연된 사물에 대한 명명을 더 모호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모더니즘의 대안이라고 말할 수 없다.

랑시에르의 역사기술방법론에서 돋보이는 것은 이론과 실천에 대한 오래된 이분법을 극복할 방안을 제시한다는 점일 것이다. 위고, 플로베르, 말라르메, 그리고 프루스트에 대한 고찰에서 랑시에르는 이들이 플라톤, 스피노자, 칸트, 헤겔 같은 ‘이론가들’과 공통지반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말하자면, ‘이론’이 없었다면 ‘실천’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랑시에르는 ‘문학의 경험’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제시한다. 랑시에르에게 중요한 것은 재현체계와 같은 명명이나 해석 방법의 전환이라기보다 ‘문학’이라는 새로운 미학체제의 출현이다. 예를 들어 문학의 등장 이전에 작가들은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마치 연극처럼 작가 자신이 등장인물들을 통해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적합성(suitability)은 얼마나 등장인물을 그럴 듯하게 느낄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문학의 경우와 달리, 18세기 당시 예술에서 작가와 등장인물은 ‘영광의 인간’을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문학의 출현은 작가와 등장인물을 분리시키고, 사물과 인간을 평등하게 기술하는 글쓰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이스테시스, 모더니즘 기저에 흐르는 감각들

푸코와 다른 관점에서 랑시에르는 담론의 이행이나 단절을 통해 에피스테메를 발굴하지 않는다. 랑시에르는 훨씬 근본적인 장소에서 구체적인 ‘경험’의 축적물로서 체제를 역사기술의 중심에 놓는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체제는 어떤 목적성을 가진다기보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인식할 수 감각’을 몫으로 나누는 합의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 구조는 언제든지 다른 감각의 출현을 통해 바뀔 수 있다.

이 감각의 출현은 무엇일까? 비판적 사고의 담지자인 주체일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이 주체는 ‘데모스’라는 과잉으로 출현하며, 이 사건은 미학체제의 핵심에 자리 잡는다. 푸코가 ‘담론’을 설정하고, ‘권력/지식’의 결합에 드리운 어두운 계몽의 그늘을 지적할 때, 랑시에르는 명명과 해석의 차원과 다른 ‘혁명’이 그 체제에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역사기술방법의 정치성은 ‘거울을 통해 보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기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거울에 비치는 것은 바로 모더니즘이라는 자아도취의 이미지이다. 목적론적인 역사관에 근거해서 진보의 최첨단에 서 있다고 자부했던 그 모더니스트의 모습을 직시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 푸코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랑시에르의 역사기술방법론이다. 이런 랑시에르의 방법론이 응축된 것이 바로 <아이스테시스>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는 이 책에서 푸코가 전제하고 있는 ‘모더니즘’(미메시스)의 기저에 흐르는 감각들(아이스테시스)을 분석해서 제시하고자 한다. 랑시에르는 <아이스테시스>에서 1764년부터 1941년에 이르는 예술사를 자신의 방식대로 재정립한다. 이 시기는 대체로 모더니즘의 시대로 불리는데, 산업혁명과 겹치는 지점이기도 하다. 총 14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연구에서 랑시에르는 해당 사회에 지배적이었던 취미판단의 문제를 고찰한다. 랑시에르는 이런 예술의 맥락을 일컬어 ‘아이스테시스’라고 명명하는데, 이 용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것보다 훨씬 좁은 의미를 갖는다.

랑시에르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서로 다른 예술들(고급예술과 저급예술, 또는 예술과 삶) 사이에서 일어나는 탈경계의 경향이다. 이를 통해서 랑시에르는 모더니즘의 시대라는 통념에 대한 대안 역사, 또는 급진적인 수정을 가하고자 한다. 두 번째 주제는 예술의 영역에서 발생한 변화로 인해서 초래되는 광범위한 사회적 변화에 대한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사회혁명은 미학적 혁명의 딸이다.

랑시에르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고급예술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공연, 영화, 장식예술, 그리고 카바레 문화까지 다양한 사례를 제시한다. 랑시에르의 목표는 일반적인 미학의 발전사를 기술하는 한편으로 훨씬 광범위한 문화사를 다루는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철학의 일부로 출현한 미학은 ‘예술’이라는 정의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