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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130호] 대만인의 정체성과 정치

 

대만인의 정체성과 정치

김세진_ 정치외교학과 석사 과정

 

 

대만의 정치는 여러 가지의 변천과정을 가져왔다. 기나긴 외세의 지배부터 중화민국 정부의 지배까지 여러 형태의 지배를 겪었으며 이로 인해 원주민(原主民), 17세기부터 1945년 이전까지 대륙에서 이주한 중국인계통의 본성인(本省人), 국공내전 참패 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주한 외성인(外省人)들까지 여러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대만 정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하여 정치에서 가장 큰 화두는 보혁(保革)간의 갈등이 아니라 대만에 살고 있는 이들은 대만인인가? 중국인인가?’정부는 중화민국 정체성을 가질 것인가? 대만의 독자적 정체성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정체성에 관련한 갈등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대만인의 정체성의 변천과정을 역사적으로 먼저 바라보고 21세기 이후 여러 사건 통해서 정체성이 국내정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알아보게 될 것이다.

 

대만의 정체성 형성과정

대만의 역사는 1624년 네덜란드 상인들이 대만에 상륙하면서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에 이미 말레이-폴리네시아 계통의 원주민들이 각자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살고 있었으나 이들의 언어는 문자가 없어 1624년 이전의 역사는 알 수 없다. 네덜란드 상선이 현재의 타이난(臺南) 지역에 상륙하고 1626년 스페인 상선이 현재의 지룽(基隆)지역에 상륙함에 따라 외인에 대한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당시 식민지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시행되던 농업형태인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작하였고 인력을 원주민과 대륙의 저장(浙江), 푸젠(福建), 광둥(廣東)과 같은 남부 연해 지역의 한족을 모집하여 충당하였다. 이로써 대만에는 처음으로 중화권의 문화와 전통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1642년 대륙에서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을 벌이고 있던 정성공(鄭成功)과 그의 세력들이 청나라의 확장을 버티지 못하고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타이난을 공략하여 네덜란드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정씨왕국을 세웠다. 이 시기 청나라의 지배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대륙의 한족들과 하카인(客家人)들이 대만에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1683년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대만을 공략하자 정성공의 손자 정극상(鄭克塽)이 항복하였다. 강희제는 대만 공략을 반청세력의 토벌로 인식하여 대만을 포기하려고 하였으나 대만의 국방상 중요성으로 인해 대만을 푸젠성(福建省) 관할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212년의 청나라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이 시기 대만에 이주한 사람들은 푸젠의 민남인(閩南人)들과 광둥의 하카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대부분 노동이주와 무역을 위한 이주였기 때문에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약했다. 오히려 이들이 아무것도 없던 대만을 개척하였기 때문에 대만의 원주민 문화와 혼합하여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이로써 대륙의 한족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 시기 이주집단을 선계(先係)로 하는 대만인들은 본성인이라고 부르고 이들이 현재 총 인구의 81.1%를 차지하고 있다.

1894년 조선(朝鮮)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을 통해 일본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와 펑후제도(澎湖諸島)와 함께 대만을 할양받는다. 대만을 지배하게 된 일본은 대만총독부를 설치하고 많은 양의 재원을 동원하여 대만을 근대화시키기 시작했다. 1896년 대만에 쓰인 예산이 전 일본 예산의 11%를 차지할 만큼 큰 부담이었던 일본은 대만의 내부 자원을 개발함으로써 대만 투자재원을 마련하고 세금을 더 걷기 위해 토지개혁과 농업발전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한 민족이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국가를 지배했던 조선의 한민족(韓民族)과는 달리 대만인은 역사시대 이래로 외부세계의 지배를 받아왔고 그 세력들로부터 새로운 집단의 정체성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사회경제적으로 착취를 받았던 대만인은 일본의 경제, 사회 개발에 대해 비교적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청나라 시기에 영향을 받았던 중화문화와 일본인들은 대만인을 지나인(支那人)이라는 중국인의 멸칭으로 부르고 있었으므로 대만인들은 막연하게나마 자신들을 중국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대만을 청나라의 후신인 중화민국에 돌려주었다. 대만인들은 대만에 상륙하는 국민당군(國民黨軍)을 조국의 군대로써 환영하였지만 국민당군은 철저한 대만인 차별정책으로 대만을 통치했다. 근대화를 통해 대만인의 학력수준은 비교적 높은 편이었지만 군부세력은 그들이 표준 중국어를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공직에서 쫓아냈으며 그 자리는 국민당 세력이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敵産) 처리과정에서도 본성인을 배제하였으며 이러한 차별정책은 본성인들을 비롯한 대만인에게 상당한 불만을 가져왔다. 이러한 불만이 폭발한 19472.28사건에서 국민당군은 대만지역에서 약 3만명에 달하는 대만인들을 학살하며 진압하였고 이 사건을 통해서 대만인은 국민당 통치세력을 그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중정(蔣中正, 장개석의 본명)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오자 대만의 중국화를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먼저 19495월에 대만 전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본성인을 탄압하였다. 교육에 있어서 대만에서 쓰이던 언어였던 대만어와 일본어를 폐지하고 각 급 학교에서 중국어 교육만 인정하였으며 실생활에서도 중국어만 쓰도록 유도했다. 또한 문화 사업에서도 중화문화 부흥사업을 벌여 대만인을 중국인으로 변화시키도록 했다. 이렇게 대만의 중국화를 시행한 이유는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정통성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민정권이었던 국민당 정권의 대만통치가 정당한 것임을 국민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975년 장중정이 사망하고 1978년 그의 아들인 장징궈(蔣經國)가 총통이 되자 권위주의적인 정치제도를 지키면서도 대만인들 본연의 정체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였다. 그 이유는 1971년 유엔총회 제 2758호 결의를 통해 중국의 대표성을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져가고 중화민국은 UN에서 퇴출당했으며, 우방이었던 일본(1972)과 미국(1979) 등이 중화민국과 단교를 선언함으로써 미승인국의 상태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대만인들의 특유문화는 인정했지만 계엄령이 해제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당독재가 계속되었으며 그동안 불만이 쌓여있었던 본성인들은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외(黨外)라고 불린 이들은 지방선거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1986년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의 창당에 이르기까지 여러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19877월 장징궈는 39년간 지속되던 계엄령을 철폐하였고 이듬해 1월에 사망함으로써 대만의 민주화가 완성되었다. 본성인 출신으로 부총통이었던 리덩후이(李登輝)가 집권하면서 과거 국민당이 벌였던 여러 사건들에 대해 사과하고 국민당의 대만화’, ‘중화민국의 대만화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그동안 억눌려왔던 대만인의 정체성이 폭발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1996년 건국 이래 처음 치러진 직선제 총통선거에서 강력한 대만화 정책을 펼쳤던 리덩후이 총통이 재선되었다. 이 시기부터 대만인들의 정치적 성향은 정체성에 기반하여 나뉘게 되었으며 이러한 국가정체성의 양극화는 2000년 총통선거에서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陳水扁)이 당선되어 정권교체가 일어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천 총통의 승리는 국민당 후보의 분열이 큰 이유였고 입법원(국회)의 다수당은 여전히 국민당이었기 때문에 급진적인 대만 독립노선은 추진하지 않았지만 국가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자신들의 이권을 내놓고 싶지 않은 외성인들은 자신들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소수파가 될 것을 우려하여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본성인들을 중심으로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급증하게 됨으로써 정체성으로 인한 갈등이 심화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천수이볜 정부가 정체성을 정략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대만 정치에서 정체성은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정체성과 국내정치

정체성 갈등이 가장 심했던 사건으로 정명운동(正名運動)을 들 수 있는데 이 의미는 기존의 이름을 올바른 이름으로 바꾼다는 의미이다. 그동안 정부와 국가기관, 공기업 등에 쓰였던 중국(中國), 중화(中華)라는 이름을 모두 대만으로 고침으로써 중화민족이 아닌 대만민족의 정체성을 높이고자 하였으며 국호까지 중화민국이 아니라 대만공화국(臺灣共和國)으로 바꿈으로써 대만의 독립을 현실화 하였다. 이 운동은 재야정치가들을 중심으로 해서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으나 2002년 뤼슈롄(呂秀蓮) 부총통이 이 운동을 언급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정책적으로 반영된 시기는 2005년부터인데 군에서 중화민국을 찬양하는 군가와 구호가 삭제되고 2006년에는 중국상업은행이 조풍은행(兆豊銀行)으로 중국농업은행이 합작금고은행(合作金庫銀行)으로 이름을 바꾸는 등 국영기업과 국가 단체에서 정명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대만에서 가장 큰 공항인 중정국제공항(中正國際機場)의 이름이 대만타오위엔국제공항(臺灣桃園國際機場)으로, 장중정을 추모하는 의미로 세운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을 대만민주기념당(臺灣民主紀念堂)으로 바꾼 것이었으며 중화우정(中華郵政)이 대만우정(臺灣郵政)으로 이름을 바꾼 것 또한 논란이 되었다. 중국과 장중정 지우기라는 천수이볜 정부의 정책은 외성인들에게 큰 위기로 다가왔다. 본격적으로 정명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2004년에 천수이볜이 높은 지지율로 당선이 됐을 뿐만 아니라 입법원에서도 창당 이래 최대의석을 가져가게 되어 급진적인 대만화 정책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천수이볜 일가의 부정축재, 대만의 경제위기, 대만 독립에 대한 중국의 위협등과 같은 정치적 위기를 해소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본성인 역시 천 총통의 정치적 위기를 급진적인 대만화로 해결하려한다는 비판을 제기하였으며 결국 2008년 대선에서 경제 회복을 주요 공약으로 들고 나온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후보가 민주진보당의 셰창팅(謝長廷) 후보를 큰 득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러한 투표결과로 인해 대만인들 역시 정체성을 벗어나 우선 생활의 안정, 경제적 성장 그리고 양안의 평화를 바라는 이슈적인 투표를 하기 시작했다고 많은 학자들은 평하였다.

그러나 마잉주 총통이 이전의 대만화 정책을 포기하고 급진적인 친중국과 양안교류정책을 쓰면서 대만인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양안간의 경제교류협정인 ECFA가 체결되자 대만인들은 대만의 경제가 중국에 종속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협정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률이 높아지지 않자 지지율이 급속하게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2012년 근소한 차이로 민주진보당 차이잉원(蔡英文) 후보를 누르고 재선된 마잉주는 독선적인 정책과 급진적 친중정책으로 대만인들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2012년 미국 소고기 수입파동과 2013년 훙중추(洪仲丘) 육군하사 사망사건, 입법원장 도청사건 등으로 인해 지지율이 재집권 1년 만에 한 자리수인 9%로 추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20136월 양안회담에서 전자상거래, 금융, 의료와 같은 서비스 산업을 개방하는 양안서비스무역협정(CCSTA)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국민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고 협정체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대만 경제의 중국 예속을 우려하는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또한 친중국정책에 대한 반발은 대다수의 대만국민들이 양안통일을 찬성하지 않는 여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국민 반대에 부딪힌 CCSTA를 여당 단독으로 국회에서 비준하려고 하자 2014318일 청년단체와 대학생단체로 구성된 시위대가 입법원에 진입하여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해바라기운동(太陽花學運)으로 부르는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 무차별적인 서비스협정에 대한 반대, 민주주의 헌정질서 파괴에 대한 우려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본질적인 갈등은 대만인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움직임이었다. 마잉주의 재집권이 가능했던 이유로 경제적 이득과 안정이라는 현실적 필요 때문에 대만의 정체성 확립과 독립적 지위 정책을 유보했기 때문이었다. 마잉주 정부는 이러한 흐름을 잘못 읽었다고 볼 수 있으며 대만인들은 아직도 내적으로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결론

1624년 네덜란드 상선의 대만 상륙 이후 40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만은 많은 역사적인 부침을 겪었다. 이러한 역사적 부침은 대만인들로 하여금 특수한 정체성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정체성은 대만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2008년 마잉주 총통의 당선으로 인해서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는 대만인의 정체성 갈등이 이제는 종식 되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대만인들은 경제적 성장이라는 현실적 목표 때문에 정체성의 문제는 덮어버리는 선택을 했다. 아직까지도 대만인들이 정체성에 위협을 받으면 정치에 바로 영향을 준다. 그것은 급속한 친중국정책으로 인해 지지율이 급락한 마잉주 총통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ECFA로 인해 중국과 대만은 경제적으로 아주 밀접한 관계가 되었으며 중국과 대만간의 인적교류로 인해 양안의 많은 사람들이 교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만인들은 정체성에 대해 더욱 갈구하게 될 것이며 정부 역시 정체성과 경제이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 중에서 어느 것을 잡을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