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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1호]빈곤의 정치사회학적 의미

빈곤의 정치사회학적 의미

 

이주하_동국대학교 행정학과 부교수

 

 

George Bernard Shaw는 1905년 희곡 <바바라 소령(Major Barbara)>의 서문에서 “죄악 중에서 가장 악하고, 범죄 중에서 가장 독한 것이 빈곤이다”라고 역설하였다. 사실 빈곤이 퇴치되어야 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은 근대적 사고의 산물이며, 과거 빈곤은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것으로써 인식되어졌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복지제도의 획기적인 확충으로 인해 빈곤은 지속적으로 완화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빈곤의 근절은 여전히 요원한 문제이다. Jeffrey Sachs(2005)가 <빈곤의 종말(The End of Poverty)>에서 지적하였듯이 현재 전 세계적으로 해마다 8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빈곤 때문에 죽어가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6분의 1은 절대적인 빈곤에 사로잡혀 있다. 또한 경제적 번영과 사회복지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빈곤문제는 제3세계 이외의 국가들에게도 중요한 사회문제로 남아 있다.

 

특히 탈산업화와 세계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빈곤(new poverty)이 출현하고 있다. 탈산업화로 인해 팽창한 서비스 산업은 제조업에 비해 비균질적이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빈부격차와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노동시장에 참여하지만 소득이 낮은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이 등장하였으며, 일자리를 통한 빈곤탈출의 가능성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 역시 1997년 경제위기 이후 비정규직과 근로빈곤층은 증가하였고, 복지확대에도 불구하고 빈곤과 불평등은 크게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빈곤에 대한 심도 깊은 학문적 논의와 효과적인 빈곤대책을 위한 실천적 모색은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유엔 사회개발연구소(United Nations Research Institute for Social Development)가 2010년 발간한 <빈곤보고서(Combating Poverty and Inequality)>에 따르면, 빈곤해결을 위한 전략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영역에서의 여러 담론들과 정책들 사이의 연관성 속에서 수립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빈곤개념과 빈곤정책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해석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_1_UN 사회개발연구소 빈곤보고서)

 

 

논쟁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으로서의 ‘빈곤’

빈곤은 논쟁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이며, 빈곤이 정의되는 방식 역시 사회마다 다르고 시간적으로 변천되어 왔다. 빈곤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구분법은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으로 나누어 접근하는 것이다. Seebohm Rowntree(1901)는 빈곤연구의 기념비적인 업적인 <빈곤: 도시생활의 한 연구(Poverty: A Study of Town Life)>에서 한 단위의 가족이 ‘육체적 효율성(physical efficiency)’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생필품(necessities)’의 구입에 드는 비용을 계산하여 빈곤선(poverty line)을 제시하였다. 미국의 공식적인 빈곤선과 한국의 최저생계비 계측 역시 Rowntree 방식(전물량 방식에 의한 절대적 빈곤측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Peter Townsend(1979)는 그의 저서 <영국의 빈곤(Poverty in the United Kingdom)>에서 ‘상대적 박탈(relative depriv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절대적 빈곤담론의 한계점을 지적하였다. 즉 기본적 혹은 영향학적 욕구와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수준이란 사회적으로 합의되기 어려우며, 시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가변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Townsend는 절대적 욕구(absolute needs)라는 개념 대신에 ‘욕구에 대한 사회적 결정(social determination of needs)’을 중시하였고, 물질적인 빈곤과 함께 개인의 삶의 기회를 제약하는 다양한 사회적인 측면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상대적 빈곤을 측정하기 위해 그는 의식주 및 건강, 교육, 환경과 주거 및 근로조건, 가족생활과 여가, 사회적 관계 등을 고려하여 60가지의 박탈지표를 도출하였는데, 오늘날 많은 유럽 국가들은 상대적 빈곤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

 

인도 출신의 노벨경제학 수상자이자, 경제학의 토대를 ‘효용(utility)’에서 ‘자유(freedom)’로 전환시킨 Amartya Sen은 상대적 빈곤담론의 오류를 지적하며, (잠재)능력(capac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절대적 빈곤 접근법과 상대적 빈곤 접근법의 절충점을 모색하였다. Sen에 따르면, 상대적 빈곤개념은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소득 그 자체는 능력으로 전환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하였으며, 빈곤을 유발시키는 다양한 능력부재의 원인들에 대해 무관심하였다. 또한 상대적 접근법은 빈곤층 내부의 소득분배와 광범위하고 극단적인 빈곤 상황에서의 궁핍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빈곤의 원인은 자원이나 상품이 부족한 물질적 결핍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선천적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잠재적 능력의 발휘가 제한되거나 박탈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처럼 빈곤을 정신적·신체적 (잠재)능력의 결여로 파악하는 Sen의 접근법은 국제적으로 빈곤 및 개발정책 의제에 큰 영향력을 미쳐왔는데, 그는 빈곤국가에 무조건 물자만 원조하지 말고 그들의 잠재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 교육, 건강, 선택을 위한 자유를 배려하라고 강조하였다.

 

최근 새로운 빈곤을 맞아 크게 주목을 받고 있는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 담론은 빈곤에 대한 분석의 지평을 보다 확장시켰다. 1980년대 들어 유럽연합을 위시한 많은 서구 선진국에서 주요 사회문제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사회적 배제는 1989년 유럽사회헌장(The European Social Charter)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며, 1997년 암스테르담조약(The Amsterdam Treaty)에서 정식 의제로 채택되었다. 사회적 배제라는 현상 자체가 시기별, 국가별로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배제의 대상과 발생요인 역시 다양하기 때문에 단일한 기준에 입각하여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사회적 배제에 대한 다양하고 모호한 개념규정에도 불구하고, 빈곤의 다차원적(multi-dimensional), 역동적(dynamic), 상대적(relational)인 측면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먼저 다차원적이란 빈곤의 물질적인 측면과 비(非)물질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함을 의미한다. 즉 사회적 배제란 소득의 부족이라는 단일한 차원의 물질적 결핍의 결과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정서적 차원에서 사회의 주류 질서로부터 이탈된 것이며, 주거, 건강, 교육, 노동, 사회적 관계망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자원과 기회가 박탈된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배제는 경제적 차원에서의 노동시장으로부터의 배제, 사회적 차원에서의 시민권의 부족, 정치적 차원에서의 의사결정과정으로부터의 배제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배제는 결과(outcome)로서의 빈곤문제를 넘어서 빈곤을 유발시키는 과정(process)과 사회적 맥락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배제되었다는 것은 단지 현재의 빈곤상태임을 나타내는 것을 넘어서 빈곤을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사회적 배제는 관계적 차원의 이슈에 강조점을 두고 있으며,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장소라는 상황적 맥락 속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한다. 관계성 혹은 상대성이 주요 속성인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사회적 배제를 구성하는 다양한 차원들 간의 상호연관성과 중첩성이 강하며, 한 차원의 결과가 동시에 다른 차원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빈곤정책에 대한 총체적이고 중층적인 접근 필요

빈곤개념, 특히 사회적 배제 담론에 대한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오늘날 빈곤양상은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따라서 빈곤정책 역시 총체적이고 중층적인 접근을 취해야 한다. 특히 빈곤정책은 공공부조나 소득보장 중심의 협의의 빈곤정책과 더불어 조세정책, 고용정책, 노동시장정책 등을 포함시키는 광의의 빈곤정책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즉 빈곤정책은 사전적 분배(ex ante distribution)와 사후적 재분배(ex post redistribution), 그리고 근로(work)와 복지(welfare)라는 4가지 기준에 의거하여 [표]와 같이 고용, 조세, 공적이전급여, 사회투자로 나누어 접근할 수 있다.

 

[표]빈곤정책의 4가지 영역

사전적 분배

(Ex ante distribution)

사후적 재분배

(Ex post redistribution)

근로(Work)

고용

조세

복지(Welfare)

사회투자

공적이전급여

 

먼저 사전적 분배 측면에서의 빈곤정책으로는 일자리 창출과 사회투자전략을 들 수 있다. 산업화 이후 소품종 대량생산과 포디즘적 축적체제에 기반한 제조업 중심의 경제에서는 대규모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였고, 노동시장 진입과 그로 인한 소득증대는 바로 탈빈곤을 의미하였다. 과거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 역시 경제성장을 통한 고용증대와 소득증가로 빈곤과 불평등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탈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실업의 반복과 장기화 및 불안정한 저임금 일자리의 증가 등 다양한 노동시장의 실패로 인해 근로빈곤이 핵심적인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 이에 서구 복지국가에서는 근로빈곤층에 대한 대응으로 사회투자전략이 적극적으로 채택되었다. 근로연계복지(workfare), 적극적 사회정책(active social policy) 혹은 활성화(activation) 정책이라는 다양한 명칭으로 통용될 수 있는 사회투자전략은 학자에 따라 그 개념과 범위가 달라지는데, 대표적인 예로 아래와 같이 2가지 모델로 나누어 질 수 있다. 먼저 일자리우선모델(labour force attachment approach)은 취업우선(work-first) 원칙을 바탕으로 수급자를 최단기간 안에 노동시장으로 (재)진입시키는 것이 목표이다. 이를 위해 복지급여의 수급기간을 제한하고 근로 회피자에 대해 급여를 중지하는 징벌을 강조하며, 취업을 촉진할 수 있는 단기간의 집중적인 고용지원정책을 중시한다. 이에 반해 인적자본개발모델(human capital development approach)은 근로취약계층의 고용가능성을 증대시키는 교육 및 직업훈련에 역점을 두거나 사회적 일자리 창출을 강조한다. 조기취업 보다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확대를 통해 근로능력이 있는 수급자의 인적자본을 육성함으로써 적정임금의 안정된 일자리를 찾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후적 재분배(ex post redistribution)의 핵심은 조세정책과 다양한 복지제도에 의한 공적이전급여이다. 조세정책에 의해 빈곤 및 불평등이 감소하는 효과는 조세수입의 크기와 조세제도의 누진성 정도에 달려있다. 조세의 소득재분배 기능과 관련해서는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Paul Krugman, 노벨상보다 받기 어렵다고도 알려진 ‘존 베이츠 클라크 상(John Bates Clark medal)’을 2009년에 수상한 Emmanuel Saez, 그리고 최근 ‘피케티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21세기 자본론(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의 저자 Thomas Piketty의 분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연구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심화되고 있는 소득분배구조의 불평등과 양극화의 주요 원인으로 조세제도의 변화, 즉 신자유주의 정부에 의한 감세정책과 누진세의 약화를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소득보장 프로그램은 소득을 재분배하여 불평등과 빈곤을 감소시키는 형평성 제고 효과를 갖다. 국가의 개입에 의한 빈곤완화 또는 소득재분배 효과를 파악하기 위해 많은 연구들은 시장경제활동을 통해 얻어진 시장소득과 조세납부액을 제하고 공적이전소득을 더한 가처분소득을 주요 지표로 활용한다. 즉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의 사이의 빈곤율과 빈곤갭 혹은 지니계수의 변화추이를 살펴봄으로써 빈곤 및 불평등 감소효과를 분석하는 것이다.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 모델이 사후적 재분배 정책 대신 고용창출에 기반한 빈곤정책에 크게 의존한 반면, 성숙한 복지제도를 갖춘 서구 선진국에서는 공적이전급여가 빈곤감소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용없는 성장 시대에서 빈곤 탈출을 위한 조건

오늘날 경제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여전히 매우 중요한 정책수단이지만, 그것만으로 빈곤문제를 해결하기란 사실상 용이하지 않다. ‘고용없는 성장(jobless growth)’ 시대에 유급노동의 양적 부족과 질적 저하로 인해 ‘일을 통한 빈곤탈출’은 어느 정도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다. 즉 서비스 산업 위주의 탈산업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를 강조하는 세계화의 영향 아래 창출되는 일자리의 상당수가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위험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근로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 이외에도 사회지출 확대가 필수적이다. 이는 공적사회지출 수준이 낮은 국가일수록 근로빈곤율이 높게 나온다는 OECD 통계분석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더욱이 한국의 경우 서구 복지국가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될 만큼 공적이전급여 관련 지출이 크지 않다. OECD가 발간한 <2009년 통계연보(OECD Factbook 2009)>에 따르면, 소득재분배 정도를 보여주는 가계 가처분소득 대비 공적이전 비율은 OECD 평균의 1/6에 불과하였으며, 공적이전에 따른 불평등 감소효과 역시 OECD 평균의 1/7 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공적이전급여와 같은 전통적인 소득지원정책은 빈곤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제도인 것이다. 물론 공적이전급여 외의 나머지 빈곤정책 영역(사회투자, 조세, 고용)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구 복지국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근로빈곤문제 해소에 있어서 사회투자전략, 특히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고용지원서비스를 통해 근로 취약계층의 장기적 고용가능성을 향상시키는 것에 한층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