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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2호]닫힌 사회와 배제된 청년들


닫힌 사회와 배제된 청년들[각주:1]


소영현_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청년문화의 소실과 청년의 원자화

     청년문화의 뚜렷한 범주를 각인시켰던 1970년대를 제외하면 그간 청년문화론은 주로 청년-(대)학생 문화에 집중되었다. 대체로 그것은 사회의 쇄신을 불러일으킬 저항적 구심점으로서의 청년-학생에 대한 관심이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학생운동은 저항적 하위문화로서의 성격을 구축하면서 기성 사회나 지배 엘리트와는 다른 차별적 영역을 마련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진전과 소비문화 확산의 계기였던 1987년 6월 항쟁, 1988년 올림픽 등의 ‘사건’을 겪으면서 학생(운동)문화는 점차 쇠퇴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청년-(대)학생 내부에서 야기된 들끓는 욕망을 쇄신의 에너지로 흡수하지 못하고 학생(운동)문화는 새롭게 분출된 청년-(대)학생 내부의 문화적 에너지와 괴리된 채 고립되어갔다. 

     1990년대 이후 전쟁과 혁명의 체험 없이 경제발전의 과실을 수혜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낸 청년세대가 등장했다. 그들은 공동체와 전체 우선성이라는 사회적 합의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학생(운동)문화와는 결을 달리하는 ‘신세대’의 문화적 저항과 함께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엄숙성이 재고되기 시작했다. 이후 도덕적 엄숙주의에 저항하는 새로운 청년들과 그들의 하위문화가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새로운 청년문화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인 1993년에 출간된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현실문화연구)는 한국사회에 아무런 수식어 없는 ‘신세대’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신세대 대세론은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던 언론의 총포화에도 불구하고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원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청바지를 찢은 아이들이 정치사회적 시야로는 포착되지 않는 일상의 욕망들을 드러내고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나온 개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들의 문화적 저항은 일상 층위에 밀착되어 있는 스타일, 생활양식, 취향 등으로 우회한 것이었고, 지배적 주류 규범에서의 일탈을 지향하는 반문화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문화적 외피를 강조했던 새로운 개별자 청년들이 이끌고자 했던 공동체의 미래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들의 마련하고자 한 미래상이 윤곽도 잡히기 전에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청년들은 순식간에 자유로운 개별자에서 자기계발로 내몰리는 고립된 주체로 파편화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승자독식의 논리가 전 사회에 피할 수 없는 생존원리로서 강요되기 시작하자, 21세기 첫 십 년동안 청년문화라 할 만한 것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어졌으며 청년 모두가 생존의 최전선에 내몰리게 되었다. 청년들은 소비주체로서가 아니라면 더 이상 집단적 정체성을 획득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1980년대에 시작된 교육개혁조치를 통해 대학졸업정원제와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선택받은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대학생의 위상이 낮아지는 추세였고, 199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생에게 주어졌던 특권이 축소되고 대학사회가 가졌던 암묵적 동질성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학 간 위계, 대학생 내의 경제적·신분적 위계에 따른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문화적 균일성도 점차 깨지기 시작했는데, 현재는 상류층 자제들이 서열 높은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점차 높아지면서 대학이 계급 간 이동의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아지고 계급 간 간극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벌어진 한국사회의 문제적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축소판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이제 더 이상 대학-학생-청년-문화라는 범주로는 현재의 청년들에 대한 접근 혹은 논의가 불가능해졌음을 말해준다. 청년을 하나의 세대군으로 호명하는 일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한국의 청년들은 현재 세대적 동질성을 회복하기는 어려워졌으나 현실 문제를 해결할 뚜렷한 방책 마련에는 난망한 출구 없는 난국에 처해 있다. 


청년세대의 소실과 청년의 사회적 타자화

     신자유주의 열풍 속에서 청년이 점차 세대적 동질성을 상실하고 있다면 청년문화의 내적 계보 속에서 살펴보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세대적 동질성 회복의 가능성은 전방위적으로 매우 희박한 상황이 되었다. 청년-학생-문화의 세대적 동질성 상실과 관련하여 학생운동의 궤멸을 가져온 한총련 사태의 파급효과는 예상보다 큰 것이었다. 1996년 8월 20일 연세대학교 종합관에서 농성중인 한총련 학생들을 강제 해산·연행하는 과정에서 건물이 불타고 대부분의 기물이 파손되는 참담한 잔해를 남긴 채 일단락된 ‘한총련 사태’는 이후 청년문화가 국면적 전환을 맞이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사건의 폭력성은 대학 내에서 대학과 학생사회의 탈정치화 경향을 걷잡을 수 없이 강화했으며 대 사회적으로 계급적·혁명적 상상력의 파괴적 위험성을 사회 전체에 재각인시켰다. 이 과정에서 청년은 사회의 대항체로서의 성격을 급격히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로 청년의 세대적 힘을 말하기는 사회적으로도 조심스럽거나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는 대학생-청년문화의 건전성을 회복하거나 제도 바깥의 하위적 청년문화가 가졌던 저항적 의미를 복원해야 한다는 진단과 방책이 사회를 구성하는 집합적 정서를 무시하는 공허한 것이자 현실적으로 전혀 실효성 없는 전망임을 시사한다.  

     물론 이 땅의 청년들이 그간 획득한 청년 세대의 문화적 취향을 상실하고 보수적으로 획일화되고 있다거나 더 이상 청년들은 지배문화에 적대적이거나 일탈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지배문화를 내면화하고 주류에 편입되기를 열망한다는 평가, 대학 서열의 세분화에 골몰하면서 위계화된 서열에 의한 사회적 차별화에 찬성하고 그러한 논리의 강화에 기꺼이 동참하는 경향이 역설적 대학문화로서 뚜렷해지고 있다는 지적에 청년 스스로가 말없이 수긍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김예슬, 느린걸음, 2010), <요새 젊은 것들>(단편선 외, 자리, 2010), <위풍당당 개청춘>(유재인, 이순, 2010),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푸른숲, 2010), <레알청춘>(청년유니온, 삶이보이는 창, 2011)이나  <요즘 젊은 것들>, <민중의 소리> 팟캐스트 방송 등을 통해 청년들은 그들의 존재방식의 의미를 스스로 입증하고자 하고 제도화된 사회모순을 비판하며 기성세대에의 저항을 시도해왔다.   

     여가를 누리던 자유로운 영혼들이 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한 사회 부적응자로, 조직과 공동체의 획일적 문화를 거부하던 청년들이 복지의 그늘에 놓인 비정규직으로 분류되기 시작하고, 근대적 속성의 담지자이자 근대의 기수로 등장했던 청년들이 비정규직 알바 세대로 내몰리게 된 원인이 그들 내부에 있지 않음을 그들이 모르는 것도 아니다. 청년 스스로의 발언으로 청년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이 넓어졌음에 분명하다. 청년의 발화는 왜 그들이 기성세대에 의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으며 사회적으로 ‘우선 지원 대상’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보수적이고 탈정치적 속물이라는 평가에 잉여로 내쳐진 자들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선택행위였다는 ‘해명’이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틀 안에서 청년들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가에 대한 전망을 포착하기는 쉽지 않다. 그들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진다 해도, ‘평가와 이해’ 사이에서 청년은 여지없이 ‘대상화’되기 때문이다. 청년은 기성세대의 이해의 ‘대상’이자 멘토링과 힐링 즉 선도와 치유의 ‘대상’으로 다루어진다. 청년을 외적으로 규정하는 시선과 그 시선을 빠져나가려는 시도 사이에는 어떤 공백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체제비판을 위한 저항 혹은 순응?

     2000년대 이후의 문학에서 청년백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군은 하나의 경향성을 띤다. 이후 ‘루저’의 의미가 배가되지만, 초기 청년백수에 관한 소설들은 백수로서의 정체성을 ‘자발적 선택’으로 의미화하고 있었다. ‘취업준비생’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던 ‘백수’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정체성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유동적이고 일시적이며 잠정적인 청년의 사회적 위치가 사회적 안정과 정신적 성숙을 위해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받아들여진 측면이 있는 것이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IMF 이후’ 세대에게는 중심부에 안착해야 한다는 요청이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전제되기 시작한다. 2000년대 이후의 청년문학에서 ‘방’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은 이러한 맥락과 닿아 있다. 20~30대의 일상과 감성을 적실하게 포착함으로써 동시대 청년들에게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김애란과 김미월 소설의 상당수는 ‘방을 위한 청춘의 엘레지’라는 명명에 값한다.(김애란,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김미월, <서울 동굴 가이드>, 문학과지성사, 2007.; 김미월, <여덟번째 방>, 민음사, 2010. 등) 그들의 소설은 ‘방에서 방으로’ 전전하면서 20대를 채운 청년들의 떠밀리는 삶에 대한 초조와 불안을 포착하고 무엇보다 그것이 이전에는 아름답게 포장될 수 있었던 청춘의 통과의례로만 이해될 수 없는 참혹한 현실과 만나게 한다.

     김애란과 김미월의 소설에서 청년들의 ‘불안과 초조’는 ‘방에서 방으로, 변두리에서 변두리로’ 밀려나는 동안 청년들이 필연적으로 조우하게 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불법체류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포착된다.(김애란, '성탄특집', <침이 고인다>) ‘한국에 장기 체류하기 위해 중국인들은 비싼 등록금을 내고 어학원에 등록을 한다. 취득이 가장 용이한 학생 비자로 들어와 곧바로 불법취업을 한다. 서울 시내에서 제대로 된 어학원에 취직하기 위한 경력을 만들기 위해 하루 세 시간 씩 길바닥에 버려가며 한국의 청년들은 인천의 어학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강사로 일하게 된다.’ (김미월, '중국어 수업',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창비, 2011) 한국의 청년들과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은 그저 떠밀리는 삶 속에서 예외 없이 그렇게 만나게 된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청년이 처한 현실을 인생의 과도기로 이해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 좀더 분명해진다. ‘과도기의 시간’이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피할 수 없는 미래로서 확정되며, 전락 외의 삶의 방식이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뚜렷해진다. 그리하여 이제 한국사회의 20대 청년들은 누구라도 “서점 베스트쎌러 진열대 뒤 구석에 꽂힌,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김미월,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25쪽)일 뿐이라는 인식이 엄살이거나 과장일 수 없는 시절이 되었다. 청년은 이제 더 이상 미래를 선취(해야) 할 존재가 아니며, 그저 우리 사회의 배제된 자들 가운데 하나의 이름일 뿐이다. 아니 사회적 위계와 계급 서열구조에 매우 취약한 존재라는 점에서 대표적 타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국소설에서 청년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중압감에 시달리는 존재로, 조절할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는 무차별적 ‘폭력-인형’으로, 진보와 성공 논리를 거부함으로써 자발적 사회 부적응자가 되고자 하는 존재로서 포착된다. ‘무차별 살인’을 행하면서 왜 그래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김사과의 소설들(<02영이>, 창비, 2010), 떠밀리는 삶과 소진되는 삶을 포착하는 박솔뫼의 소설들(<그럼 무얼 부르지>, 자음과모음, 2014), 희망도 미래도 없는 20대 청춘의 비루한 보고서인 김혜나의 소설(<제리>, 민음사, 2010) 등은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경쟁논리가 한국의 청년들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제어되지 않는 폭력과 치유되지 않는 무기력이 어떻게 산출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기비하와 함께 알코올과 섹스로 자신을 소진시키는 자기파괴적 방식으로(김혜나), 일상 탈출도 낯선 세계에의 정착도 아닌 무위의 여행궤적을 보여줌으로써 ‘도시의 시간’을 상대화하는 방식으로(박솔뫼), 소진과 무위의 끝에서 그들은 ‘자기의 본래성’과 만나고자 한다. 시대윤리를 상대화하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은 이 시대의 유일한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하는 인간형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그런 인간형이 도달한(/하고자 하는) 목표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다른 현실인식의 가능성을 열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의 성찰은 대개 좌절감이나 무기력으로 그것도 철저하게 개별적으로만 경험될 뿐이다.

 

풍자냐 자살이냐, ‘자기파괴적’ 청년들

     물론 이러한 사정이 21세기 청년들에게 현실에 대한 어떤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정하는 것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인간을 상품화하는 현실에 자기-사물화로 대응함으로써 체제에 도전하는 <철수 사용 설명서>(전석순, 민음사, 2011)의 청년이나 ‘자살선언기획’으로 틈새 없는 사회체제에 균열을 가하고자 하는 <표백>(장강명, 한겨레출판, 2011)의 청년들은 자본과 결합된 현 사회체제에 대한 ‘청년의 저항불가능성’에 재고를 요청한다. 

     소설 전체를 상품 설명서로 구성한 <철수 사용 설명서>는 ‘제품명 철수’의 사용법과 관리법 그리고 주의사항을 소설의 주된 내용으로 삼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의 ‘철수’는 인간을 전자제품처럼 다루는 현실에 대항해 스스로를 규격에서 벗어난 불량품으로 규정하는 한편, 불량품화가 제품의 문제라기보다 사용자의 취급에서 발생한 것임을 유쾌하게 고발한다. 소설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들, 학습, 연애, 취업 기능이 본래 없거나 혹은 그리 좋지 않은 제품이 존재할 수 있음을 환기하고, 그런 제품(청년)이 쓰임새 없이 버려지거나 폐기되어야만 하는가를 되묻는다. 청년을 소외시키는 현실에 자기소외로 맞섬으로써 <철수 사용 설명서>는 비인간화된 사회가 고의로 망각한 휴머니즘을 다시 환기한다. 무엇보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사회체제에 대한 ‘철수’ 자신의 공모와 연루의 지점을 노출하고, 이를 통해 사회체제가 요청하는 틀 이외의 삶의 가능성을 짚어본다. 여전히 청년 ‘철수’의 성찰은 상실된 정체성을 회복하는 ‘자아 찾기’로 한정된 것임에 분명하지만, <철수 사용 설명서>는 실체로서의 청년의 육체성 즉 청년의 몸이 자본과 체제에 대한 미약하나마 저항의 거점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보다 격렬한 저항을 보여준 청년들도 있다. 제도권 내의 틀을 염두에 둔 청년단체가 현실 변화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냉정한 판단은 <표백>의 청년들을 이미 모든 틀이 짜인 세상을 향해 자살과 같은 방법으로 저항하는 극단적 자기 파괴로 나아가게 한다. <표백>은 자신들의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세대에 의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거나 ‘분노할 줄 모른다’는 비난의 대상이 된 세대가 “극단적이면서 저항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논리적으로 기능하는 저항운동”으로 ‘자살선언’을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블로그 세대의 감각으로 포착한다. <표백>은 더 이상 세상은 어떤 일에도 창의적 상상력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런 공간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자살 ‘방법’에 관한 것 정도일 뿐임을, 자기 파괴적인 방식이 아니고서는 견고한 사회체제에 어떤 위해를 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동시에 속물적이고 무기력하다고 평가받는 청년들이 자신의 전부를 걸고 체제에 대한 최후의 저항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그 절박한 절실함을 포착한다. 

     <표백>의 청년들이 마련한 ‘자살선언’ 기획은 시간적 간격을 두고 연쇄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살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청년들의 자살이 이른바 사회적 성공을 이룬 바로 그 시점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선언적이면서도 자학적이다. ‘예고’를 통해 ‘자살’을 실행하는 청년들의 ‘자살/선언’은 제어되지 않는 분노의 우연적 표출이 아니라 미디어적 확산까지를 염두에 둔 ‘기획된 이벤트’에 가깝다. 청년의 치기 어린 진지함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바, 연쇄적으로 자살하는 청년들은 사회적 성공을 이루고 체제 내부로 안전하게 안착했다고 (기성세대에 의해) 판단되는 순간, 자살을 통해 그 자신의 성취 전부를 무화시킨다. <표백>의 청년들은 극단적인 ‘연쇄자살’ 기획을 통해 사회체제의 부조리를 전면적으로 고발한다. 그러나 그 저항의 한계를 둘러싸고 청년들에게서는 허무주의적 자포자기의 무드가 포착된다. 이는 사회체제의 붕괴까지를 기도하기 힘든 강고한 현실에 대한 청년들의 비관적 인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살이라는 ‘자기-폭력’을 통해 체제폭력에 대항하는 방식이 아마도 틈새를 찾을 수 없는 매끈한 자본의 세계에서 유일한 저항의 가능태일지도, 그것이 어쩌면 이 시대의 가장 적실한 체제 저항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표백>은 그렇게 자조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배제된 자들의 미래

     20대를 온전히 수십 개의 알바에 바쳐야 했던 청년이 알바를 자신의 삶의 소중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어떤가. 이러한 존재방식은 폭력적인 자기파괴 방식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말해도 좋은가. <청춘 파산>(김의경, 민음사, 2014)의 청년들이 그러하듯 대개 어느 날 운명처럼 그들에게 던져진 도망자의 삶은 그들 자신의 실책이나 결함의 결과가 아니다. 그들은 국가적 경제 파산 사태의 여파로서 거대한 파도처럼 덮쳐온 부모의 빚을 떠안으며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가 되고 개인파산자가 되며 알바 전문가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운명처럼 떠안은 빚쟁이의 삶으로 20대 청춘을 흘려보낸 <청춘파산>의 청년은 빚 독촉을 피해 살았던 시간을 자신의 소중한 삶의 일부이자 성장의 시간으로 끌어안는다. 그리고 10년 만에 파산 면책 결정을 받고 얻은 가장 안정적 일자리를 스스로 그만두고 프리터의 삶을 선택한다. 

     단기 알바를 위해 연배와 성별이 서로 다른 이들이 헤쳐 모이는 소설 속 상가수첩 알바 현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화 <카트>(2014)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알바를 포함한 단기 계약직, 비정규직 일자리는 우리 시대의 많은 이들에게 이제 용돈벌이가 아니가 생계수단이다. 알바는 더 이상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니 정규직 삶이 아니라 프리터의 삶을 살고자 한 <청춘파산>의 청년의 선택을 세상물정 모르는 청년들의 철없음의 일면으로 이해하거나 삶에 대한 투쟁의지를 잃은 자포자기적 자기합리화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에게 행복을 약속하는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마련한 고심의 답안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 선택은 파행적 시대윤리에 온몸으로 대면하고자 하는 진정성의 실천에 가깝다. 자기-사물화나 자살 폭탄이 되는 존재방식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프리터의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나면 청년들이 행복추구권을 행사하는 인간임을 입증하는 길이 좀더 쉽게 열린다고 할 수 있는가. 사회는 알바가 생계수단인 이들에게 좀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게 되는 것인가. 근대 이후 노동의 가치 평준화는 노동을 통해 평등사회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신화를 유지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노동 윤리는 근면하고 성실한 노동력 공급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토대로서 활용되는 한편, 노동윤리의 전제를 수용하지 않는 이들을 교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특정한 형태의 삶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진화한 노동윤리 뒷면의 실체는 노력하지 않는 삶에 대한 거부감으로 표출되고 있으며, 노동윤리의 신성함에 대한 고평은 부정의와 불공정을 지속시키는 동력이 된 것이다. 

     스스로 폭탄이 되어버리는 극단적 자기파괴는 아니지만 몸피를 줄이고 욕망을 소거하는 것, 자신에게 할당된 몫을 줄이고 줄이는 것, 인간으로 남기 위해 천천히 비-생명 상태로 고사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청년들의 유일한 살길이라고 말해도 좋은가. 권력과 학력, 젠더와 지역, 인종과 계급 위계가 불러온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의 결집 공간이자 한국사회의 모순의 핵인 청년 문제가 이런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 말해버려도 좋은가. 사회적 배제를 천천히 내면화하는 이러한 방식이 자기 파괴일 뿐 아니라 사회의 미래에 대한 포기이자 파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해서 말할 수 있는가. 알바와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는 청년들 아니 청년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타자들에 대한 제도적, 사회문화적 개선의 가능성은 근대적 노동윤리의 허구성에 대한 근본적 재고 없이는 열리기 어렵다. 말 잘 듣는 시민이 되려는 노력의 정당성을 근본에서 되묻지 않는다면 이 어두운 터널 바깥을 상상할 수 없으며 우리 삶에서 미래는 없는 것이다. 

  1. 이 글은 필자의 기발표 논문 「한국사회와 청년들: ‘자기파괴적’ 체제비판 또는 배제된 자들과의 조우」(<한국근대문학연구> 26, 2012)와 「알바 청년에게 묻는다: 노동은 신성한 것인가」(<<프레시안>> 2014. 5.)의 발췌·요약본임을 밝혀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