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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132호]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년 학술대회, 근대 매체와 한글 가로 풀어쓰기의 실험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년 학술대회 <근대 문체의 창출과 미디어>




근대 매체와 한글 가로 풀어쓰기의 실험      

            



                                    권두연_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박사 후 연구원




한글 가로 풀어쓰기라는 문제틀


     훈민정음 반포 후 500여년이 지나 한자를 배제한 한글만으로 된 문자 사용의 전면화가 가능해졌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나가는 가로쓰기나 영어 알파벳처럼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각 분리해서 풀어쓰는 시도들은 모두 이 부산물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이 둘을 동시에 실행한 한글 가로 풀어쓰기는 한자와의 단절을 통해 한글로만 된 완벽한 문자 환경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초기 국어학자들뿐 아니라 선교사, 매체 편집인 등 한글을 상용하고자 한 이들에게 매력적인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로쓰기는 채택되었지만 풀어쓰기는 그렇지 못했다. 이 글은 초창기 한글 가로 풀어쓰기가 어문학자들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 관련자들 특히 최남선과 이광수 같은 신문학자들에게도 공통으로 시도되었음에 주목하여 그 양상을 고찰하고 이를 통해 풀어쓰기가 채택되지 못한 하나의 단서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가로쓰기의 다양한 용례들


     한글 가로쓰기를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 주시경이라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는 듯하다. 주시경은 1897년 9월 28일자 ⌜독립신문⌟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나가는 가로쓰기의 유용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1909년 국문연구의 철자법에서는 가로 풀어쓰기의 용례를 단 한 줄이지만 흘림체와 함께 제시하였다.

     물론 가로쓰기의 용례는 이미 이전부터 서양 선교사들의 작업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바, 페론(S. Feron) 신부의 필사본 ⌜불한사전 1868)을 필두로 리델이 편찬한 ⌜한불자뎐 (1880), 게일이 편찬한 ⌜한영자뎐 (1897) 등 서양의 알파벳을 표현하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동반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외국어 사전에 가로쓰기가 일관되게 적용된 것은 아니다. 러시아 사람인 푸칠로가 편찬한 로조사전 의 경우 러시아 문자는 가로로, 거기에 대응되는 한글은 세로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인에 의해 편찬된 國漢會語(1895)에도 “字行은 從左達右”라며 실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자를 쓰고 있고 이는 “外國冊規”을 본뜬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홍윤표, 2013) 그러니까 한글 가로쓰기가 서양 알파벳을 본떠 실시되었다는 주장이 전혀 설득력이 없는 얘기는 아닌 셈이다.

     그런데 이들의 가로쓰기에서 풀어쓰기의 용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알파벳 하나하나를 독립해서 써야 하는 선교사들 입장에서 본다면 한글 자모 역시 독립된 음소로 썼을 법한데, 그러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주시경을 비롯하여 가로쓰기를 주장한 이들의 한글 가로쓰기에는 풀어쓰기가 거의 전제되어 있다시피 하다. 다시 말해 초기 서양 선교사들이 한글을 가로쓰기 할 때 풀어쓰기는 동반되지 않은데 반해 한글 연구자들은 달랐다. 가로쓰기는 풀어쓰기의 필요 요건이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세로로 된 풀어쓰기는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풀어쓰기, 그 미완의 실험


     한글 전용이 전면화 되고 가로쓰기가 정착된 오늘날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로쓰기를 굳이 풀어쓰기와 함께 논의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한글 가로쓰기가 채택되기까지의 과정은 최현배의 표현처럼 “혁명”에 가깝다.(최현배, 1947)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은 표제를 가로로 썼지만 그 방향은 오른쪽에서 왼쪽이다. 매체의 표제에서부터 광고, 삽화, 사진(口繪) 등에 가로쓰기가 왕왕 보이지만 거의 모든 경우 세로쓰기의 독법과 같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되어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가로쓰기가 대중적 이해를 얻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상용화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설득력을 갖추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소요되었다. 

     풀어쓰기가 미완의 실험으로 남은 것도 이 과정의 산물이다. 최현배를 비롯해 많은 국어학자들이 한글 가로 풀어쓰기를 이론화하고 다양한 예문을 통해 접근성을 높이려 했음에도 실현되지 못했던 것은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처음부터 가로쓰기와 함께 제시되었고 그 반감도 비슷했지만 음절 단위로 사용되어 온 한글의 오랜 관습을 개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애초 음소문자로 창제된 한글이 음절 단위로 사용되어 온 오랜 전통을 불식시키고 음소화를 실현하려 한 풀어쓰기의 이상(理想)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근대 초기 국어학자들 외에도 다양한 매체 관련자들이 참여했고, 특히 한글 가로 풀어쓰기가 ‘2인 문단시대’의 주역으로 꼽히는 최남선과 이광수와 같은 문학자들에 의해서도 시도되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 있다.


1914년 각각 다른 지면에 소개된 한글 가로 풀어쓰기


            ⌜아이들보이



1914년, 세 사람과 세 지면


     1914년 주시경이 서거한 해에 출판된 그의 저서 말의 소리(1914.4)에는 '우리 글의 가로쓰는 익힘'이 가로 풀어쓰기 되어 있다. 가로쓰기라는 명칭과 가로 글의 유용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이 글은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사례이다. 이는 이후 김두봉을 거쳐 최현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전, 변주된다. 흥미롭게도 동시기에 최남선이 주간을 맡고 있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잡지 ⌜아이들보이1914.2~1914.9)와 시베리아 행을 감행한 이광수가 러시아로편집을 맡게 된 러시아 한인들의 기관지인 ⌜대한인정교보(1913.3~6)에도 한글 가로 풀어쓰기가 실린다. 

     전자는 <한글>란을 통해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 관한 다양한 예문을 선보였으며 특히 가로로 풀어 쓴 한글을 다시 세로로 모아 쓴 <한글풀이>를 별도의 형식으로 제시하였다. ⌜아이들보이가 선보인 이 <한글풀이>는 김윤경이 1937년 ⌜한글 지에 주시경의 예문을 가로로 풀어쓴 "내리글씨"의 원리와 유사하다. 후자 역시 <우리글>이라는 고정란을 만들어 가로쓰기에 관한 이론적 접근은 물론, 자모의 예에서부터 자작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였다. 무엇보다 흘림체를 선보였는데 이는 김두봉(깁더조선말본, 1922)이 제시한 것보다 8년이나 앞선다는 점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경향신문 1979.12.18과 한글새소식 89호, 1980.1)

     더욱이 이 세 지면에 나타나는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는 몇 가지 유의미한 차이들이 드러난다. 풀어쓰기의 단순성으로만 보자면 아이들보이->말의 소리->대한인정교보⌟ 순으로, 갈수록 복잡해지는 양상을 띤다. 이처럼 풀어쓰기가 복잡해지게 된 배경에는 음소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혼란으로부터 음절 분리를 명확히 하려는 의도가 포착된다. 그렇지만 본래 한글에는 없는 H/U나 딴이(Ĭ)와 같은 문자의 도입과 이로 인해 난해해진 형태는 오히려 훗날 풀어쓰기에 비판의 빌미를 작용해 가로쓰기만 채택되는 결과를 불러온다.



주시경의 말의 소리⌟(김윤경, 1937)




대한인정교보


     근대 초기 한글 가로 풀어쓰기의 실험은 단순히 국어학의 문제나 국어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새로운 매체를 만들고자 한 이들, 나아가 새로운 시나 새로운 소설을 쓰고자 한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중요한 문제였고 시도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결국 매체란 언어를 통한 ‘읽을거리’의 생산이고 만드는 사람과 향유하는 사람, 필자와 독자,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관계 속에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며 내용과 형식 역시 그 과정에서 결정될 터였다. 최초의 근대 한글 장편 소설을 쓴 이광수나 신체시의 창시자인 최남선이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문학 역시 언어를 통한 예술이며 그 선두에는 언제나 언어에 대한 고민이 먼저 놓여 있었음을 방증한다. 



데칼코마니, 시대를 앞서 간 글자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 관한 선행연구들을 고찰하면서 떠오른 이미지는 미술에서 흔히 이용되는 데칼코마니(décalcomanie)였다. 초기 국어학자들만으로 구성된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 관한 언급과 서술들이 마치 한쪽 면이 가려진 채, 전체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과 흡사하다고 생각되었다. 1914년 동시기에 발생한 언어 실험들, 특히 매체와 관련한 여러 다양한 시도들이 함께 다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이 그림은 온전히 재현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편 주시경을 비롯하여 한글 가로 풀어쓰기를 주장한 이들이 한결같이 ‘박음술’의 이점에 대해 언급한 사실을 상기한다면 인쇄 (불가능한) 기술과 밀접하게 관련된 데칼코마니의 이미지는 한글 가로 풀어쓰기에 또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 준다. 가령 주시경의 필체로 쓰인  말의 소리의 한글 가로 풀어쓰기는 책의 마지막 쪽에 부록으로 삽입되었고 아이들보이의 경우도 별도의 페이지로 덧붙여졌으며 대한인정교보의 경우도 석판 인쇄였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인쇄에 유용하다는 이들의 주장과 달리 기술력의 부족으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1914년은 최초의 한글 타이프가 발명된 해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 한글 타이프의 존재는 그다지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실용성도 검증되지 않았다. 한글 타이프의 상용화는 훨씬 후대에야 가능해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타이프의 원리가 한글 자모 체계의 혁신성을 보다 가시화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1914년 한글과 관련한 다양한 시도들, 그 가운데 한글 가로 풀어쓰기는 글자 하나하나를 (풀어) 치는 타이프의 발명과도 연동될 여지를 남기지만 정작 활자를 집자하는 당시의 인쇄 환경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설적으로 미래적인 문자였던 셈이다.  



<참고문헌>

최현배, 글자의 혁명, 군정청 문교부, 1947.

홍윤표, 한글이야기1, 태학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