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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132호]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년 학술대회, 근대초기신문과 단행본 서적의 문체 선택 및 분화 양상 연구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년 학술대회 <근대 문체의 창출과 미디어>




근대초기신문과 단행본 서적의 문체 선택 및 분화 양상 연구

- 서사적 기사와 소설을 중심으로 -




강현조_연세대학교 Open & Smart Education 센터 

글쓰기교실 선임연구원




근대적 매체의 등장과 문체 분화


     한문 대 언문이라는 이중 문어 체계는 사실 전근대 시기부터 존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해 양반·지식인·남성 등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 한문 해독층은 한문을 공식 문어이자 지식·정보의 독점 수단으로 향유해 온 반면, 평민·비지식인·여성 등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 언문 해독층은 주로 서간·기행문·서사물 등의 집필과 향유에 있어 한글을 비공식 문어이자 대항 언어(counter language)로 활용해 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존의 이중 문어 체계는 서구 문물 및 근대적 지식·정보의 수용이 불가피하게 된 새로운 현실의 도래로 인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신문이라는 근대적 매체의 등장은 바로 이와 같은 현실 변화의 계기인 동시에 변화를 촉진시킨 역사적 사건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근대적 매체의 등장에 따른 문체 선택 및 분화의 양상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곧 한문으로 되어 있는 글을 단순히 조사(토씨)만을 붙여 쓸 것인가, 아니면 한국어의 통사적 구조와 어순에 맞추되 한자 표기를 유지하는 형태로 쓸 것인가, 아예 한문 문장을 표기와 어의(語義) 양 측면에서 한글-한국어 문장으로 전환하여 쓸 것인가 하는 문제 상황에 따라 각각 한문현토체(한주국종체), 국한문혼용체(국주한종체), 순국문체 등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한문의 한국어 변환을 위한 각 매체별 선택과 실천의 과정에서 다양한 분화 양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의 모든 기사가 한문으로 집필 혹은 전재(轉載)되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이때까지는 서구의 근대적 문물에 대한 지식·정보의 획득에 있어 언문 해독층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의 지면 안에 한문·국한문·순국문으로 된 기사를 동시에 게재하였던 《한성주보》의 등장은 공식 문어로서의 한문의 지위에 균열을 가함과 동시에 더 이상 한문이 지식·정보의 독점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점을 환기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895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한성신보》 역시 하나의 지면 안에 국한문체 또는 순국문체가 동시에 사용되는 문체 분할의 양상을 노정하였으며, 역시 거의 비슷한 시기의 단행본 서적 출판에 있어서도 유사한 형태로 문체 선택 및 분화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여 근대적 매체의 등장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문체 선택 및 분화의 양상을 통시적으로 고찰하였다. 




<사진_ 14 한성순보. 오마이뉴스>




문체 선택 및 분화의 초기적 양상(1884~1897)


     《한성주보》의 ‘지면 내 문체 분할’은 한문 독해가 가능한 계층 및 집단뿐만 아니라 국한문 혹은 순국문의 독해가 가능한 계층 및 집단까지도 독자층으로 상정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외국 기사의 경우는 중국·일본 등의 신문·잡지에 게재된 원문을 번역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한자어의 고유어 변환뿐만 아니라 한문 문장 자체를 한국어 통사구조에 맞게 고쳐 써야 한다는 과제가 부여된다. 이 글에서는 그 구체적 양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사례를 새롭게 발굴하여 소개하였다. 

     1884년 4월 25일자 《한성순보》에 실렸던 『스페인의 馬爾慕亞가 太平洋을 발견하다(西班牙人馬爾慕亞檢出太平洋)』라는 기사와 2년여 후인 1886년 6월 28일자 《한성주보》에 실린 『스베인사 마르미아가 아다란짓그를 차진 속고』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두 기사는 동일 내용이며, 후자는 전자를 순국문으로 번역하여 다시 게재한 것이다. 같은 뉴스원(news源)에서 기사를 취했지만 《한성주보》는 《한성순보》와 달리 동일 기사의 대상 독자를 순국문 해독층으로 상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성신보》에서는 이러한 ‘지면 내 문체 분할’의 양상이 더욱 본격화된다. 일본인 발행 신문이었던 《한성신보》는 한국어 지면과 일본어 지면을 분할하였고, 한국어 지면은 한문을 거의 배제하고 국한문체와 순국문체를 거의 유사한 비율로 사용함으로써 국한문 해독층과 언문(한글) 해독층 모두를 주요 독자로 상정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순국문으로 된 서사적 기사가 증대하였으며, 허구적 서사물로 볼 수 있는 글들이 잡보란을 통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창간된 순국문 신문인 《독립신문》 또한 잡보란을 두고 있었지만 서사물로 볼 수 있는 글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룬다. 이 글에서는 기존에 알려진 40편의 자료 외에 한국 최초의 ‘소크라테스 약전(略傳)’이라 할 수 있는 『希臘의 雅典國 賢人에 索克이란 사ᄅᆞᆷ에 行實이라』(1895.11.21)와 순국문으로 된 허구적 서사물인 『효자지감신(孝子之感神)이라』(1896.7.20)·『天感至誠』(1896.8.5) 등의 자료를 발굴하여 소개하였다.

     이와 같은 《한성신보》의 순국문 기사 게재 확대 경향 및 허구적 서사물 게재 시도는 일본인 발행 신문임에도 불구하고 《한성신보》가 조선인 독자의 확보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주요 대상 독자가 한문 해독층이 아닌 국한문 해독층 및 언문(순국문) 해독층이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근대적 활자를 이용한 단행본(鉛活字本) 출판의 경우에도 《한성주보》의 등장과 거의 동시에 국한문체로 된 서적이 등장했다. 흔히 최초의 국한문체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1895)이지만, 《한성주보》의 회계주임을 역임하기도 했던 정병하(鄭秉夏)가 저술한 『농정촬요(農政撮要)』(1886)가 훨씬 앞선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성신보》의 발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단행본 서적의 출판에 있어서도 국한문체와 순국문체의 선택 및 분화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학부 편집국이 발간한 『만국지지(萬國地誌)』(1895)·『만국약사(萬國略史)』(1895)·『조선역사(朝鮮歷史)』(1897) 등의 교과서들은 정부 주도의 출판인 동시에 사류(史類)라는 양식적 특성이 반영되어 대체로 국한문체가 선택되는 경향이 높았다. 이에 비해 민간 출판의 경우에는 주로 순국문체가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번역되거나 집필된 기독교 서사문학의 한국어 번역물 출판 사례가 이에 해당하며, 『천로역정』(1894)·『쟝원량우샹론』(1893)·『인가귀도』(1894) 등을 들 수 있다.

     요컨대 근대적 형태의 단행본 출판에 있어서도 국한문 서적(관 주도)과 순국문 서적(민간 주도)이라는 방식이 양분되어 있었고, 전자는 사류(史類)를 포함한 교과서에, 후자는 주로 서사성을 띤 저작물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서적별 문체 분화 양상 역시 신문과 마찬가지로 18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1890년에 본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1890년대의 신문 발행과 단행본 서적 출판이라는, 즉 근대적 매체의 본격적인 도입과 그 메커니즘의 작동은 필연적으로 문체의 선택 및 분화 현상을 야기하였고, 나아가 서로 다른 해독 문자를 가진 독자층의 분화 및 확대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1898년 이후의 문체 선택 및 분화 양상


     1898년 이후에는 다수의 순국문 신문들과 소수의 국한문 신문들이 독자 확보를 위한 상호 경쟁을 벌였다고 할 수 있다. 1월 1일 《협성회회보》(4월 9일자로 《매일신문》으로 개명됨)의 창간을 필두로 하여 《제국신문》(8.10)과 《황성신문》(9.5)이 잇따라 창간되면서, ① 국한문·순국문 혼용 신문(《한성신보》), ② 국한문 신문(《황성신문》), 그리고 ③ 다수의 순국문 신문(《독립신문》·《죠션(대한) 크리스도인 회보》·《그리스도 신문》·《협성회회보(매일신문)》·《제국신문》 등)이 공존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창간된 신문들은, ‘지면 내 문체 분할’ 방식을 선택한 《한성신보》와 달리, 매체별로 단일한 특정 문체를 선택함으로써 특정 문자 해독층을 주요 대상 독자로 삼는 형태로 존재했다. 이는 신문 시장 및 독자층 전체의 확대라는 당대의 추세에 상응한 결과이겠지만, 아울러 독자층의 분화 현상 및 신문사별 목표 독자의 차별화 추구 경향과도 결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잡보란에 허구적 서사를 포함한 서사적 기사의 게재 비율이 증대하였고, 소설란 또한 경쟁적으로 개설되었다. 《한성신보》는 이미 1897년 최초로 소설란을 개설하였고, 1906년에 이르면 《대한매일신보》(2월), 《황성신문》(5월), 《만세보》(7월) 《제국신문》(9월), 《경향신문》(11월) 등의 순으로 거의 대부분의 신문에 동시다발적으로 소설란이 개설된다. 하지만 <혈의루>의 등장 이전인 1904~1906년에도 신문에는 잡보란 등을 통해 서사물이 지속적으로 게재되고 있었다. 따라서 1906년에 나타난 각 신문별 소설란의 개설(속출)은 돌발적이고 비약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연속적인 현상의 누적 속에서 발생한 결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요컨대, 1898년 이후 복수(複數) 신문 공존 체제 및 신문 간 경쟁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각 신문들은, 《한성신보》를 제외하면 대체로 매체별로 단일한 특정 문체를 선택함으로써 특정 문자 해독층을 주요 대상 독자로 삼는 형태로 존재했으며, 국한문 해독층보다는 순국문 해독층을 목표 독자로 삼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전반적인 신문 시장의 확대 및 순국문 해독층의 저변 확대에 따라 순국문 신문들 사이에서도 독자층의 분화 현상 및 신문사별 목표 독자의 차별화 추구 경향 또한 나타났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다시 순국문 독자층의 확대를 견인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결과 국한문보다는 순국문으로 된 서사적 기사 및 허구적 서사물의 비율이 우세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일종의 단선적 진화(발전)의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순국문 우세의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국한문체 기사 및 서적의 신문·출판 시장 지분 점유 양상은 일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오랫동안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나오며


     신문과 단행본을 아우르는 문체 선택 및 분화의 양상은 대체로 국한문보다는 순국문의 우세라는 결과로 귀착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1910년대 이후까지도 여전히 국한문체의 언론·출판 시장 지분 점유 양상이 포착되는 것으로 보아 국한문-순국문 양분 구도는 후자의 우세 속에서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근대초기 문체 선택 및 분화의 양상은 발전론(진화론)적 관점에서 포착되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연속과 단절의 국면이 동시적으로 표면화되었던 당대의 양상을 최대한 놓치지 않고 포착하려는 태도는 이 시기 문체 선택 및 분화 양상의 연구에 있어 불가결하게 요청되는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