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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2호]청년 빈곤: 세대의 문제냐 성장의 단계냐



청년 빈곤: 세대의 문제냐 성장의 단계냐





박권일_프리랜스 저널리스트·『88만원 세대』 저자




     빈곤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건 빈곤이 어디까지나 현 시기 국민경제의 질적 특성과 양적 규모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청년빈곤이라는 말 속의 빈곤은 아프리카 최빈국의 그것에 대비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저것들이 배곯아본 적이 없어서 불평을 한다.’는 부당한, 그리고 ‘명백히 의도적인 비난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빈곤은 오히려 선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연구되는 주제다. 

     청년세대의 빈곤이란 주제를 접할 때 가장 빠지기 쉬운 두 가지 함정은 첫째, 특정 세대를 인격화․의인화해서 사고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A세대는 능력이 있었는데 B세대는 무능력하다.’, ‘A세대는 정치적으로 각성했지만 B세대는 최소한의 사회의식조차 없다.’, ‘B세대가 비참해진 건 A세대 때문이다.’ 등등 일반화할 수 없는 개인적 경험들을 섞어 특정 세대의 불행을 합리화하려는 사회적 프레임이 등장한다. 그렇게 특정 세대의 자질과 능력을 문제 삼는 순간 이미 세대론은 인종주의와 구별불가능해지며, 그 결과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세대담론들이 창궐하며 이에 편승한 세대 마케팅이 판치게 된다. 두 번째 함정은 ‘선진자본주의 사회들도 다 겪는 문제 아니냐, 일종의 성장통이다.’라는 식의 사고다. 현상적으로는 비슷할지 몰라도 한국과 그들 사회 간에는 문제의 발현양태와 대응방식 양자 모두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있다. 이런 태도는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사고이기는커녕 단지 문제를 방치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지면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청년빈곤이란 의제를 개별화․파편화해서는 안 되며, 청년빈곤 문제의 역사적 기원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불안정노동의 전면화라는 문제의 하위범주라는 사실을 다시금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른 불안정노동의 전면화가 일국 노동자의 생애주기와 맞물리면서 특정세대에 그 폐해가 집중되고 있다는 것, 단순하게 말해서 그것이 청년빈곤의 구조다. 


한국은 어떻게 ‘세계화’ 되었나

     포디즘적 노동체제가 한국에 채 안착하기도 전에 신자유주의적 규제개혁이 지구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세계를 휩쓸기 시작했다. 한국의 자본집단은 이 시기 급속히 국제경쟁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인구의 과잉공급을 통해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절대적 잉여가치를 확보하는 것이 과거의 축전전략이었지만 포디즘적 노사관계로의 전환, 후발공업국의 추격, 선진국의 신보호주의 등의 변화로 더 이상 그런 식의 축적이 효율성을 갖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생산자본을 원천기술이나 노동력에 투자하기보다 부동산투기 등으로 투기자본화 하는데 골몰하고, 무분별한 사업다각화로 과도한 차입경영과 과잉중복투자를 초래했던 한국재벌집단의 지독한 후진성은 한국경제의 기초체력을 한없이 갉아먹어갔다. 

     정부는 이를 제어하기보다 더욱 부추겼다. 김영삼 정권이 주도한 소위 ‘세계화’ 광풍으로 개발독재 시대의 관치경제는 성찰의 대상이 아닌 무조건적 극복과 청산의 대상이 됐고 민간주도경제로의 전환은 원칙도 기준도 묻지 않는 절대선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정부 핵심 당국자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을 정도로 뜬금없었던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선언(일명 시드니 구상)이 제대로 된 내용을 갖고 있을 리 만무했다. 영미식 신자유주의 개혁을 무작정 좇는 기묘한 시대정신은 그렇게 탄생했다. 노동유연성에 대한 강조는 신자유주의 메커니즘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축적체제, 즉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이윤을 확보하던 습속을 새로운 단어로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이 모든 판단착오와 경솔한 대응, 도덕적 해이가 믹스업(mix-up) 되면서 1997년 IMF 환란으로 이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97년부터 2007년의 개혁정권 10년은 앞서 김영삼 정권이 천명했던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노동정책 제1명제가 그 어느 때보다 충실히, 동시에 구체적으로 실천된 시기였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복지지출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만 했지만 과거 정권과 마찬가지로 성장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확대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시장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명시적 수단을 정치권력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개혁’이라 착각하고 극우보수세력의 칭찬까지 받아가며 맹렬히 추진했다는 점이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은 이 문제에 대한 성찰이 전무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정권들이 상상한 세계화 역시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를 수치로 표현해보자. 비정규직 858만 명(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08년 조사), 임금소득 불평등 OECD 1위, 임시직 비율 2위, 성별임금격차 1위, GDP대비 공적사회복지지출비중 최하위….

     그렇게 ‘세계화’는 두 번 반복되었다. 한번은 소극(farce)으로, 다음은 비극(tragedy)으로. 첫 번째 10년의 기간 동안 ‘전 국민의 중산층화’라는 장밋빛 미래는 거의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당시에 이미 노동의 유연화가 정책기조로 등장할 만큼 부각됐지만 그것을 노동운동진영은-총 노동의 관점에서 사고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불과 10년 만에 지금처럼 심각한 상황이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10년 간 실제로 닥쳐온 현실은 국가적 규모의 정리해고, 대량실직, 정규직의 전면적 비정규화, 그리고 ‘빈곤의 일상화’였다. 


가족복지의 종말

     과거 고도성장시기에는 경제성장이 곧 빈곤완화로 이어졌다. 아마티아 센은 ‘한국이 분배에서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 평등을 유지하면서 고속성장을 했다.‘고 평가한다(『자유로서의 발전』, 188쪽). 그런데 지금 한국의 빈곤과 불평등 문제는 경제성장에 종속된 함수가 아니다. 김대중 정권 시기 5년간 한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4.58%였다. 같은 시기 미국이 3.0%, 일본이 0.36%, 독일 1.54%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그럼에도 빈곤과 불평등은 개선되기는커녕 악화일로다. 소득불평등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인 지니계수는 2004년 0.3대를 돌파한 이후 해마다 높아져서 2008년에는 1990년 조사 이후 최고치인 0.325를 기록했다.

     불안정노동이 전면화하면서 아무리 일해도 빈곤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이른바 ‘워킹푸어’ 계층도 크게 늘어났다. 2006년 기준으로 전체 빈곤층 중 약 58%가 ‘워킹푸어’다. 한국 워킹푸어의 특징은 계속 빈곤층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진입과 탈출을 반복한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의 이러한 변화는 곧장 또 다른 연쇄효과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가족복지’ 시스템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복지란 서유럽 등에서 국가가 책임지는 교육비용, 그리고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거의 전적으로 가족이 부담하는 체계다. 이 시스템이 수십 년간 나름대로 잘 작동해왔던 것은 ‘투입’을 상쇄할 만큼 ‘산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할 곳은 넘쳐났다. 대학을 가지 못하더라도 대공장 블루컬러 노동자로 일하면서 중산층 수준의 생활이 가능했다. 소위 명문대학을 졸업하면 굴지의 대기업을 골라 들어갈 수 있었고 투자된 비용을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의 소득을 벌 수 있었다. 가처분소득은 부동산 거품을 통과하며 몇 배로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계급상승은 단지 신화가 아니라 이웃에서 흔히 목격되는 일상이었다. 성공한 자식들은 대개 자신을 뒷바라지한 가족들을 직간접적으로 원조함으로써 호혜성의 원리가 관철됐다. 이것이 바로 기형적으로 높은 한국 교육열의 물적 토대였다. 과거에 국가복지의 사각지대를 기업복지와 가족복지가 메우는 형태였다면, 현재는 신자유주의로의 체제전환과 불안정노동의 전면화가 기업복지와 가족복지를 파괴했음에도 국가복지의 확충이 그 빈 공간을 전혀 메우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88만원 세대』 이후, 무엇이 변했나

     『88만원 세대』 출간 이후 긍정적인 변화를 우선 꼽자면 한국의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사회적 관심이 커졌다는 점이다. 동의 여부를 떠나 담론이 활성화되고 사회적 의제가 됐다는 건 문제해결의 첫걸음이다. 젊은 세대 스스로의 움직임도 여기저기서 활발해졌다. 하지만 한계도 명확히 드러났다. 가장 뼈아픈 것은 구체적이고 제도적인 변화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겠다. 오히려 상황은 더 나빠졌다. 전경련의 대졸초임식감 발표가 대표적 사례다. 

     전경련은 2009년 2월 25일, 30대 그룹 채용담당임원들이 참석한 ‘고용안정을 위한 재계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대기업 신입사원 임금을 최대 28% 삭감한다는 계획을 발표됐다. 그리고 이 계획이 “고용안정을 위해 고통을 분담하며 일자리를 나누는 잡 셰어링(job sharing)”이라 밝혔다. 신입사원의 임금을 대폭 삭감하겠다는 말을 하면서도 대기업 임원진의 연봉삭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며칠 후 공기업 경영진들도 ‘신입사원 임금을 최대 30% 삭감할 것’이라 선언했다. 이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금융기관과 민간기업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스스로 명시한 “고용안정”이라는 목표와 “인턴사원을 더 고용하겠다”는 수단은 명백한 모순이다. 한국에서 ‘인턴사원’은 풀타임 비정규직 노동자를 의미한다. 요컨대 전경련은 불안정 노동자(비정규직)을 고용하기 위해 신입사원의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말하는 셈이다. 

     잡 셰어링의 원래 정의는 ‘하나의 업무를 복수의 파트타임 업무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워크 셰어링(work sharing)은 알려진 것처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고용의 안정성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도 고용을 늘리는 방식이다. 사민주의 전통이 강한 유럽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고 성공사례도 적지 않다. 이번에 한국의 전경련이 발표한 ‘잡 셰어링’은 정규직 신입사원의 실질임금을 삭감해 비정규직을 고용하겠다는 것이므로 잡 셰어링도, 워크 셰어링도 아니다. 이런 고용형태를 지칭하는 개념은 따로 존재한다. 바로 ‘일자리 쪼개기(잡 스플리팅 job splitting)’로서, 오직 기업의 이윤극대화만을 목표로 ‘노동의 유연화’ 또는 ‘정규직의 비정규직화’하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고용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머니투데이> 2009년 2월 26일자 보도에 따르면, 1월 15일 열린 제2차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고통분담 차원에서 임금을 안정시켜 실질적으로 고용을 늘리는 ‘잡 셰어링’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고, “대졸신입사원의 초임을 낮추는 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한 달 남짓 지나 전경련의 발표가 나오게 된다. 한 마디로 청와대와 재계의 공모다. 미국발 경제위기를 기회로 청년세대를 일방적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변화를 위한 사회적 조건들

     한국 비정규직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높은데, 얄궂게도 부모세대와 그들의 자녀세대가 공히 비정규직 문제의 최대 피해자다. 그러나 88만원 세대와 그 부모 세대의 빈곤은 단지 그들 세대만의 불행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불행이다. 이들이 구매력을 상실하면 내수시장이 침체해서 국민경제에 해롭다는 점도 그렇지만 더 주목해야 하는 건 이것이 장기적으로는 사회 붕괴의 명백한 신호라는 점이다. 

     『88만원 세대』는 젊은 세대에 대한 사회적 응급조치를 통해 이러한 빈곤의 연쇄를 끊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의 붕괴를 막기 위한 윤리적 호소라는 점에서 보수적이지만, 새로운 정치적 저항의 주체를 요청한다는 점에서는 급진적이기도 하다. 청년빈곤 문제 혹은 88만원 세대 담론은 한 세대의 낙오와 탈락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대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이 20여 년을 관통하는 사회구조 변동의 산물이자, 모든 사회성원이 직면한 불안정노동 전면화의 한 단면이라는 사실을 환기할 때, 세대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경제의 문제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경제학이 말하는 ‘수요’는 구매력을 전제하며 따라서 구매력이 없는 자는 수요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의 셈에 포함되지 못하는 인간, 몫 없는 인간, 낙오하고 탈락한 인간, 결국 아무도 아닌 저 수많은 사람들-우리를 어떻게 ‘셈’해야 하는가. 낙오와 탈락과 불평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우리 스스로 발 딛고 있는 이 세계가 아름답고 추상적이며 평평하고 매끈한 경제의 공간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곳은 정치의 들판, 윤리의 바다, 주체의 숲이다. 



*이 글은 <황해문화> 통권 제64호에 실린 ‘청년 빈곤: 세대의 문제냐 성장의 단계냐’를 요약 발췌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