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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133호] <서유강론> 우수 논문 소개 - 백제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명문의 재검토


백제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명문의 재검토


이천우_사학과 박사과정


학문 간의 소통 필요

본 논문은 2014년 2학기 대학원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성하게 되었다. ‘사학’이라 한다면 넓게는 ‘역사 전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문헌학, 고고학, 미술사학 등 다양한 방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나 역시 사학, 특히 한국 고대사를 전공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문헌학’에 편중되어 공부를 해왔었다. 때문에 고고학과 미술 사학 등 인접 학문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나 개인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현 사학계 내부가 가지고 있는 고민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보니 소수의 연계 연구가 시도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각각의 분야, 즉 문헌학은 문헌학, 고고학은 고고학, 미술사학은 미술사학대로 나름의 연구 방법론을 구축하여 학문 간의 교류가 점점 소원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본 논문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교류의 필요성을 절감했으며, 향후 문헌학뿐만 아니라 인접 학문과의 소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백제 왕흥사지 발굴 내용

본 논문의 주인공인 백제 왕흥사는 이러한 학문 간 소통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왕흥사는 사비시기의 사찰로,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의하면 法王 2년(600) 봄 정월에 창건하여 무왕 35년(634)에 완성되기까지 약 35년에 걸쳐 건립된 사찰이라고 한다. 건립 목적은 ‘王興’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왕권 강화 목적으로 건립되었을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왕흥사에 관한 초기 연구 성과에서는 사료가 워낙 소략하여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 성과는 기록상에서만 존재했던 왕흥사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특히 2007년 3월 28일에 시작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왕흥사지 제8차 발굴조사 결과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출토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사리공 내부에서 출토된 사리기는 청동사리합과 은제사리호, 그리고 금제사리병의 3중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청동사리합에 5자 6행 29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왕흥사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 명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丁酉年 2월 15일 백제왕 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刹을 세웠다. 본래 사리가 2매였는데 봉안할 때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曷)[각주:1]’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







백제왕 昌은 威德王의 이름으로, A에 의하면 죽은 왕자를 위해 刹을 세웠다고 한다. 이는  법왕 2년(600)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무왕 35년(634)에 완성되었다는 사서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위덕왕대의 정유년은 위덕왕 재위 24년(577)에 해당하는 시기로 창건하기 시작한 법왕대보다 23년이나 앞선 시기였다. 이를 토대로 왕흥사의 건립 연대에 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발표함에 따라, 두 사서 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물론 두 사서의 기록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문헌사적 시도가 이루어진 반면, 고고학계에서는 문헌 기록을 단순히 기록의 오류로 판단하여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왕흥사에 대한 문헌사적 연구와 고고학적 연구는 서로 엇박자를 내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왕흥사에 대한 문헌사적 연구가 한계에 봉착하여 더 이상의 연구 진전이 없는 반면, 고고학적 성과는 꾸준히 축적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연구 성과 역시 ‘백제왕 昌’ 재위 24년(577)에 왕흥사가 건립되었음을 전제로 하면서 모든 연구 성과의 결과들이 위덕왕대로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능사로 대표되는 6세기 중반에서 미륵사지와 제석사지로 대표되는 7세기 전반으로의 과도기적 양상의 형태를 왕흥사지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명문에 대한 재검토와 해석 시도


본 논문에서는 기존 연구의 결과론적 해석을 배제한 뒤 고고학적 성과와 사리기 명문 내용을 재검토 하고자 하였다. 새로운 자료의 발견은 한국 고대사의 이해를 심화시켜주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문헌 기록과의 연결성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본고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리기 명문에 대한 재검토와 그에 따른 해석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제8차 왕흥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청동사리합 명문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보다 23년이나 먼저 왕흥사가 축조되었음을 밝혀주는 근거가 되어왔다. 특히 명문의 ‘백제왕 昌(=曷)’은 왕흥사의 건립 시기를 위덕왕대인 577년으로 보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왕흥사 목탑지 심초부에서 발견되는 특성은 미륵사지와 제석사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7세기의 양식에 가까우며, 명문 내용 역시 달리 해석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능성을 모두 차단한 채 건립 주체를 ‘위덕왕’이라는 점에만 초점이 맞추어졌다. 본고에서는 왕흥사 목탑지가 갖는 특성이 무왕대, 즉 7세기 전반의 양식과 유사하다는 점과 함께 명문의 ‘昌(=曷)’字를 ‘昌’이 아닌 ‘曷’字로 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명문의 내용을 새롭게 해석하였고, 사리합은 아들을 잃은 무왕을 위로하기 위해 당 태종이 하사한 물품이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물론 본고는 그간 명문 판독과 내용에 대한 문제제기가 학계에서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시론적 형태의 문제제기가 될 수 있겠지만,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와 문헌사적인 연구 성과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昌(=曷)’는 ‘昌’와 ‘曷’, 두 문자로 판독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를 반영하기 위해 동시 표기함(편집자 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