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134호] 매체로서 화폐

매체로서 화폐 


윤병철 _ 대구가톨릭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화폐 매체의 사회적 의의

황금으로 상징되는 화폐의 힘을 그리스 신화는 미다스왕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사실, 화폐는 인간의 한없는 욕망과 모든 가치를 황금의 가치로 바꾸어 버리는 물신화(物神化)에 대한 철학적 성찰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화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으로서 중요성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를 매개하고, 또 사회체계를 촉발하는 매체로서, 즉 한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체계의 매체로서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될 필요가 있다. N.루만은 사회를‘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체계’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인간의 모든 사회적 행위가 커뮤니케이션 행위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현실로서의 사회성을 구축하는 기본적인 과정이 커뮤니케이션 과정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커뮤니케이션 확장의 역사였으며, 또한 매체 발전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겠다. 오늘날 추상화에 의한 기호의 생산이 만연한 정보사회에서 언어나 확산매체만큼이나 일반화된 상징매체가 더욱 우리의 삶을 깊숙이 관통한다. 특히 화폐는 확산매체와 상징매체라는 이중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면서 사회적 과정과 일상생활의 섬세한 부분까지 개입해 들어오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화폐의 사회적 의의에 대하여 두 가지 주제로 나누어 논의해보자.


1. 사회체계, 생활세계의 식민화


사회체계이론 구축 요소로서의 화폐 

화폐는 T.파슨스, J.하버마스, N.루만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자신들의 ‘사회체계이론’을 구축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거론되었다. 즉, 이들은 근대사회의 출현 과정에서 경제부문이 사회의 나머지 부문들로부터 분화해 나오는 메커니즘을 ‘사회체계’라는 맥락에서 화폐를 다루고자 하였다. 파슨스는 화폐를 ‘일반화된 상징적 교환매체’로 보고 화폐라는 매체에 의해 경제적 영역이 어떻게 합리화의 과정을 거쳐 분화되었으며, 또 그것이 다른 하위체계들과 어떻게 통합과정을 이루어 가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한편, 파슨스 이후 체계이론을 보다 발전되고 섬세하게 제시한 루만 또한 화폐를 체계분화의 중요한 매체로 다루었다. 그는 사회체계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자기준거적 연산방식에 의해 유지되고 복제되는 체계로 보았다. 이때 매체는 체계분화의 촉매 작용을 하게 되는데, 근대사회에서 화폐매체에 의한 경제의 이차적 코드화 즉 지불/비지불의 코드로 보완되면서 경제체계는 완전히 기능적으로 분화되었다고 본 것이다. 한편, 하버마스는 언어적 상호이해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화폐 매체가 오히려 언어적 상호이해의 영역인 생활세계를 침식하고, 근대사회의 사회적 문화적 긴장을 야기하는 현상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고 보았다.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행위 이론

J.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행위 이론’의 기본적인 핵심은 이러하다. 그는 근대사회 연구를 위하여 ‘체계’와 ‘생활세계’가 분리되어 가는 역사적 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자신의 이론의 중심에 두고 있다. 근대 사회의 전개와 함께 합리화가 진전되는데, 체계의 영역에서는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이, 생활세계의 영역에서는 의사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이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분석수준에서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는, 처음에는 별로 분화되지 않은 사회체계와 외연이 같았던 생활 세계가 합리화되면서 자율화된 조직들이 탈언어화된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에 의해 체계분화가 진전되고 생활세계는 점점 더 여러 하부체계들 중의 하나로 침식되어지는 것으로 본다.

그는 체계분화를 4가지 메커니즘으로 설명하고 있다. 유사한 구조를 가진 단위들이 분화하는 ①교환에 의한 환절적 분화와 ②권력에 의한 계층화, 그리고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유사하지 않는 단위들이 분화되는 ③권력에 의한 국가적 조직화(근대적 행정조직)와 ④조정매체의 매개에 의한 시장 확대가 그것이다. 이와 같이 진화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각 체계분화의 메커니즘을 생활세계에 정착시키는 제도화의 과정을 그는 환절적 분화에서는 친족관계의 형태로, 계층화는 신분질서의 형태로, 국가적 조직화는 정치지배의 형태로, 그리고 시장의 확산은 사적 법인격체들 사이의 관계라는 형태로 진전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이때 정치적으로 계층화되고 경제적으로 구성된 계급사회가 화폐매체에 의해 긴밀하게 조정되어 결국 국가기구는 매체에 의해 조절되는 하부체계인 경제에 의존하게 된다고 보았다. 하버마스의 설명을 좀 더 따라가 보자.

의사소통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생활세계에서는 언어적 상호이해의 합리성 잠재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활세계가 미리 제공하는 그러한 합의에 더 이상 소박하게 의지하지 않는, 의견 불일치 해소를 위한 상호이해를 위한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위험과 요구를 해결하는 조정 메커니즘으로서 언어적 상호이해를 대체하는 매체(특히 화폐나 권력)를 통해 비용과 위험을 감소할 수 있다고 보았다. 행위의 조정 또는 합의가 이와같이 언어에서 조절매체로 전환된다는 것은 우리의 상호작용이 생활세계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폐나 권력과 같은 상호 조절매체는 언어적 합의 형성과정을 회피하고, 가능한 가치의 크기에 따라 목적합리적으로 처신하도록 하며, 다른 상호작용 참여자들의 결정에 대해 일반화되고 형식적인 전략에 따라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제 항상 상호이해 과정의 토대였던 생활 세계적 맥락은 경제적 활동의 행위조정보다 더 이상 중요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버마스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합리화에서 언어는 대체될 수 없는 상호이해의 매체이지만, 목적합리적 행위의 부분체계들에서는 화폐와 권력과 같은 조절매체들이 행위를 조정한다고 본 것이다. 이제 이러한 매체들에 의해 분화되는 하부체계들은 생활세계로부터 스스로 자립하여 확장된 우연성의 공간에서 결정을 조건화한다는 점에서 생활세계의 기술화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보았다.


매체로서의 화폐’에 대한 하버마스의 견해

한편, 하버마스는 화폐가 단순히 조절매체로 기능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한‘체계신뢰’를 불러일으킬 수 없고 제도적 정착을 필요로 한다고 보았으며, 특히 화폐의 제도적 정착은 소유와 계약에 관한 사법적(私法的) 제도를 통해 성립한다고 하였다. 근대사회에서 법적 틀의 변화는 정치 및 전통과 연관된 가치나 활동으로부터 경제생활이 분리 되어나오는 것을 촉진시켰다. 이때 화폐는 계약을 통해 사적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있는 자본과 노동을 상징화하게 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체계가 환경적 복잡성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클수록 그 체계는 보다 더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것과, 이것이 더 전문화된 하위체계로의 분화를 초래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체계분화가 진전됨으로써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지배해야 하는 생활세계가 체계의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 생활세계 의식은 왜곡되고 사회적, 문화적 긴장이 야기된 근대사회를 하버마스는 체계에 의해 유발된‘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의사소통의 자율과 평등이 확보된 생활세계를 도구화하는 체계의 압박이 주관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은 합리화라는 기만적 성격,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합리성을 강조하는 허위의식의 성격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체계는 그자신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가능한 상호이해의 상호주관성 형식을 장악하는 하나의 구조적 폭력이 일어난다고 하버마스는 보았다. 구조적 폭력은 의사소통 참여자들에게 객관세계, 사회세계, 주관세계의 연관성이 전형적인 방식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도록, 의사소통행위의 형식적 조건 속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행사되게 된다. 그러므로 화폐가 매개된 사회적 상호작용에서는 흔히 생활세계에서 발견되는 이중적 우연성(double contingency), 즉 타당성의 주장을 주장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그 주장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에 관한 물음은 모두 제거된다. 왜냐하면 타당성이 화폐 자체 가운데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화폐 코드화


코드화된 세계 속의 인간

인간은 코드화된 세계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V. 플루서는 문자 발명 이전엔 인간은 그림으로 코드화 했으며, 인쇄 발명 이후 새로운 알파벳 코드의 지배가 시작되었고, 최근 컴퓨터의 발명이후 디지털 코드가 출현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무장하도록 만든다고 하였다. 코드는 상징체계다. 우리는 그 상징이 의미하는 것과 접촉하지 않지만 코드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것이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지만,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코드화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코드화된 세계인 것이다. 코드화는 확실히 현실의 복합성을 축소하고(루만), 의사소통의 여러 측면들 중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드는 측면을 제거해준다(하버마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사회에서는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코드가 이용된다.

 코드화의 일반화된 형식은 양가적인 코드로 커뮤니케이션을 구조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컨대, 과학에서는 진리/비진리, 법률에서는 합법/불법, 경제에서는 지불/비지불 또는 소유/무소유, 정치에서는 관직점유/비점유 등과 같이 구조화 될 수 있다. 물론 (기능적)체계(또는 영역)들에서 작동되는 주도적 코드는 사회에 따라 다양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주도적 코드가 경제에서 지불/비지불, 정치에서 정당당원/비당원 등과 같이 각기 다른 체계(영역)에서는 서로 다를 수도 있다. 코드가 갖는 사회학적 의미는 곧 코드에 의해 인간은 프로그램화된 특별한 삶의 방식을 낳는다는 것이다. 근대사회에서 종교와 정치에 대한 경제의 필연적인 분화의 과정을 루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원래 경제는 모든

소유물에 관계하는 각 참여자의 소유권에 의해 코드화되었지만 소유권, 특히 토지의 소유권은 충분히 분화될 수 없었고, 봉건사회에서 소유권은 거의 강제적으로 정치적 권력의 토대였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화폐에 의한 경제의 코드화, 즉 소유/무소유의 코드가 지불/비지불의 코드로 보완되면서 경제체계는 종교와 정치로부터 완전히 기능적으로 분화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화폐의 코드가치가 가져온 탈도덕화

화폐는 확실히 코드적 속성을 가졌다. 이것은 화폐가 선호하는 구조를 내장하고, 선호하는 상징적 표현을 산출하고 매개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선호된 상징적 표현은 수신자에게 어떤 제안을 전달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억압하게 된다. 물론 제안과 수용의 과정은 하버마스가 이야기하는 의사소통적 합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체의 이분법적 코드의 논리(지불/비지불)에 따른 자동적 연산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화폐는, 모든 거래자들이 상대 거래자의 개인적 정보보다는 가격에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경제적 교환에서 최선의 거래를 이끌어내고자 한다는 가정을 코드화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격 메커니즘은 거래의 매개역할 및 가치의 저장 수단 역할이 화폐에 의해 동시에 수행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에너지가 많이 드는 물물교환의 절차를 생략하고 특정 양의 화폐를 무엇과도 바꿀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행위자들로부터 기대되는 것은 오히려 행위 상황에 대해 객관화하는 태도, 그리고 행위의 결과를 중심으로 하는 합리적 태도이다. 수익성은 성과를 계산할 때의 척도가 된다. 이와 같이 근대 경제체계는 화폐 속에서, 화폐가치의 획득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의미를 찾으며, 나아가 경제적으로 관련된 모든 연산과정들이 화폐와 연관되게 된다. 그러므로 전통사회에서 윤리와 도덕, 종교, 자연법에서 가지는 코드가치로부터 탈도덕화는 화폐 메커니즘을 통한 분화된 경제체계의 경험에서 더욱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탈도덕화된 화폐매체에 의해 조절되는 상호작용으로의 전환을통해 행위자들은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화폐의 지불/비지불의 양가적 코드는 하나의 가치를 기준으로 제 3의 가치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배고픔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한 조각의 빵과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의 치료, 배움에 대한 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교육 등과 같이 인간이 최소한의 존엄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하는 것들까지 철저히 화폐의 지불/비지불 코드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폭력이다. 정치 체계에 상징적 조절매체인 권력의 코드는 언제나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를 희생시키는 가운데 행사된다. 따라서 권력을 제도화하는 정치체계에 대해 신뢰를 갖는다는 것은 화폐의 경우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정당화를 생활세계로부터 이끌어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폐는 교환의 과정에서 서로 상반되는 이익을 매개한다는 점에서 거래가 근본적으로 어느 한편에 불이익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봄으로써오히려 그 비정함이 은폐되고, 그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처럼 오인하게 된다. 이러한 화폐코드의 비정함을 G.짐멜은「돈의 철학」에서 아주 비꼬는 어조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사람과 사물을 순수하게 합리주의적으로 취급하는데는 확실히 무엇인가 냉담한 면이 있다... 존경, 친절 및 섬세한 감정과는 무관한 순전히 논리적인 결론으로서 나타날 뿐이다. 화폐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논리적 일관성과 순순한 객관성을 의식하고 있을 뿐이며... 삶이 이제는 더 이상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활양식의 객관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1)



“누가 주인일까?”(사진 출처: 김일혁의 인스타 페이지 illlama) 인간은 항상 돈을 소유물로 생각을 해왔지만, 사실은 사진과 같이 돈의 애완동물이 되어 돈을 쫓고 있다. (편집자주)



군림하는 화폐코드

이제 화폐 코드화는 경제적 영역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그럼으로써 우연적 상황에 대처할 있는 능력을 증가시킬 수 있지만, 한 사회에서 화폐코드의 강화와 적용범위의 확장은 다른 체계(또는 영역)에 대한 식민화의 가능성을 갖는다. 과거, 영혼의 구제, 정치적 지위, 직업의 위신, 기부금, 예술의 향유, 재판 등과 같은 일들이 화폐매체에 의한 지불/비지불의 코드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으나 오늘날 이와 같은 것들이 지불/비지불의 코드 가운데 흡수되면서 쉽고 깔끔하게 처리되고 있다. 이제 화폐의 지불/비지불 코드는 우리가 경제적이라고 타당하게 지칭할 수 있는 활동의 범위를 넘어서 군림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세포의 과잉증식이 암을 발생하듯 다양한 사회 병리적 문제를 야기한다. 매춘, 매매혼, 관직 매매와 뇌물, 성직매매, 유전무죄 무전유죄 등 사적 영역과 공공영역 구분할 것 없이 화폐코드에 의해 함께 침해당하고 있다.

**위 글은 필자의“화폐,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사회체계”,「 현상과 인식」(32권 4호, 2008)에서 발췌 수정한 내용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1) G. 짐멜(1983),『 돈의 철학』, 한길사, p. 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