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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6호] 탐방보고서-지뢰의 땅, 캄보디아

지뢰의 땅, 캄보디아



조소영 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지뢰의 땅, 그리고 지뢰 피해 군인

캄보디아 내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유적지나 명소들의 입구에서는 본인들이 지뢰 피해 군인들임을 세계의 다양한 언어로 명시하는 현수막을 옆에 두고 악기를 연주하는 무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국인 관광객이 지나갈 때면‘아리랑’연주도 흔히 들을 수 있다. 캄보디아 내의 관광명소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캄보디아 군인 출신 악단이 곡을 연주하는 이 흥미로운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군인들은 캄보디아 내전 당시 참전해 지뢰폭발로 인해 팔과 다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거나, 심한 경우 (그러나 대부분은) 수족 이 절단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악기를 연주함으로써 관광객들에게서 기부금을 받기를 호소하며, 자신들의 연주가 녹음된 CD를 판매함으로써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지뢰 피해 군인들은 어쩌다, 언제, 어디에서 이런 피해를 보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캄보디아 내에서 수차례 치러진 전쟁에서 시작된다. 캄보 디아 내에서 치러진 전쟁은 무수히 잦지만, 본고에서는 캄보디아의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이후 20세기에 치러진 전쟁들로 한정한다. 캄보디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뢰가 매설된 국가 중 하나이다. Cambodian Mine Action Center(CMAC)의 공식적인 발표 로는 400만~600만개의 지뢰가 매설되었다고 하나, 혹자는 이 수치가 지나치게 축소되었음을 문제로 들며, 캄보디아 전역에 1,000 만 개 이상의 지뢰가 매설되었다고 주장한다. 캄보디아 인구가 약 1,500만 명 (2014.07. est. CIA 기준) 인 것에 비하면 매립된 지뢰의 수는 상당하다.



베트남전을 시작으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캄보디아는 1949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의 독립을 인정받아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에 의해서 통치되던 중 1965년 2월, 미국이 북베트남의 공습을 단행(베트남 전쟁)하면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당시 미국은 인도차이나의 안정과 베트남 전쟁의 수행을 위해 베트남의 인접 국가인 캄보디아에 친미적인 정권을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 상황에서 1970년 3월 17일 친미 성격의 론 놀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시아누크 일파를 추방하고 크메르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론 놀은 정권을 탈취하면 서 미군을 지원해 베트남 전쟁에 자국을 참전시켰다. 이 배경에서 미군은 1968년부터 공중 폭격을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과 더불어 캄보디아 전역으로 확대한다. 이 폭격으로 수십만 명의 농민이 희생되었고, 대량의 난민이 발생해 농업 생산량은 격감했다. 한편 쿠데타 이후 시아누크는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해 반(反) 론 놀 공동 투쟁을 호소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이었던‘크메르루주’의 도움을 받아 정권을 재탈취하고자 시도해 론 놀 정권과의 내전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71년 1월, 미국은 론 놀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군의 일부를 캄보디아에 투입했다. 론 놀은 군사 독재체제를 선언하고 신헌법을 공포했다. 그러나 1973년 3월 29일 미국이 베트남으로부터 완전 철수를 했기 때문에, 론 놀은 강력한 후원자를 잃게 되었고, 결국 론 놀은 하와이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크메르루 주가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였고 1976년 1월〈캄보디아 민주헌법> 을 공포하여, 국명을‘민주 캄푸치아’로 개칭하였다.



죽음의 들판, 킬링필드1)

프놈펜 함락 후, 크메르루주는“도시 주민의 양식은 도시 주민 자 신이 경작한다.”라고 선언하고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 자본가, 기술 자, 학자, 지식인 등의 모든 재산과 신분을 박탈시켜 교외의 농촌으 로 강제 집단이주를 단행했다. 그들은 농민으로서 농업에 강제 부역되었고, 대부분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킬링필드, 즉‘죽음의 들판’이라는 말은 본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킬링필드>에서 처음 쓰인 표현으로, 크메르루주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들의 유해가 들판에 마구잡이로 뒹굴고 있는 것을 영화의 주인공이 보고 처음 쓴 표현이다. 크메르루주는‘민아 ’를 세고 3년 7의 통 치안 급적 사주의 정책과 반 베트남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캄보디아를 개조하기 시작했으며, 도시민들을 미리 계획한 대로 농경지대와 시골 지역 으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이상적인 농촌 공산사회를 건설한다는 미명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공산혁명을 꿈꾸는 크메르루주에게 지식인계층은 처단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필자는 당시 목격자의 증언을 들을 기회가 있었 는데, 당시 크메르루주 세력들은 마을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펜을 손에 쥐여주고, 펜을 제대로 잡으면, 즉 글씨를 쓸 자세가 되어있는 사람이라면 가차 없이 처형했다고 한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의 여부와 관계없이, 당시에는 펜을 잡는 방식이 살인 여부의 근거가 되었다. 킬링필드 시기에 크메르루주가 얼마나 잔혹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들과 기록, 실존인물들의 경험담과 목격담은 상상을 초월한다.‘베트남 사람’이라는 죄밖에 없는 국경선 너머의 동료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총탄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피살자 100~150만 명 중에서 수천 명은 괭이와 삽으로 머리를 쳐서 죽였 다. 또한 이 같은 폭력적인 경향을 부추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10~12세짜리 어린 소년들을 전투원과 간부로 선발했다. 이렇게 해서 크메르루주는 아직 제대로‘사회화’하지 않은 군대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동정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린이 군대였다. 더불어 반동분자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구실로, 잡힌 사람들의 3대 를 없애버렸는데 심지어 젖먹이들까지 살해했다. 이 아이들이 훗 날 보복할 수 있으므로 이를 방지한다는 이유였다. 갓난아이들이 나 애들을 마치 개구리를 잡아 길바닥에 패대기쳐 죽이듯 팔이나 다리를 잡고 몸뚱이를 바위나 시멘트 바닥 또는 통나무 등에 내려 쳐 죽였으며 심지어 마을에 스피커를 달아서 온 마을 사람들이 희 생자가 사망하는 소리를 듣게 했다. 이러한 여파로 아직도 캄보디아, 프놈펜의 킬링필드 지역이나 시골마을에서는 홍수가 날 때 종종 유골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고 하니, 피해자들의 정확한 수치는 아직까지도 파악이 어렵다.



킬링필드 이후 - 중국과 소련이라는 두 고래 사이에 끼어버린 새우, 캄보디아

폴 포트의 공포정치는 베트남의 군사개입을 통해 막을 내리게 된다. 이른바‘사회주의 패권’을 다투던 구소련과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캄보디아(친 중국) - 베트남(친 소련) 두 나라는 1970년 대 후반 잦은 국경 분쟁을 벌였고, 소련을 등에 업은 베트남은 10만 의 군 병력을 동원해 캄보디아를 침공해 개전 2주 만에 프놈펜을 점령했다. 베트남은 침공 명분으로“폴 포트 정권의 공포정치를 끝 내고 캄보디아 인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기 위함”임을 주장했다.

이때 사용된 대량의 군수물자는 북 베트남군이 남부를 제압하 기 위해 은밀하게 비축하고 있던 것과 미군과 구사이공 정권이 남긴 것이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내었다. 그리고 친베트남계의 헹 삼린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이 숨은 폴 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렸으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폴 포트 정권, 즉 크메르루주들은 쫓겨 가며 최후의 수단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지뢰를 매설했고 이듬해 2월에는 중국군이 캄보디아 침공의 보복으로 베트남을 공격했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전쟁 경험이 풍부했고, 사기와 숙련 도도 높았다. 소련으로부터 받은 군사 원조와 미군이 버리고 간 대량의 병기를 가진 베트남군은 중국군을 격파하였고, 3월에는 중국군을 국경 밖으로 물리쳤다.



지뢰는 제거되어도 트라우마는 제거되지 않았다.

내전이 끝난 후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발탄으로 야기되는 피 해는 현재진행형이며 지뢰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고초를 겪을 뿐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다.

지뢰 폭발 사고로 인해 나는 다리를 잃었고, 자신감과 자 존감도모두잃었고내삶은절망과슬픔으로만가득찼 다. 다른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수치심과 슬픔을 견딜 수 가 없다. 사고로 인해 나는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늘 고통을 받고 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구걸밖에 없으며, 구걸하기 위해 어디든 가야 한다. 가는 곳마다 나는 정상적인 사람들과 내 자신을 비교할 수 밖에 없고,이는나를또다시힘들게한다.나는 마치 지옥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

위의 인용된 글은 캄보디아인 Hay Loeuth씨가 지뢰 폭발로 인 해 다리를 잃은 후 본인의 상황을 담은 편지글의 일부이다. 일부만 읽었을 뿐이지만 깊은 절망이 와 닿는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을 캄보디아 내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개발도상국, 최빈국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캄보디아에서는 지뢰의 위험성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계층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 위 험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혹은 호기심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굴곡진 캄보디아 현대사의 여파는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지뢰제거 사업이 진행중이긴 하지만, 그 속도가 느릴뿐더러 이미 피해를 본 사람들에 대해서 캄보디아 국가 차원에서의 어떠한 보상체계도 없이 해외 원조에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토가 정상화가 될 때 까지는 전문가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짧게는 20년부터 크게는 100 년까지 걸린다고 예측하니, 지금도 동남아 최빈국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는 캄보디아로서는 그리 밝은 전망은 아니다. 그러나 지뢰매설의 피해국가들 중에서 캄보디아는 가장 빠른 제거 속도를 보이고 있으며, 기계와 사람 뿐 아니라 최근에는 지뢰를 냄새로 탐지하는 쥐까지 투입되었다 하니 그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

지뢰의 나라, 혹은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로만 알려진 캄보 디아는 1,000여 년 전인 11~12세기 무렵 앙코르 제국 시절 인접 국가인 태국, 라오스, 베트남으로부터 조공을 받을 만큼 강성한 국가였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앙코르와트 사원은 캄보디아의 지난날 번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 유려한 역사를 가진 캄보디아의 영토가 하루빨리 재건되기를 기대한다. 




1) 1975년 캄보디아 내 폴 포트의 급진 공산주의 무장단체이던 크메르루주 정권이 론놀 정권을 무너뜨린 후 1979년까지 노동자와 농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최대 200만 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부유층을 학살한 20세기 최악의 사건 중 하나이다. (출처: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편집자주) page14image7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