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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8호] 웃기지도 않는 세상, 그러나 함께 울고 웃으며_하승우(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웃기지도 않는 세상, 그러나 함께 울고 웃으며...

 

 

 

하승우 _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인재(人災)와 기민(棄民)

땅이 흔들리고 컵이 떨어져서 깨지고 도로가 갈라지기도 했다. 책에서나 봤음직한 지진이다. 지진이야 옆 나라 일본의 일이지 우리하고 무슨 상관인가,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자연재난까지 두려워해야 한다. 더 우울한 건 지진의 진원지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원자력발전소가 밀집된 지역이다. 한 번의 사고로도 영남권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변할 수 있다. 더구나 자연재난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치지 않는다. 여름에는 뙤약볕에 일하러 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놀리듯 매일 폭염경보 문자가 날아왔는데, 정작 지진 때는 아무런 경고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2012년에 울산·양산단층이 활성단층이라는 연구보고서가 나왔는데도 대처는커녕 신고리 5, 6호기 신규원전을 짓겠다며 나서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옆의 주민들은 내일 뜨는 해를 볼 수 있을까’, 라는 심정으로 살고 있고, 실제로 30년의 수명을 다한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재가동되고 있는 경주시 나아리의 주민들은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2년 동안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데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공포에 질려서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한국은 전 세계 1위의 유전자변형농산물(GMO) 수입국이다. CJ제일제당과 대상, 사조해표, 삼양사, 인그리디언코리아 다섯 개 회사가 지난 5년 동안 수입한 GMO농산물의 양이 1천만 톤이고 주된 품목은 대두, 옥수수, 유채이다. 이 많은 양의 콩과 옥수수, 유채는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GMO의 안전성이 논란이면 정부가 나서서 이런 부분을 밝혀야 하는데, 이 자료는 경실련이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을 통해 어렵게 구한 자료이고 세부내용은 지금도 알 수 없다. 왜 정부는 시민들에게 정보를 공개하지 않을까? 누가 뒤에서 웃고 있을까?

한 농민이 대통령의 쌀값 공약 이행을 요구하다 물대포를 직사로 맞았고 317일간 병원에서 투병하다 지난 925일 타계하셨다. 사전 경고와 곡사, 짧은 직사의 순서를 지켜야 한다는 안전수칙이 지켜지지 않았고 고인을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달려온 앰뷸런스에도 강력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도 관련 동영상과 자료들이 쏟아지는데, 지금도 경찰과 정부는 사과조차 않고 있다. 외려 경찰과 검찰은 정확한 사인을 밝혀야 한다며, 병원에 쌓인 317일간의 의료기록을 무시하고 부검을 하겠다며 유족들의 마음을 짓밟고 있다. 경찰과 검찰의 칼날이 파고들어야 할 곳은 한 농민이 아니라 권력형 비리가 쏟아지고 있는 청와대인데, 애꿎은 사람들만 괴롭히고 있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힘을 가진 사람들이 시킨다고 나 몰라라 무조건 따르기만 하면 그것이 사람인가? 이런 세상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유가족을 뒤로 하고 미소를 지으며 청문회장을 나서는 경찰청장처럼.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기민(棄民)이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버림받은 시민들, 시민이지만 시민으로 호명되지 않는 사람들, 시민이지만 자기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은 어떨까? 우리는 시민일까? ‘헬조선이라는 봉건왕국에서 시민은 무슨 시민인가? 얼마 전 교육부 공무원의 말처럼 우리는 기득권층이 보기에 개·돼지에 불과한 존재가 아닐까?

 

 

기득권의 나라와 민중의 나라

기득권층도 우리처럼 살고 있다면, 우리와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면, 우리와 같은 감각으로 같은 상식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가 이럴 수 있을까? 이미 기득권층과 우리의 삶은 다르다. 청년들의 주식인 라면과 떡볶이, 그렇지만 삼성가의 사위였던 임우재씨에 따르면 그 아들은 라면이나 떡볶이, 오뎅, 순대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금수저/흙수저논란처럼 한국에서는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는지에 따라 그 삶의 궤적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수성가는 옛말이고 이제는 물려받아야만 중산층의 삶을 살 수 있다.

동국대 김낙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에서 금융자산을 10억 원 이상 가진 부자는 200884000명에서 2013167000명으로 2배나 불어났다(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시기와 겹친다). 그리고 2010년을 기준으로 상위 10%가 전체 국민 소득의 약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10대 대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2006277천억 원에서 20141485천억 원으로 5.4배나 증가했다.

반면에 2013년 말 기준으로 가계부채는 총 1,089조원으로 전년대비 67조원이 늘었는데, 그 증가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서 경제성장률의 2배에 달한다. 그리고 국민 1인당 약 2,100만원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고, 비정규직/일용직 일자리만 계속 늘어나니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이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국민소득 2만 불, 3만 불을 외치는 구호가 의미 없는 것은 그렇게 부풀려진 경제가 우리의 실제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이 구호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또 삶은 쉽게 바뀌기 어렵다.

매일매일 끼니를 걱정하고 매년 오르는 집값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요구하는 것은 사치이다. 아니, 그런 세상이기에 우리는 타자에게는 열심히 웃음을, ‘감정노동을 요구하기도 한다. 왜 웃으면서 돈을 받지 않느냐고, 왜 웃으면서 고객을 응대하지 않느냐며 따지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헬조선에서 웃음은 지불에 대한 대가이고, 사람들은 억지로 웃으며 지친 일상을 이어간다. 옛날 같으면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누가 외치고 일어서면 맞장구라도 쳐줬지만, 헬조선에서는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사람 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 훌륭한 처세술이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이런 세계이기에 우리는 냉소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 시대의 냉소주의란 단지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그것을 비웃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냉소주의는 그래봤자 별 수 없다는 기득권층의 조롱이자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두려움이다. ‘나만 피해를 입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은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기득권의 나라는 더욱더 강해지고 민중의 나라는 더욱더 갈라지고 약해진다. 그리고 문제는 이 냉소가 현실을 바꾸기는커녕 더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냉소주의를 극복해야 할까? 70여 년 전 영국의 철학자 러셀(B. Russell)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책에서 왜 서양의 청년들이 냉소적인가?”라고 물으며 종교, 국가, 진보, 아름다움, 진리와 같은 과거의 이상들이 청년들의 가슴을 사로잡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다. 러셀은 단순히 목사나 선생들이 낡아빠진 미신의 녹슨 병기고에서 낚아 올린 이상들보다 좀 더 나은 이상을 설교하거나 젊은이들 앞에 제시하는 것만으론 현대의 냉소주의를 치유할 수 없다고 봤다. 그렇지만 러셀은 우리의 스승들을 교육시켜라는 다소 진부한 처방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진부한 처방이 한국사회에 통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건 공리이지만,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공리는 분노보다 냉소를 낳기 쉽다. 이 냉소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무의미해진 시민의 권리목록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웃픈 현실에서 서로 웃어주는 세상으로

노력해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냉소의 근원은 자기 자신의 힘이 매우 약하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내 힘이 강하다고 생각하면 뭐라도 해보려 할 텐데 내가 약하다고 여기니 누구도 나서지 않으려 한다. 내가 약하니 저 더럽고 부패한 인간들에게 지배를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헬조선에서는 사람들의 자신감과 자긍심이 짓밟히고 너덜너덜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정치는 무기력해질 뿐 아니라 위험해진다.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냉소가 냉소로만 끝나지 않고 주변의 약자들에 대한 혐오나 폭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성이나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나 폭력이 끊이지 않는 건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겐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 Fromm)희망의 혁명에서 희망은 역설적이다. 희망은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며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일으키려는 비현실적인 태도도 아니다. 희망은 움츠린 호랑이 같은 것으로 덤벼들 순간이 왔을 때 비로소 덤벼드는 것이다. 지쳐버린 개량주의도 사이비 급진적 모험주의도 희망의 표현은 아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위하여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하며, 설령 일생동안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절망적으로 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했다. 비록 웃픈현실이지만 우리 자신이 희망의 근원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러면서 우리 각자가 다른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어준다면, 희망은 냉소를 이길 수도 있다.

그런 비빌 언덕이 꼭 물리적인 공간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서로에게 보내는 웃음도 그런 비빌 언덕일 수 있다. 그리고 하나의 촛불들이 모여 수천, 수만의 촛불바다를 만들듯이 한번 터진 웃음은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어 어떤 권위도 그것을 쉽게 막기 어렵다. 더구나 그런 웃음은 입을 타고 퍼지며 복제될 수 있기에 언제든지 다시 터져 나올 수 있다. 소수의 웃음이 아니라 대중의 웃음으로 폭발한 그 웃음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사람이 힘에 눌리거나 설득을 당하지 않고 무조건 복종을 받아들일 때에만 권위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를 때리거나 아이와 논쟁을 벌이는 것은 권위의 상실을 불러온다. 왜냐하면 아이를 때리는 순간 부모는 권위가 아니라 폭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고, 아이와 논쟁하는 것은 아이와 부모가 동등하다는 점을 뜻하기에 권위가 서지 않는다. 즉 권위는 자신을 존경하는 곳에서만 확립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권위의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경멸이고 상대를 경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U.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듯, 권위는 웃음을 철저하게 금지한다. 마찬가지로 웃음이 터졌다는 것은 이미 그 권위가 무너지고 있음을 뜻한다. 금지되고 불온한 웃음은 냉소를 밀어내며 완강한 세상에 균열을 만든다.

단지 바라보는 수동적인 웃음이 아니라 직접 참여해서 땅을 치며 배꼽을 잡는 웃음은 세상을 뒤흔들 수도 있다. 더구나 억압의 대상만이 아니라 그 억압에 굴복했던 자기 자신마저 조소하는 양면적인 웃음은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그런 웃음은 자신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자신감이자 그 세계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자기에 대한 조롱을 동시에 뜻한다. 그 웃음은 사람들을 가르고 배제하지 않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끌어들일 수 있다. 웃어라, 그러면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