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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8호]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앞두고 함께 한다는 것 - <할머니의 먼 집>을 보고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앞두고 함께 한다는 것 - <할머니의 먼 집>을 보고

 

 

 

 

이근화 _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 한 후, 영화를 본다는 것은 내게 그리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취미생활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순간, 나는 내 스스로를 옥죄며 살고 있었다. ‘정말 봐야겠다.’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쉽사리 영화표를 구매하지 않았고 영화관 근처를 갈 일도 없었다.

최근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죽음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하는 고민은 지극히 나의 과거와 현재의 경험과 맞물리는 것들이다. 2년 전 돌아가신 나의 두 할머니, 현재 죽음을 앞둔 작은 삼촌의 삶은 앞만 보고 달려왔고, 달려가고 있는 나에게 엄청난 죄책감이자 극복해야 하는 무게로 남아있다. 그런 나에게 <할머니의 먼 집>은 바쁘다는 핑계로, 일상에 지친다는 이유로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피해온 나에게 여러 가지 메시지를 전해준 소중한 영화였다.

 

 

사진1 | 영화 <할머니의 먼 집> 포스터.

 

<할머니의 먼 집>은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를 할머니의 죽음을 앞두고 할머니와 손녀(이소현 감독)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자신을 먹이고 입혀준 외할머니의 자살 시도 소식을 듣고 이소현 감독은 할머니가 계신 화순으로 내려간다. 계획 없이 시작된 갑작스런 촬영으로 영상과 사진들은 뒤죽박죽 얽혀있고 일상의 서사도 섞여 있다. 화려한 연출도 존재하지 않고, 촘촘한 서사구조도 부재한다. 하지만 할머니에 대한 손녀의 사랑과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감정이 묵직하고도 진정성 있게 그려지며 영화는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전개된다.

구십이 넘은 할머니에게 화초는 자신이 길러내야 하는 유일한 존재다. 젊은 시절 자식들을 대신하여 손주와 손녀들을 키워 낸 할머니에게 더 이상 보살펴야 할 존재들이란 없다. 나이가 먹었으니 세상을 떠나야겠다고 습관처럼 말씀하시면서도 고독을 이기고자 할머니는 바지런히 집안을 쓸고 마당을 가꾸고 화초를 관리한다. 화순의 시골집에 함께 살던 첫째 아들이 집 안에서 실족사하는 사고를 당하자 할머니의 혼란은 가중되고 일상생활은 더더욱 힘겨워지기 시작한다. 먼저 간 아들에게 사다 주던 술을, 이제는 할머니가 마시기 시작하면서 손녀, 이소현 감독은 할머니의 막걸리 심부름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다. 막걸리를 마셔야 잠에 들 수 있는 할머니를 위해 손녀는 막걸리를 함께 마신다. 이소현 감독은 그런 할머니를 위해 매 달 일주일씩 동거생활을 지속한다. 구십이 넘었지만 손녀에게는 여전히 떠나면 안 되는 존재인 할머니를 위해 손녀 이소현 감독은 사랑하는 할머니의 임종을 준비하며 둘만의 추억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나는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 두 분 모두 건강이 좋지 않던 시기, 나는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병문안을 자주 가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병문안을 가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수척해진 얼굴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들을 뵙고 오는 날이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정말이지 불만 보면 달려가던 하루살이 같은 존재였다. 경쟁에서 지기 싫어서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자격증도 따고 대외활동에 영어공부까지 병행했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할머니들이 계신 고성과 통영에 내려가는 횟수는 줄어들었고, 할머니와 외할머니를 찾아뵙는 빈도도 감소했다. 오랜만에 고향 부산에 내려가는 날이면 지친 몸을 내방 침대위에 눕혀놓기만 했다. 당시 나는 할머니와 외할머니를 곁을 함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줄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었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른 채 그저 성공이라는 목표 하나에 몰두하며 모든 소중한 것들을 제쳐두었던 것이다.

좋은 기회라 생각되면 나는 지체 없이 낚아채던 무서운 아이였다. 캐나다에서 짧은 유학생활은 내 인생 가장 중요한 기회였다. 하지만 나는 그 곳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먼 이국땅에 다녀온다던 손녀에게 건강하게 몸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던 할머니가 다리통증을 호소하시다 생을 마감하셨다 한다. 어린 시절 나를 키워주셨던 할머니의 죽음은 시간과 공간이 멀어지자 크게 와 닿지 않았고, 나는 그 곳에서의 삶을 살아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캐나다에서 돌아와 할머니의 묘비 앞에 서자 나는 그제야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매정한 인간이었는지 깨달았다.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죽음은 내게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나는 스무 세살까지도 나와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직면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죽음을 내 눈으로 본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심지어 나는 장례식장에서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았다. 볼 수 있었지만 나는 피했다. 그 순간만 지나면 괜찮아 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일상이 흔들릴까 두려웠고, 회복하지 못할까 무서웠다. 누군가의 죽음은 슬프지만 한 번쯤 마주봐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두려워 나는 회피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나에게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을 줄은 그때는 몰랐다.

<할머니의 먼 집>의 손녀이자 감독인 이소현씨는 할머니의 마지막까지 함께해 드리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담아냈다. 할머니의 임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손녀이자 감독인 이소현씨는 부모님을 포함한 집안 어른들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할머니에게 영양제를 그만 맞혀 드리라는 엄마의 다그침에 한 달에 한 번 영양제를 놔 드리는 것이 내가 할머니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의 전부라 말한다. 과거 나는 죽음을 앞둔 나의 할머니들에게 무엇을 했었던가. 그저 내 삶을 살아가는 데에만 몰두했었다. 할머니를 만나러 갈 때면 용돈을 털어 단팥빵을 사들고 가던 유년시절의 나는 나이가 들면서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동물이 된 것이다. 유년시절보다 더 매정했던 스무 살. 그래서 나에게 할머니라는 단어는 지금까지도 후회와 죄스러움의 감정으로 남아있다.

사실, 영화 <할머니의 먼 집>을 봐야겠다는 결심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나에게 돌아가신 할머니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고, 동시에 지금까지 품어온 죄스러움을 약간이나마 씻을 수 있는 행위였으며,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반성의 시간을 가지겠음을 뜻한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예상하고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축복받은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바로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주변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소풍과 같던 삶을 마감할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이 영화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머지않아 나는 곧 고향 부산에 내려가야 한다. 갑작스럽게 건강이 악화된 나의 사랑하는 작은 아버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똑똑하고 당당하던 작은 아버지가 이제는 야위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마주하며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을까. 두렵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할머니의 먼 집>에서 할머니와 손녀(이수현 감독)가 함께 저수지로 산책을 나간다. 늙었으니 이제는 남편과 큰 아들 곁으로 가야한다 하면서도 할머니는 사람들의 씩씩한 발걸음을 보며 젊음을 부러워한다. 푸른 물이 가득한 저수지의 풍경을 보며 할머니는 말한다.

 

인자 가자. 깐닥깐닥 구경 잘했다. 어디 먼디 구경 온 것 맹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