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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9호] 재현체계와 근대성 - 재현의 탈근대적 배치를 위하여

재현체계와 근대성
- 재현의 탈근대적 배치를 위하여

 

 

원저자 _ 강내희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학장, 영문학/문화연구학자)
기획 및 편집 _ 신윤희

 

 

‘대의민주주의’의 민낯을 보게 된 2016년의 한국. 우리는 의문을 품게 된다. 누군가‘나(혹은 우리)’를 대신해서 의논한다는‘대의’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누군가를 대신해서 의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누군가가 누구이고, 어떤 입장(모습)인지를‘보여줘야’한다. 우리는 이것을‘재현(再現)’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논의는 거기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누군가 나의 의견이나, 나의 정체성을 대신해서 보여주는‘재현’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강내희(2000)의 논문 「재현체계와 근대성-재현의 탈근대적 배치를 위하여」(문화과학(24)) 에서는 오늘날 재현의 권력체계에 대해 분석하고, 현실을 바꾸어내기 위한 ‘재현의 정치’를 제안하고 있다. 아래는 그 논문 중 일부를 발췌∙요약한 글이다.

 

 

 

Ⅰ. 재현(representation) - 재현에 대한 다양한 이해

“재현”(再現)은 동사적으로 쓰일 때 “다시 나타남” 또는 “다시 나타나게 함”을, 명사적으로 쓰일 때는“다시 나타나는 것” 또는“다시 나타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재현은 대상, 행위, 상태, 사건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양상을 가진다. 우선 대상으로서 재현은 사진이나 그림으로 된 이미지처럼 어떤 것을 나타나게 하는 사물로서, 그것의 대신, 대리 역할을 한다. 올림픽경기장에서 한국을 상징하며
나부끼는 태극기가 좋은 예이다. 다른 한편 재현은 부재하는 어떤 것을 나타나게 하는 행위나 실천을 가리킨다. 재현자 또는 재현물은 그 존재 또는 작용을 통하여 그 안에 지금은 없는 어떤 것을 현전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림의 이미지가 그림 속에 실제 없는 나무나 풍경을 현전시키고, 언어가 그것이 언급하는 어떤 것을 마음의 눈앞에 가져오는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재현은 어떤 것이 다시 나타나 있는 상태이다. 그림 속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 이미지에 의해서 재현되는 대상은 이미지의 존재가 지속되는 한 재현된 상태로 있게 된다.마지막으로 재현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반복의 의미를 지닌다. 기억이나 회상의 경우는 지나간 일을 다시 되살리며, 배우가 어떤 인물을 재현하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경우에는 그 인물을 무대에 다시 나타나도록 만드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 효과는 재현 행위라는 사건으로 인해 만들어진다.

이러한 재현이 관심을 끄는 것은 그것이 늘 문제거리, 문제상황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재현들은 그 정체, 위상, 의미, 가치와 관련된 문제제기와 심문에 직면하기 일쑤이다. 이는 재현이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 즉 그“기원”이나 “원본”에 비해 차후적,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기원이나 원본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기껏해야 흉내를 내거나 기원의 부재로 인해 생겨난 자리를 임시로 차지할 수 있을 뿐이다. 재현이, 그 기원과 원본에 과연 충실한가, 원본을 왜곡시키거나 기원을 배반하지는 않는가, 원본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따위의 질문들에 곧잘 직면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결과 재현은 그것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지배되고, 후자의 기준에 의해 평가를 받게 된다.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도 그 자체로는 온전한 존재가 되지 못하고 늘 그것 아닌 다른 것, 더 근본적이라는 것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대리인, 번역자, 사절단, 대의원 등의 재현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재현자는 타자를 위한 존재,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을 지워버려야 하는 존재이다. 재현은 이런 점에서 유령과 같은 존재다. 이제는 죽어 없어진 자가 남아 있는 형태, 따라서 하나의 불가사의인 것이다. 이 유령과 같은 존재는 쉬 잡히지도 않으며, 파악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다. 재현이 이처럼 유령과 같다면 우리에게 커다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재현의 문제성은 오히려 그것의 문제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로 더 복잡해진다. 재현이 항상 직면하는 것은 더 기원에 가깝게, 더 원본에 가깝게, 즉 더“리얼”하게 되라는 요구이다. 재현은 대리나 대체, 아니면 흔적으로 치부 되면서도 동시에 원본을 원본답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리하여 재현은 복잡한 하나의 체계를 이루게 된다. 오늘 우리는 이 체계 때문에 재현을 골칫거리로여김과 동시에 당연한 것으로도 여기는 일상 속에서 살고 있다. 재현은 우리 일상에서 복잡성을 지닌 사회적 실천으로 나타난다. 또 재현은 오늘의 지배적 사회관계를 유지하고 통제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재현”의개념을좀더명확하게하자.“ 재현”은 영어의 레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의 다양한 한국어 번역어를 염두에 두고 사용되는 총칭적 개념이다. 레프리젠테이션은 맥락에 따라서“재현”만이아니라“대변”,“ 대의”,“ 대표”,“ 대리”,“ 표상”,“ 표현”,“ 연출”등서로연관되어있기는하지만동일하다고 할 수 없는 다양한 용어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재현이 정치, 문화예술, 평론, 철학, 사법 영역 등 그것이 사용될 수 있는 다양한 영역 가운데 어디에 출현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정치학에서는“대의”나“대표”로, 사법적 영역에서는“변호”혹은“대변”으로, 철학에서는“표상”으로, 예술에서는“연출”,“ 표현”, 또는“재현”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은 인간의 활동 영역과, 그것을 취급하는 학문 영역에 따라서“재현”이 상이한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Ⅱ. 재현체계와 권력관계 - 재현의 근대적 배치

오늘날 지배적인 사회적 활동들과 실천들에는 재현의 다양한 형태들이 스며들어 있으며, 근대성은 이런 재현들의‘체계’혹은‘배치’가 없다면 작동할 수 없다. 정치 영역만을 생각하더라도, 대의민주주의의 지배적 위치를 전제하지 않고는 오늘날의 정치를 이해할 수 없다. 의회제도를 전제하지 않은 근대적 정치를 사고할 수 없다. 의회제도의 주된 가정은 물론 의원이 선거구민을 대표할 권한을 부여받아 의회에서 구민 또는 국민의 의사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의원이 아무리 충실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하는 일이 대변, 대신, 대표의 역할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대의제도는 대표가 된 소수가 다수를 대변하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재현이 지니는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오늘의 지배적인 정치형태 또는 권력 행사는 대의에 의해 행해진다.

 

재현체계의 지배적 위치는 문화 부문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실 재현은 문화 예술적 표현이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양식, 즉 비유 일반에 내재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비유는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치환하여 표현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비유와 재현, 혹은“재현의 시학”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오늘날 그것이 지닌 사회적 의미와 영향력의 중요함 때문이다. 재현의 시학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표현매체들의 대대적인 등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18세기에 소설이 대중매체로 등장한 이후 근대사회는 다양한 표현매체들의 연이은 출현을 목격해왔다. 19세기 후반 이후 진행된 그래픽(graphic)혁명으로 인해,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더 폭발적으로 이루어진 미디어 기술 혁명으로 인해 표현과 재현의 수단 혹은 매체가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이미지, 기호의 범람이 근대사회의 특징을 이루게 된 것은 이 결과다. 문화영역에서 일어나는 표상과 재현의 기술화와 체계화를 전제하지 않고 노동자, 여성, 노인, 청소년, 동성애자, 하위문화 등 근대적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들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들을 상상할 수 있을까? 대중매체, 멀티미디어, 그리고 이들 기술 및 매체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이미지 생산 체계를 전제하지 않고, 기호의 정치경제를 감안하지 않고 근대사회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근대사회는 이같은 재현의 체계화 없이는 그 작동이 불가능하다.

정치, 문화, 경제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재현체계의 작동을 우리는 근대적 재현체계1) 또는 재현의 근대적 배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배치”는 어떤 분산체계(system of dispersion)를 일컫는다. “분산체계”란 그 내부에 속한 요소들, 성분들이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어떤 경우에는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언제나 일정한 관계를 맺게하는 체계이다. 정치적 대의, 사법적 대변, 외교적 대표, 문화예술적 재현, 경제적 교환2) 등은 각기 서로 다른 독자적 영역에 속하는 사회적 실천으로서 서로 거리를 두며 분산되어 있지만, 일정한 상호 관계를 이루며 어떤 복잡성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이 분산체계를 근대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화폐에 의한 상품 가치의 표상, 이미지나 기호에 의한 삶의 방식이 묘사와 표현, 다양한 재현적 실천과 제도들에 의한 정치적 이익의 대변이 근대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실천들이며,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요소들을 체계 또는 배치의 관점에서 파악하자는 것은 그것들이 어떤 구조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거대한 재현기계의 작동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 사법기관, 교육제도, 의회와 같은 근대적 사회 제도는 물론이고, 소설, 사진, 영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비디오, 디지털 등 갖가지 근대적 표현 매체 어느 것을 막론하고 재현 문제와 동떨어진 것은 없다. 부르주아 의회정치, 노동자-농민-빈민의 정치세력화, 여성, 청소년, 동성애자 등의 목소리 내기를 둘러싼 정체성의 정치 등 오늘날 사회적 관계들을 포괄하는 다양한 실천들도 모두 재현 문제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근대적 매체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미지들 역시 재현의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가 특정한 집단이나 지역, 혹은 지배적 삶의 형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타입들 역시 재현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재현의 근대적 배치를 가능하게 했을까? 근대적 재현의 특징은 무엇일까? 근대적 재현의 특징은 근대적 진리 개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대적 진리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또는 진실의 사실임, 진실임을 명확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 어떤 것을 명확하게 사실 또는 진실로 간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확실성이라는 기준이다. 확실성의 기준은 근대적인 진리-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확실성은 전근대에 지배적 기준으로 작용하던‘권위’를 대체하고 나타난, 사실성에 대한 근대적 기준이다. 전근대 혹은 봉건 사회에서 사실과 진실 여부의 판단은 전통, 신분 등의 권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어떤‘사실’의 사실성은 그것의 확실성 여부보다는 그 사실성을 누가 책임지는가에 의해, 예컨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권위자에 의해 보증 받을 수 있는가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데카르트 이후 판단의 근거는 전통의 권위가 아닌, 사실의‘확실성’으로부터 나온다. 이런 확실성의 추구 앞에서는 어떤 오래된 관습이나 전통도, 지체 높은 귀족의 약속이나 보증도, 학식이나 권위도 소용없다. 내가 진실로 믿는 것이 확실해지려면 내가 그 어떤 불확실한 것에 의해서 지배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야 한다. 확실성의 기준은 이런 회의 과정에서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실, 즉 내가 지금 이렇게 회의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로 만들어낸다. 데카르트는 이리하여‘확실하고 분명한’관념만이 진실에 속한다는 관점을 도출해낸다. 이 확실성의 기준을 통해 가장 명확하고 확실한가의 여부가 관념과 표상의 진리 가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사실의 확실성이 사실 판정의 기준으로 등장한 것은‘증거’의 등장이다. 이는 분명 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데올로기가 틈입할 여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증거의 등장은‘가시성’과 이와 연관된 인식 관행이 사실과 진실 확정의 결정적 척도로 등장함을 의미한다. 어떤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실천이 근대에 비로소 중요한 사회적 실천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확실하다는 것은 명확, 분명, 자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빛의 원리”로, 빛은 어두운 곳을 환하게 비추며 어떤 사실을 진리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 확실성, 가시성, 자명성, 빛의 원리 등이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이다.

이데올로기가 근대적 현상인 이유는 그것이 자연사나 유전학을 포괄하는 생물학과 같은 근대과학을 바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근대과학은 전근대의 종교적 원리나 교리와는 달리 사실성, 확실성, 명확성, 또는 과학성이라는“빛의 원리들”에 기반을 둔다. 이 지점에서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면, 이제 문제가 되는 지점은 확실성이 진실성, 사실성의 기준이 되는 순간이며, 독단, 권위, 전통, 교리 등이 과학에 의해 극복된다고 하는 순간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인종차별주의’라는 편견이 늘 근거를, 그것도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적 실천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늘 과학의 이름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노동착취, 인종차별, 성차별 등도 과학적, 객관적 근거를 이유로 자행되며, 개발과 자연 파괴도 과학적 기술에 바탕을 둔 효율성의 이름으로 일어난다.

과학 이데올로기 또는 과학주의가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그안에서 작용하는 확실성이‘사실’의 사실임 자체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확실성은 데카르트 이래 근대 전통에서 객관성의 준거로 작용했으면서도 동시에 주관적 기준으로도 작용했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비록 객관적 사실일 수 있다 하더라도‘내’가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관적으로 확증되는 사실이다. 사실의 사실임을 보증하는 확실성은 의심하고 생각하는 주체에 의해서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사실의 사실성 또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진 기준들에 의해서 입증된다. 확실성이 진리 기준으로서 권위를 대체하고 나면 이제 그 기준을 누가 어떻게 장악하느냐, 누구의 관념과 표상과 재현이 가장 유력한 방식으로 확실성을 보증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결국 확실성은 그 규정, 소유, 독점을 둘러싼 경쟁의 대상이 되고, 이 경쟁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일들이 결국 재현체계 안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실이나 진실도, 어떤 논쟁과 투쟁도 표현되거나 재현되지 않고 일어날 수는 없다. 확실성 확보를 위한 경쟁과 투쟁은 따라서 그 자체로 재현체계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 된다. 오늘의 재현체계는 누가 어떻게 장악하고 있는가? 근대 사회가 부르주아 지배체계, 가부장적 사회구조, 이성애 중심의 성 제도, 서구 중심주의 등의 지배체제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사실로 만들 수 있는 재현체계를 장악한 세력의 모습이 보인다. 정치, 사법, 외교, 과학, 지식, 문화, 경제, 언론, 학문 등 다양한 영역들로 구성되는 재현의 근대적 분산체계가 그것이다. 이 분산체계에는 이 체계를 유지하는 기능을 부여받은 주체들이 배치되어 있다. 규명해야 할 상황이나 사태를 다양한 영역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확실하고 분명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전문가들-관료, 정치인, 법률가, 언론인, 외교관, 과학자, 예술인, 지식인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재현체계의 전문가이면서 대체로 지배체계의 하수인 혹은 버팀목이다. 재현의 전문가들은 분과학문들의 경계를 지키며, 그 경계를 횡단하려는 “탕아들”을 이단으로 내몰며 파문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의 손에는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문학, 지역학, 동양학 등의 경계들을 과학의 확신을 가지고 지켜내기 위해 휘두르는 “과학”,“ 표준”,“ 규범”,“ 진리”,“ 학문”등의 열쇠꾸러미가 쥐어져 있다. 그러나 근대적 학문체계, 분과학문의 등장은 사실의 사실화 과정에 대한 일정한 독점적 체계의 역사적 구축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등 새롭게 등장한 근대적 분과학문들은 이들 분야에서 사실 혹은 진실로 간주되는 것들의 위상을 정립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은 진실과 진리의 독점이고, 과학의 전유이며, 비전문가 혹은 문외한의 배제 과정이기도 하다. 근대의 성립은 이러한과정 속에서 사람들을 길들이는 장치들, 제도들을 체계화하는 과정이었다. 재현체계에 대한 비판은 이런 점에서 필수적이다.

Ⅲ. 재현의 정치 - 재현의 탈근대적 배치를 위하여

재현을 불가피한 것으로 본다면 오늘 작동하고 있는 재현체계, 재현의 근대적 체계 역시 불가피하다. 재현에서 벗어난 상황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재현이 아무리 유령 같고 문제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재현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재현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재현체계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인가? 재현체계에 도전해야 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기원으로의 복귀가 재현체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될 수 없다면3) 우리에게 남은 길은 무엇인가? 결국 재현체계를 독점 문제로, 그리고 배치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재현체계가 특정한 사회적 세력들, 즉 부르주아, 남성, 이성애, 전문가, “서구”, 근대론자 집단 또는 세력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소수자들의“진짜”모습이 왜곡되는 체계가 작동되고 있다는 말이다. 노동자, 여성, 환경, 시민, 청소년, 동성애자 등이 흔히 현존의 지배적 재현체계를 비판하며 자신들의“진실”을 반영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서 작동하는 재현의 정치는 재현에 대한 접근권을 둘러싸고 이루어진다. 이 접근권 확보를 통해 사회 세력들은 자신들에게 덧씌워지는 부정적 이미지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시도한다. 이때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하나 있다. “진실의 반영”역시 재현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은 재현체계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은 재현체계를 없애고“진실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님을 말해준다. 재현은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어떻게 할 것인가, 즉 방식의 문제이다. 그 주체가 누구이며, 그것이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며, 그와 함께 어떤 권력이 만들어지는가를 따지는 문제인 것이다.

재현체계의 전문가들은 자신과 남을 재현하고 대변할 공적인 자격 또는 권력을 사회적으로 획득한 집단이다. 이들은 전문가로서 재현을 생산하고 수정하고, 조작하고, 유통시키고, 관리하고, 통제한다. 반면에 자신을 대변할 수 없는 집단, 자신의 재현자가 될 수 없는 사회적 집단에게 재현의 지배적 방식을 수정하는 기회를 획득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제3세계의 하층민, 비조직 노동자, 여성, 동성애자에게 현존하는 재현체계는 자신들을 끊임없이 주변화하는 장치이다. 이때 소수자는 말을 할 수 없는 존재, 스스로 대변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재현의 기회를 획득하는 투쟁, 즉 재현의 정치는 중대한 과제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기회를 획득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끝나지는 않는다. 기회를 얻더라도 재현체계를 그대로 온존시킨다면 근본적 변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현체계 비판은 따라서 전략적일 필요가 있다. 이때 핵심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재현체계란“배치”라는 사실이다. 배치는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재편의 대상이다. 어떤 사회적 실천도 배치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사회적 실천이라도 그 기능이나 효과를 바꾸려면 그 배치를 바꿔야 한다. 따라서 오늘 재현의 정치에 주어진 과제는 재현의 지배적 배치인 근대적 재현체계를 바꾸는 일이다. 즉, 재현의 근대적 배치에서 탈근대적 배치로 전환하는 일이다. 근대적 배치에서 재현은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영역들을 관통하며 분산체계를 이루며 이를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표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현실효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오늘의 생산관계, 권력관계, 사회관계 등을 포함한“현실”의 인정이 그것이다. 이 현실 인정은 재현의 작동에 의해 현존하는 사회관계들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므로 지배효과이다. 오늘날 핵심적으로 중요한 재현의 정치는 바로 이 새로운 재현의 배치 구성을 둘러싼 투쟁일 것이다.

 

재현의 탈근대적 배치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는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근대적 배치에서 탈근대적 배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재현의 개념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이 필수다. 이때 재현을 사건의 가능성으로 보며 재현들이 차이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재현은 불가피한“흔적”으로서 그 표면에서 변화가 발생할 수 있는‘사건의 장소’가 된다. 재현이 사건이 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재현의 정치’이다. 현실효과 생산의 측면에서 보면 재현의 정치는 현실의 모습을 바꿔냄으로써 현실을 바꾸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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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재현의 체계가 근대성과 함께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비유, 교환, 그리고 대변이나 대표로서의 재현의 역사는 비유적 표현, 상징적 교환, 사절단의 파견과 같은 행위와 함께 이미 전근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다만, 그 체계가‘배치’되기 시작하면서 근대성을 띠게된다.
주2) 재현이라는 말과 직접 관련은 없을지 모르나, 자본주의 경제행위에 있어서 지배적인 교환 형태인 상품 또는 화폐 교환 역시 재현 모델의 일반적 경향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교환은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화폐가 상품의 가치를 반영하고 재현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화폐의 가치는 이때 상품에 내재한 가치에 대한 표상이라는 위상을 가진다. 상품의 교환이 등가적 교환이라는 것은 교환되는 상품의 가치가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특히 이때 교환되는 것이 상품과 화폐이니 만큼 상품 가치와 화폐 가치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화폐의 그러한 기능이 환상이나 허상이라는 것은 차치하고, 화폐가 자명하게 상품의 가치를 표상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3) 재현의 특징은 그것의 명시적 기능인 대상 또는 원본의 재현을 결코 약속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원과 원본은 재현 안에서만 환기될 수 있을 뿐이다. 재현을 원본이나 기원과는 무관한‘시뮬라크르’의 견지에서 보면, 재현을 도식적으로 이해하는 이데올로기와 구별된다. 즉 이 시뮬라크르의 작동으로 인해재현이 차이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인식하고 사건의 가능성으로 보게되는 것이다. 여기서 허위로서의 재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을 벗어나게 되고, 재현은 참과 거짓의 어느 하나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현상, 혹은 필수적인 상태가 된다. 데리다의“텍스트 바깥은 없다”는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