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서강대대학원
- 총학생회장
- 푸코
- 논문
- 서강대학원 신문
- 조효원
- 파시즘
- AI
- 대학원
- 서강 대학원 신문
- 소통
- The Social
- 정치유머
- 아감벤
- 김항
- 서강대학교
- 이명박 정권
- 서강대학원신문
- 메타버스
- 나꼼수
- 서강대 대학원 신문
- 사회적인 것
- 서강대학원
- 서강대학교 대학원 신문
- 서강 대학원
- 서강대학교 대학원
- 비정규 교수
- 김성윤
- 불안
- 서강대 대학원
- Today
- Total
서강대 대학원 신문사
[139호]연구/세미나 - 타고르와 21세기: 미학적 인간의 재발견 본문
타고르와 21세기: 미학적 인간의 재발견
김은경 _ 비쉬바바라티 대학 미학 박사 졸업, 폴수학학교 교사
지난 20세기가 이성적 인간을 요구했다면 통합과 화합을 시대적 소명으로 하는 21세기는 미학적 인간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타고르의 미학을 통해 21세기가 지향하는 미학적 인간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세 가지 소통
타고르는 우리의 모든 정신적 능력은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보았고 거기에는 물질적, 이성적, 감성적, 세 가지 소통이 있다고 했다. 물질적 소통은 지난 세기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개발했는지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이익과 소용에 닿는 것이라면 자연을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굴었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마구잡이로 개발되어 파헤쳐진 자연은 이제 인간 삶을 위협하고 있다. 타고르는 인간이 자연 앞에서 마치 주인인양 굴었던 태도를 통해서 물질적 소통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물질적 소통 없이는 인간이 생존을 유지할 수 없다는 진실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 소통은 이성적 소통으로 이는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활용하는 것인데 타고르는 이를 마치 법정에서 우리의 지성이 자연을 증인석에 세워놓고 그 안에 감추어진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질문을 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인간의 이성적인 탐구에는 언제나 미묘한 자아의식이 결부되어 있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문명과 문화는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이성적 교류는 나와 남, 주체와 객체 등을 명확하게 나누기 때문에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며 여기에는 거리감이 있음을 강조한다. 마지막 소통은 바로 감성적 소통인데 타고르는 이것을 미학적 소통이라고 불렀다. 물질적 소통이 우리의 생존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이성적 소통을 통해서 인간은 지성적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마지막 소통을 통해서 사랑의 감정, 즐거움의 감정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타고르가 말하는 이 감정적 소통은 결국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타고르에 의하면 사람이란 외부 세계에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사랑하고 그 사랑 속에서 최상의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식이 내 존재의 빈 공간을 채워 나를 완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렇게 사랑한다면 세상과 나 사이에 거리감이 사라지고 세상과 내가 하나라는 일체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결국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다. 인간은 거울이나 물에 비춰보기 전에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나를 알아가는 과정 또한 외부세상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위에서 살펴본 세 가지 소통의 본질은 결국 인간 자신을 알아가는 활동이다.
두 개의 나 그리고 투명한 벽
인도의 철학에서 말하는 궁극의 목표는 깨달음이다. 이는 우리가‘나’라고 여기는 이 작은 나에서 벗어나 큰 나를 깨닫는 것이다. 인도의 철학은 우리가 현재 나라고 느끼는, 수많은 제약 속에 있는 나는 결코 참된 내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나는 곧 신이며 이 세계 자체임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지점에서 타고르는 독특한 이야기를 한다. 타고르 역시 인간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하지만 두 개의 나 사이의 관계는 인도 전통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다. 인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서양의 전통에서도 인간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지닌 존재로 여겨졌다. 타고르의 독창성은 두 개의 나, 즉 ‘작은 나’와‘큰 나’가 서로 사이좋게 공존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타고르는 인도 전통에서 말하는 것처럼 큰 나를 깨닫기 위해서 작은 나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데 이렇게 큰 나와 작은 나가 친밀하고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을 바로 예술가라고 했다. 예술가는 큰 나와 작은 나 사이에 투명을 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교류가 용이한 것이다.
타고르는 이 투명한 벽을 예술가들이 갖고 있는 영감의 원천으로 보았고 이를‘보편적 인간의 마음’이라고 불렀다. 근대 서양 미학에서는 예술가를 천재로 취급하면서 일반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반면, 타고르에게 예술가는 보편적 인간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술작품은 외부세계에서 작은 나 안으로 들어온 것을 가지고 만들어진 개인의 내면세계가 투명한 벽을 통해서 큰 나로 간 다음 여기서 얻은 보편적 경험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재구성해서 외부 세상에 내놓는 것이라고 보았다. 타고르는 이처럼 예술작품이 두 번의 정제과정을 거쳐서 나오기 때문에 현실보다 더 진실하다고 했는데 이는 예술을 이데아에서 두 번 멀어진 것으로 보는 플라톤의 관점과 대비된다.
아름다움이란?
우빠니샤드에 보면 신이 이 세상을 만든 것은 즐거움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인도 철학은 이처럼 세상이 창조된 원인을 즐거움으로 볼 뿐만 아니라 창조자의 내적 본질도 즐거움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신적인 즐거움이 예술 작품을 통해서 얻는 즐거움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물론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느낀 즐거움과 인간이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느끼는 즐거움은 천지차이가 있지만 인도 미학은 인간이 예술 체험을 할 때‘나’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일상에서 해방되는 이러한 순간을 절대자로 향하는 터닝 포인트로 여겼다. 인도 미학에서는 이처럼 예술 활동을 통해서 화학적 변화를 거친 인간의 감정을‘라사(rasa)’라고 불렀는데 이는 인도 미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이다. 인도 미학은 이처럼 인간의 감정을 일상적 감정과 일상을 초월한 감정으로 나누었다. 라사가 감상자 안에서 일으켜지는 예술적 즐거움이라면 미는 예술가가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외부의 객관적 사물로 형상화시켜 놓은 것이다. 즉, 라사는 감상자의 주관적 체험이고 미는 생산자의 객관적 표현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인도 미학은 객관적인 미와 주관적인 즐거움인 라사를 같은 것으로 보았으며 예술의 생산자와 감상자가 감정적 경험을 나누는 것을 중요시했다.
타고르는 주관과 객관을 이어주는 이러한 인도 전통 철학에서 얘기하는 미의 개념을‘서로 다른 성질을 융합시키는 미’의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타고르는 미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거미줄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거미는 사방팔방으로 거미줄을 치면서 자신은 중심에 머물러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은 중심에 머문 채 주변 세상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활동은 추한 것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멀리 있는 것을 가깝게 만들고 낯선 것을 친밀하게 바꾼다. 그것은 ‘나’와‘나 아닌 것’사이에 천 개의 다리를 놓는다. 아름다움이란 이처럼 영혼과 물질 사이에N놓이는 다리다.
21세기, ‘다름’을 추구하다
타고르에게 미학은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여정이고 예술은 그것을 기록하는 활동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타고르는 이 세상을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아름다움을 직관할 수 있다고 한다. 아름다움을 설명하면서 타고르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세상 밖의 시선’으로 볼 것을 이야기한다. 사물의 색깔이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빛에 반사되어 우리 각막으로 투영됐을 때 우리 시각이 인지하는‘일시적인’현상인 것처럼 지구에서 벌어지는 힘의 작용은 지구를 벗어나서 이해해야 제대로 알 수 있다. 이처럼 세상을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시선으로 보는 타고르의 이야기는 이 세계를 신 브라흐마의 현현으로 여기는 인도 전통 철학의 관점과 일견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타고르는 전통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는‘세계가 하나’라는 사실을 세상의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찾으려고 했다. 즉, 세상 안에서 동질성을 찾지 않고 세상을 하나로 묶어주는 보편법칙이나 원리를 찾았던 것이다. 세계 안에서 같은 속성을 찾는 것과 세계 밖에서 세상 안의 다양성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더 큰 법칙을 찾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타고르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 서로 같을 필요는 없다. 세계는 점점 좁아지면서 사람과 사람이 섞여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서로 다른 이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하는지 터득해야할 중대한 시점에 와 있다.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타고르의 주장이야말로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많다. 다름이 만들어내는 조화를 볼 수 있고 거기서 균형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미학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질이라고 타고르는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21세기가 요구하는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타고르는 같은 속성을 갖고 있는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세상을 꿈꾼 게 아니라 다른 속성을 갖고 있는 너와 내가 더 큰 세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생각은 지금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9호] 기고 -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0) | 2017.02.14 |
---|---|
[139호] 서강논문상 - 英祖의 對民詢問活動과 그 정치적 의미 (0) | 2017.02.14 |
[138호] 모교 서강대가 흔들리고 있다 (0) | 2017.02.14 |
[138호] 남양주캠퍼스와 서강의 방향성 (0) | 2017.02.14 |
[138호]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앞두고 함께 한다는 것 - <할머니의 먼 집>을 보고 (0) | 2017.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