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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40호] 물음을 참는 우리에게_김종현(독립서점<퇴근길 책 한잔>대표)

물음을 참는 우리에게

 

 

 

김종현 _ 독립서점 <퇴근길 책 한잔> 대표

 

어려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이 스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거리의 나무는 왜 저렇게 서 있고 사람들은 왜 저렇게 인사를 나누며 사람들이 숱하게 내뱉는 말들은 왜 하나같이 진실이 아닌 것 같은지.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 책방을 열면서도 세상의 스스러움을 거부하려고 노력했다. 우리 책방에서 모든 것은 주인인 나의 취향대로 흘러간다. 들여놓는 책 종류부터 인테리어와 분위기, 영업시간, 손님을 대하는 태도까지 하나같이 주인의 마음대로다. 따지고 보면 손님이라고 해서 왕이 아니라 그저 값을 치르고 물건을 교환해가는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 책방에는 진상 강퇴라고 크게 붙여 놓고 운영을 하며 과도하게 친절을 베풀지도 않는다. 그래서인지 우리 책방에는 주인장인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이며 스스러운 세상에 대해 함께 물음을 던진다. 간혹 내가 여행을 가거나 책방을 비우게 되면 자발적으로 손님들이 책방을 대신 맡아서 운영하기도 하고 책방에 어울릴 것 같다며 화분을 가져 오기도 한다. 자본주의라는 거대 물결 속에서 우리는 모두가 돈을 좇아 경쟁하고 시기하리라 여기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책방을 통해 알아가고 있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물음은 위험하다. 특히나 그 물음이 삶과 세상의 본질에 맞닿은 것일수록 그 위험은 배가된다. 물음이란 정해진 답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어려서부터 물음을 참는 훈련을 받고 자란다. ‘퇴근길 책 한잔이라는 작은 독립책방을 운영하는 나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일상의 반복 속에서 밀려오는 아득한 물음들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어 털어버리며 어느새 어른(이라 불리는 사람)이 되었다. 내 주변 사람들과 세상은 나에게 물음을 터뜨릴 시간을 주지 않았고 대신 그 자리에 그들이 정해놓은 답을 집어넣을 뿐이었다. 함께 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발걸음을 멈출 때마다 흔들림 없이 걷는 주변 사람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또 한 번 머리를 긁적이던 물음의 순간들. 그 순간들이 쌓여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물음이 터져 나왔고 주체할 수 없어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로 그 때부터였다. 나는 더 이상 이전의가 아니었다.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답을 집어넣으려는 손길을 거부하는가 된 것이다.

헬조선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라며 그리 특별할 것 없는 30여 년의 시간을 보낸 내가 책방을, 그것도 베스트셀러 한 권 없는 독립책방을 운영하며 자발적 거지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며 살게 된 것도 바로 이물음에서부터다. 학창시절부터 제법 성인이라고 불리던 시절까지 제시된 답을 정확히 좇아가며 관문들을 넘을 때마다 어디선가 찜찜하게 다가오는 공허감을 느꼈다. 그리고 사회의 답에 맞추어 간다는 것이 라는 사람이 가진 색과 모양을 탈색하고 깎아내는 과정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때마다 느꼈던 공허감은라는 고유함이 한 조각씩 떨어져 나갈 때마다 자아가 나에게 보내는 경고의 신호였던 것이다. 결국 사회가 나에게 주입했던 답이라는 것은 내가 아닌,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고분고분한 하수인을 만들기 위한 훈련일 뿐이었고 나는 과감히 이를 거부하기로 했다.

현대사회는 과잉의 시대이다. 모든 것이 넘쳐나고 또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이 말은 너도 빨리 목표를 세워. 그리고 그것을 달성해.”라고 치환될 수 있는데 여기서부터 우리는 스스로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만든다. 지금보다 더 많이 그리고 열심히 하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더 바빠져야 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목표를 가져야 할 이유가 하등 없다. 학창시절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머뭇거림 없이 친구들이 명징하고 눈으로 그려지는 꿈을 당당히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가끔 놀라곤 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스무 해도 살지 않았는데 어떻게 팔십의 내 모습을 막힘없이 묘사할 수가 있지? 그리고 그런 것 하나 딱히 없는 스스로가 겸연쩍어지기도 했다. 그 당시 이야기하는 꿈이라는 것이 주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 변호사, 의사, 판사, 소위자 들어가는 직업을 갖는 것, 돈 많이 벌어 자식 낳고 잘 사는 것 등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들의 꿈이라기보다 그들 부모에게 좋은 자식이 되게 해주는 꿈이었다. 결국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꿈이라는 것은 고민도 해보지 않고 그저 부모의 입맛에 맞는 꿈을 하나씩 마음대로 골라잡아 제 꿈이라고 둘러대는 것일 뿐이었다. 그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 상황을 넘기곤 했는데 물음을 마구 집어 던지게 된 요즘에 와서는 이와 같은 꿈이 가짜임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꿈 이야기를 믿지 않게 되었다.

물론 각자 성향에 따라 자신에게 더 큰 즐거움을 주는 삶의 요소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신나게 춤을 출 때 즐거울 것이고, 또 누군가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힘을 얻기도 한다. 또는 조용히 생각에 잠기거나 독서를 할 때 충만함을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 보기에 그럴 듯한 꿈을 골라잡는 것보다 과연 나는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가를 면밀히 그리고 깊이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축구를 할 때 가장 즐거운 아이라면 축구를 평생 가까이 두고 할 수 있는 것 자체를 목표로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 가장 즐거운 일생을 살게 될 테니까. 그런데 사회에서는 이런 아이에게 박지성과 같은 축구선수가 되라고 말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가 박지성과 같은 선수를 꿈꿔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오히려 남 앞에서 박수 받고 주목 받는 것에 희열을 느끼거나, 아니면 돈 많이 버는 것 자체에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김연아가 되고 싶은 아이들은 금메달이 갖고 싶은 아이들이 아니라 피겨 스케이팅 자체를 사랑하는 아이여야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어야 할 것은 네 꿈이 뭐니?”가 아니라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 혹은 너는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니?”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이 단순한 명제를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잊고 사는가?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게다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이러한 실존적 자각을 하면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내가 50년 후에 죽는다고 하는 것과 당장 내일 죽는다고 했을 때 우리의 오늘은 어떻게 달라질까? 나는 서로 다른 이오늘이 다르지 않아야 충만한 삶이 라고 생각한다. 당장 내일 죽더라도 아쉽지 않은 오늘. 이런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보는 충만한 생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80년 혹은 100년가량의 삶을 미리 정해 놓고 그 안에 시간표를 짜듯 삶의 궤적을 채워 넣는다. 마치 미션을 설정하듯 몇 살에는 공부를 하고, 또 결혼은 몇 살이 적정하고, 노후에는 어떻게 할 것이라고 정해 놓는다. 초등학교 방학 때 만들던 원형의 시간계획표처럼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무도 모른.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은 시간이 얼마인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흐름 속에서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행하는 것, 나는 그것을 인생 제 1의 가치로 둔다. 원대한 목표, 그마저도 남을 위한 목표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눈치 보여서, 혹은 남한테 미안해서 주저하지 않는다. 체면 차리고 자존심 세우기 위해 보고 싶은 사람 못 보고, 하고 싶은 것 못 하며 살고 싶지 않다.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지금내가 살아있는 것만은 확실한 만큼 매 순간 좋은 사람들을 보고, 하고 싶은 말을 나누며 원하는 것을 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렇게 온전히 스스로 일상을 관리할 수 있는 자유, 바로 이것을 지켜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이러한 자유를 침해하는 요소들은 많다. 자본주의라는 치졸한 시스템은 그 구조가 정해놓은 논리-이를테면 인간의 이기심-를 따르지 않고 물음을 던지는 사람들의 인간적 존엄마저 위협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돈 없으면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적정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책을 팔며 이가 갈리는 자본주의의 치졸한 방해를 피해나간다. 우리 책방은 워낙 작아서 혼자 일을 해야 하며 결국 나는 1인분만큼의 노동을 통해 내 몸뚱이 하 나를 먹여 살린다. 큰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정당한 노동의 대가만큼은 얻고 있다. 노동의 대가 이상의 돈은 분명 누군가의 노동을 착취한 것이라고 믿기에 그 이상은 원치 않는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실존적 자각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 모두가 현재의 행복을 유예하여 미래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에 집중하며 살아간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는 박지성이 될 필요도 없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모두 유명 작가가 될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공비법을 알려주는 멘토가 아니라 내 안의 물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 맞는 친구이다. 어느 날 밥상을 앞에 두고 눈을 껌벅이며 밥그릇을 내려다보거나 신호등 앞에 서서 맞은 편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두 눈 질끈 감고, 하던 일을 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기계발서나 토익책을 손에 들 것이 아니라 깊은 물음을 던지는 시 한 편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사회가 그렇게 주입하려고 하던 정해진 답이 아닌, 스스로가 묻고 찾아낸 답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답은 개개인 각자의 고유한 것이며, 당연히 어느 것도 오답이 아니다. 그저 각자의 답을 찾아 살아가고 그것이 서로의 고유성으로 인정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정해진 가치의 틀에 가두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력질주를 할 필요도, 의무도 없다. 너른 광장에 서서 각자 가고 싶은 방향대로 각자의 속도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물음을 참지 않아도 된다. 물어도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