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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40호] 세상은 당신의 ‘쓸모’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_천주희(『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저자)

세상은 당신의 ‘쓸모’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천주희 _『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저자

 

나는 일을 하고, 글을 쓰고, 연극을 한다. 언제부터 나의 경제활동과 창작활동이 분리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의 노동이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할 때부터, 어쩌면 나는 빈곤의 숙명을 애써 덤덤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석사과정에서 어떤 연구를 하고, 어떤 지식을 생산하든지 그것은 남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 삶의 과제는 늘 생존 그 언저리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매 학기 값 비싼 등록금을 지불하고,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졸업할 때쯤 덤덤함은 막막함으로 이어졌다. 여느 취업준비생처럼 여기저기 원서를 내보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책을 썼다. 연구, 글쓰기, 공연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거나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그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다만, ‘원고료가 조금 일찍 들어왔으면..’,‘ 연구비가 조금 더 많았으면..’, 나의 글쓰기 노동이 조금 더 비싼 값으로 교환되지 못하는 것에 서운함을 느끼고는 했다.

   

의미 있음의 무의미함

 

어느 날, 서강대학신문 편집장이 연락을 해왔다. 이번 호에서 무의미한 것들의의미 있음에 대해 다루고 싶은데 원고를 써줄 수 있겠냐는 청탁이었다. 사회가 만들어 낸 의미로부터 빗겨 서서 다른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편집장은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의 의미, 그 가능성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루의 말미를 얻어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의미 있음과 무의미(의미 없음). 경제적 활동과 비경제적 활동. 둘 사이를 연결하는 쓸모와 쓸모없음.’나는 이런 단상을 끼적이며 지식/노동자의 쓸모에 대한 글을 써보겠노라고 했다. 오늘도 쓸모없는지식을 생산하느라 책상 앞에서 끙끙거리며 밤을 지새우는 우리의 이야기를 말이다.

의미 있음과 무의미함은 말장난이다. 의미란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처음부터 의미 있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연구를 하는 나로서는 늘 의미 있는 것, 주류적인 것의 계보를 의심하고 질문하는 삶의 태도가 몸에 배어있다. 의미와 무의미함 사이에서 느끼는 불편함. 나는 질문을 바꿔보기로 했다.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인가, 의미 없는 것인가에서누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누가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드는가.

예술가들은 때로의미 있음을 전복하거나 전유한다. 날이 풀려 친구들과 복정마을을 산책하던 중 나는 <무의미의 축제>라는 작품을 보았다. 길가 쇼윈도에 전시된 작품이었다. 작가는 점선들을 연결해서 그림을 그렸다. 작품을 바라보며 연신..”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이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잡힐 듯 말 듯 한 무/의미의 경계에서 점선을 따라가 보았다. 방안에 앉아 몇 날 며칠 점선 잇기를 하고 있을 작가가 떠올랐다. 만약 유명한 작가가 같은 행위를 한다고 상상해보자. ‘이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의미를 필히 담고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독해 불가능성은 오롯이 관객 몫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혹은 이해했다고 믿는 판단으로 무의미성을 재단하기도 한다. 의미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데 행위자의 자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타인이 생각하는 의미, 이미 사회적으로 의미 있다고 가치가 부여된 것이 의미 있는 것이라 믿는다. 더욱이 그것이 권위나 권력을 지녔다면 의심의 여지가 들어 설 자리는 사라진다.

모든 행위에는 다 의미가 있다거나, 다 무의미하다는 것도 말장난이다. 그러니 이 말장난 같은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행위에는 다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어떤 행위에 대해 의미부여를 했다면, 그리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긴다면 그것 자체가 의미이다.

   

쓸모없음의 쓸모없음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몸짓은 결국 쓸모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인한다. 늘 목적어의 자리는 비워둔 채로, 우리는 마냥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대학도, 공부도, 논문도 무얼 위해 시작했고, 왜 하는지 잊어버릴 때가 많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늘 목적을 지닌 채 살지는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당장 눈앞에 놓인 삶의 과제들을 하나하나 수행하며 살다보니, 그렇게 살아져버리는 기이한 경험을 할뿐이다. 문제는 이 기이한 경험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기이한 경험은 생존, 경제, 독립, 자유, 지식, 생산 등과 같은 삶의 토대를 뒤흔들 때도 많다.

정말 대학에 가고 싶어서 진학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은 떠밀리듯 대학에서 공부를 한다. 부모와 선생님은훌륭한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학만 나오면 밥벌이는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주지하다시피, 이제 대학 졸업장만으로 밥 벌어 먹는 시대는 끝났다. 실업률은 날이 갈수록 치솟고, 웬만한 스펙으로는 경쟁이 안될 만큼기본스펙 자체 기준이 높아졌다. 한편, 하고많은 것 중에 하필이면 공부에 흥미를 느껴 오늘도 책의 안팎을 넘나들며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대학이라는 공간은 밥벌이를 책임져주지 않으며, 지식활동에서 쓸모를 찾는 사람들에게 더 가혹하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의 활동이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노동중심사회에서 그 행위가 비노동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소 지식노동의 쓸모없음을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지식활동만 이럴까. 예술, 가사, 농사 등 이 사회는 비노동, 비경제적인 것을있으면 더 풍요롭지만 없어도 괜찮은 것이라고 여긴다. 쓸모없는 일을 할 사람은 넘쳐나고, 언제든 쉽게 구매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누구나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만, 그 쓸모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활동에 유익한 존재로서 기능하는가, 못하는가에 따라 구분된다. 즉 그 활동이 돈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쓸모의 기준이 정해진다. 그런데 지식생산과 같은 일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필요하다. 10시간을 투여해야 겨우 글 한편이 생산된다. 그러나 그러기까지 숱한 시간을 책과 씨름하며 보낸 시간을 상상해보라. 고로 공부라는 행위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장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일인 셈이다.

우리는 지식의 쓸모와 필요를 강조할 때마다, 역설적으로 쓸모없음의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1년에 천여 명의 석사, 박사가 배출된다. 이미 배출된 학위자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말이다. 심지어 공공연구소마저 석사를위촉 연구원으로 고용해서 1개월 ~ 6개월 쓰고 버린다. 이미 노동시장에 석사 출신 대기자는 넘쳐나기 때문이다.

 

 

“‘현대화된 가난이 주요하게 가난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때는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알아차릴 수 없으며 그 본성 또한 파악하기 어렵다. 일상 대화에서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발전이나 현대화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면 그때까지만 해도 시장 경제에서 배제되어도 생존할 수 있던 이들은 구매 시스템으로 끌려 들어가 물건을 사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게 체계적으로 강요를 당한다. 이제부터 그들은 시장에서 나오는 찌꺼기를 가져다 살 수밖에 없게 된다. 학교라는 곳에 가본 적 없던 멕시코 오악사카주 인디언이 지금은 졸업장을 따기위해 학교에 끌려간다. 이들에게 졸업장이란 자신들이 도시인보다 얼마나 열등한지를 정확하게 측정해주는 증서이다. 그나마 이 종이 한 장이라도 없으면 도시에 나가 빌딩 청소부 일도 할 수 없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이런 것이다. ‘필요가 현대화될 때마다 가난에는 새로운 차별이 하나씩 더 붙는다.”

-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중에서

 

 

우리의 지식생산 행위가 무의미해진 이유는 소비사회에서 쉽게 버려지는 상품과 비슷하다. 이반 일리치가 말하듯이, 우리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시장경제에서 주장할 때마다 가난의새로운 차별을 얻게 된다. 그것은 대학 졸업장이 어느덧 노동시장에서 필수적인 입장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상품의 범람. 그 안에서 어떤 상품의 쓸모를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 사회. 이 속에서 대학은 학생을 소비자로 대하고, 대학교육은 상품이 되어버렸다. 하물며 지식생산물은? 상품은 교환하면 화폐 수익이라도 얻을 수 있지만, 한국에서 지식상품은 생산할수록 화폐로 교환할 수 없으며 오히려 돈을 지불하고 지식상품에 등록을 해야 한다. 지식을 생산하고,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 이유는 더 이상 사회가 지식인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당신이 생산한 지식상품만 갈취할 뿐이다.

그러니 나의 쓸모를 찾기 위해 애써 의미부여를 할 필요가없다. “나는 쓸모 있는 존재인가, 아닌가라는 질문 대신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그 안에서 삶의 동력을 찾으면 된다.‘ 쓸모’,‘ 의미’,‘ 필요에 묶이는 순간, 리의 삶은 버려지거나 배제되는 삶보다 더 위태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린다.

   

좌표를 잃어버린 그곳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

 

갓 논문자격시험을 보았을 때, 학과 사무실에 서류를 제출하고 일주일 동안 쉬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논문을 쓰기 전에 여행도 좀 다녀오고 긴장도 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쉬는 날이 주어지니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여행을 가기에 주머니는 너무 가벼웠다. 학교 외에는 딱히 가야 할 곳이 없었기에 목적지 없는 외출이 두려웠다. 그때 우연히 연극 <사천의 선인>(베르톨트 브레이트 )을 보았다. 휴가의 처음이자 마지막 외출은 그렇게 끝났다.

그해 내 나이 스물아홉, 나는 연극을 시작했다. 이후로 1년에 한 편씩 극을 쓰고 공연을 한다. 벌써 3작품을 올렸다. 작년에는 무용, 음악, 연극, 미술계 예술가들과 함께 <반딧불의 잔존>(2016)이라는 실험극도 상연했다. 첫 연출작이라 걱정이 많았지만, 공연은 잘 마쳤다. 집과 학교만 알았던 내가 연구실 바깥에서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고, 사람을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이라 여겼던 지점에서, 새로움은 움텄다.

몇 년째 내 책상 위에는 윤동주의 <>이라는 시가 붙어있었다. 무얼 잃어버렸는지 모르지만 계속 길을 걷는 화자가 내 처지와 꼭 닮았다고 여겼다. 여전히 나는 그 시에서 위로를 받고, 또 다음날이면 무얼 잃어버렸는지 찾는다. 졸업 후에는 소속이 사라졌다. 독립연구자가 생존하는 것 자체가 기이한 한국사회에서 독립연구자로 산다는 것은 녹록치 않았다. 석사학위만으로 연구비를 지원받을 곳도 없고, 논문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글을 쓸 것이다. 비록 쓸모없는 글이 되어 잊힐지라도, 나의 삶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