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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142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실천적 사랑 (고려대 석영중 교수)

도스토예프스키의 실천적 사랑’(Love in Action)

 

석영중_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F. M. Dostoevsky)에게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에 답하기 위해서 타인이라고 하는 거울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타인 속에 투영된 자기의 모습을 볼 때 비로소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도 사고도 모두 마찬가지다. 미하일 바흐친(M. Makhtin)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타자 지향성을 대화주의라 부른다. 대화주의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야 하고, 서로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접촉해야 하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야 하고 함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모든 것은 대화적으로 서로서로를 되비쳐주고 서로서로를 밝혀주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요컨대 대화주의란 존재와 존재간의, 의식과 의식간의, 말과 말간의 소통과 얽힘과 되비침을 의미한다. 만일 타자와의 대화, 소통, 상호조명을 배제하는 모종의 절대적인 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곧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악이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나만이 존재한다면 양심의 가책도 도덕적 성찰도 책임도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타자가 존재한다하더라도 그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양심의 가책이나 책임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화주의는 시학의 원리를 넘어 심오한 윤리적 개념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화주의를 책임의 윤리로 정착시킨 사람은 윤리학을 1 철학”(First Philosophy)으로 지칭한 엠마누엘 레비나스(E. Levinas). 레비나스의 윤리학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타자 지향성은 타자에 대한 전적인 책임으로 거듭난다. 레비나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중의 한 구절을 타자 윤리의 핵심으로 지적한다.

 

만인은 만인 앞에 만사에 대해 죄인이다.”

사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진술이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아마도 백치이거나 위선자일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영감을 받은 레비나스도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선이라 생각했다. 러시아어로 바꿔 말해보면 이 구절의 의미는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Kazhdyi pred vsemi za vsekh i vo vsem vinovat.

러시아어로 “vinovat”누구누구 탓이다” “무엇에 대해 죄가 있다를 의미하지만 또 책임이 있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결국 우리는 모두 모든 일에 대해 모든 사람에 대해 책임이 있다라는 뜻으로 읽힌다. 이것은 타자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타자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적인 정의의 문제도 아니고 인과율의 문제도 아니다. 따지거나 논의해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이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세상의 악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증오와 심판, 살인과 학대와 폭력에 대한 대안은 이것 밖에 없다.

책임의 윤리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실천적 사랑으로 구체화된다.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 예술 전체, 사상 전체, 인생 전체의 결론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실천적 사랑이 언급되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부인이 수도원을 찾아와 장로 조시마에게 자신의 딜레마에 대해 조언을 구한다. 그녀의 딜레마는 마음속으로는 조건 없이 인류를 사랑하려고 하지만 가끔씩 대가를 바라게 되고 신심이란 것도 끊임없이 흔들린다는 것을 요체로 한다. 그녀의 하소연에 대한 조시마의 답이 바로 실천적 사랑이다.

그는 사랑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 하나는 공상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적인 것이다. 공상적 사랑(love in dreams)은 문자 그대로 그냥 마음속에서 하는 사랑, 추상적인 사랑, 관념적인 사랑, 생각 속에서 진행되는 사랑, 혹은 감정적인 사랑이다. 예를 들어, 멋진 이성을 향해 느껴지는 호감은 엄밀히 따지자면 공상적인 사랑이다. 또 우리가 흔히 쉽게 언급하는 인류에 대한 사랑 역시 조시마에 따르면 공상적인 것이다. 인류란 너무나도 방대한 개념이다. 하나의 개념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간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조시마는 어떤 의사가 한 얘기를 인용하면서 거대한사랑의 한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놀라게 된다. 내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인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공상을 할 때는 흔히 인류에 대한 지극한 봉사정신에 빠져들기도 하고, 만일 갑자기 그럴 필요가 생긴다면 사람들을 위해 실제로 십자가를 걸머지겠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단 이틀도 같은 방에서 어떤 사람하고든 함께 지낼 수가 없다. (...)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나는 하루만 지나면 그를 증오하게 된다.

 

조시마는 여기서 인류에 대한 사랑과 전 인류를 향한 막연한 봉사정신이란 것이 얼마나 쉽게 자기애와 자기만족을 덮어주는 몽상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바로 그만큼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큼 쉽다는 것은 진정 아이러니다.

실천적 사랑(love in action)이란 바로 내 앞의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감정이 아닌, 어떤 행위로서의 사랑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실천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때로는 나를 전적으로 희생해야 함을, 아무런 보답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베풀기만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혹은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인류의 한 구성원, 민족의 한 구성원인 내 이웃, 나에게 피해를 주고, 나를 힘들게 하고, 때로는 혐오스럽기까지한 가까운 누군가를 순전히 그것이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사랑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시마는 그것을 가혹한 일이라 말한다. “실천적 사랑은 공상적 사랑에 비해 가혹하고 두려운 일입니다. 공상적인 사랑은 사람들이 그것을 주목해 주는, 만족도가 빠른 성급한 성취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실제로 자기 생명까지 바치겠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며 모든 사람에게서 주목받고 칭찬받기 위해 무대 위에서처럼 얼른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러나 실천적 사랑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완벽한 학문이기도 합니다.”

조시마는 인간에게 이 사랑을 완성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토록 불가능에 가까운 사랑을 누가 완성할 것인가. 그러나 사랑하려는 시도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사랑에의 지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순간에 다른 누군가가 그 사랑을 완성시킨다. 그가 곧 신이다. “우리가 실천적 사랑의 완성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움 속에서 목격하는 순간 갑작스레 목표를 달성하게 되며 언제나 사랑으로 보살피며 언제나 보이지 않게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기적적인 권능과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조시마 장로는 설교에서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일관되게 사랑을 이야기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실존의 조건이다. 사랑이 없을 때 지금 이곳의 현실은 언제라도 지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조시마는 지옥이란 결코 더 이상 사랑 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단언한다. 문제는 조시마의 설교가 너무나 수도원식이라는 점이다. 보통 사람들이 그토록 어려운 사랑을 어떻게 현실 속에서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랑만이 답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등등의 구호는 허망하고 조시마의 사랑은 너무 작고 초라하다. 그러나 현실적이고 거대한 악을 희석시킬 수 있는 것은 구호가 아니라 작고 초라한 사랑이다.

그래서 도스토에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유난히도 하나의 의미를 강조한다. 소설의 제사는 이점을 예고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의 복음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밀알의 변주로 울려 퍼지는 것은 파 한 뿌리이다. 여주인공이 언젠가 들었던 우화의 형태로 기술되는 이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옛날에 아주 심술궂은 할머니가 살았다. 평생 단 한 번의 선행도 하지 않는 이 노파가 죽자 지옥 구덩이에 빠졌는데 그녀의 수호천사가 곰곰 생각해 보니 언젠가 할머니가 밭에서 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에게 준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그 얘기를 했더니 하느님은 그것도 받아들여 할머니에게 자기가 베푼 적이 있는 파를 붙잡고 지옥 불구덩이에서 나오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요컨대, 단 한 번의 선행, 아주 작은 한 가지 일이 그걸 베푼 인간에게 지옥에서 나올 수 있는 가능성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는 이런 단 하나의 테마가 거창한 인류 구원 계획이나 제도나 이념들과 대비를 이루며 반복되다가 결국 밀알만한 믿음, 파 한 뿌리 만한 자선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결론으로 귀착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은 사랑, 하나의 사랑, ‘실천적 사랑은 마더 데레사의 한 번에 한 사람이란 글을 생각나게 한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 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4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당신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