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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41호] 전문등반을 하는 여성들의 주체성_김세옥

전문등반을 하는 여성들의 주체성

 

김세옥 _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 한국여성산악회

 

 

 

산에서 발견한 여성의 역사-산에도 여자가 있었다

등반은 무상(無償)의 행위이다. 올랐다는 사실외에는 어떤 보상도 없다. 물리적인 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니까 반자본주의 적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산에 간다. 등산에 입문한 후 나의 의문은 왜 목숨걸고 등반할까?’였다. 하지만 인류는 한계에 도전하는 위대한 본성으로 죽을 수도 있는 신대륙, 남극, 북극, 히말라야에 도전하며 인간의 대서사를 만들어왔다.

유산(遊山)을 목적으로 산에 가던 인류는 200여 년 전쯤부터 더 높이 오르겠다는 욕망으로 근대등반을 시작했다. 적지 않게 남아있는 조선 선비들의 유산기에서 알수 있듯 이전의 산은 도전의 장이라기보다 바이오필리아 적 즐거움을 주는 놀이터였다.

유럽에서도 눈과 얼음으로 싸여있는 높은 산들은 인간 접근을 불허하며 악마가 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한계와 위험에 도전해 온 인류는 1786년 알프스 최고 봉우리 몽블랑4810m에 오른다. 그것을 시작으로 히말라야 8천미터 봉우리들에도 앞다투어 올랐다. 초기 고산등정은 경쟁적으로 대규모 물량을 쏟아 붓는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1953년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영국이 시기를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식에 맞춘 일에서 보듯 고산정복은 국력과시의 수단이었다.

 

오늘날 등산은 대중화되어 있지만 초기 등반은 많은 물자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엘리트만이 가능했던 귀족등반이었다. 일제시대 백령회로 비롯된 한국의 근대 등반도 친일혐의를 벗을 수가 없으며 해방 후에도 대학산악부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이런 등반환경은 젠더적으로 불평등한 여성들의 접근을 매우 어렵게 했고 등반욕망을 가진 여성들을 좌초하게 만들었다.

필자가 산과 등반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입문하여 놀랍고 매력적인 등반역사에 빠져 있을 때 인간의 다른 역사가 그렇듯 여성의 역사는 보이지 않았다. 치열한 산의 역사속에 눈에 띄지 않던 여성의 희미한 발자국을 발견한 놀라움이 공부의 시작이었다. 척박한 등반환경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실천한 여성들의 역사와 궤적을 찾아낸 일은 여성학공부와 등반을 동시에 시작한 필자에게는 필연이었다. 남성중심의 산에서 여자들도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목숨걸고 등반한 흔적은 감동이었다. 등반을 인문학적으로 연구한 사례는 드물었고 등반하는 여성을 연구한 일은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등반은 남성의 전유였고 여성의 등반은 스캔들로 불리우기까지 했다. 등반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산악회 규율은 군대같은 상명하복이고 초기 산악회는 여자를 입회조차 시키지 않았을 만큼 등반문화와 조직은 여성에게 배타적이었다. 현재도 그리 달라지지 않은 풍토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등반 욕망을 추구하며 치마를 입고 산에 갔다. 발목까지 닿은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고 등반하는 여성들은 전복의 상징이다. 여성억압과 섹슈얼리티 통제의 상징인 치마를 입은 채로 산을 욕망하며 등장한 여성들은 여성 금기의 현장인 '산과 등반'에 균열을 내고 자신의 욕망을 실천했다.

 

등반은 예측 불허한 자연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등반가 앞에 주어진 장애를 극복하는 운동이다. 생존이 어려운 고산이나 수천길이의 거벽 등 대부분의 등반지는 자연의 가혹함과 가변성으로 위험이 상존한다. 고도로 단련된 강한 몸과 정신으로 집중해도 위험한 등반에서 그 행위를 지속하게 하는 육체적인 행위성과 정신적 사유의 결집인 이 등반수행성을 등반가들은 '알피니즘'이라고 부른다. 물리적으로 강하고 제도적으로 유리한 남성들도 추구하기 어려운 '등반과 알피니즘'을 자신의 삶을 관통시키는 테제이자 세계관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등반가들이 존재했다. 등반에 매료된 여성들은 도제식으로 힘들게 등반을 배우며 '등반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성장해왔다.

 

 

[그림1] 치마입고 등반하는 초기 여성등반가

(출저: 메스너, 레인홀드,정상에서(2012) )

 

여성들의 서사-강한 등반가/인간/주체성

 

등반의 한계에 도전하고 남성 주도의 산 문화와 조직에 저항했던 여성들의 등반은 여성주체로서 수행한 등반이라는 역사성을 남겼다. 가부장적 조직과 문화를 수용할 수 없었거나 귀속이 불가능했던 독립적인 여성등반가들은 남성적 규범과 질서와 충돌하고 조정하는 한편 끊임없이 그 경계를 교란하고 전복을 시도하며 자신들만의 등반성을 구축했다. 삶의 경로에서 대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산과 등반을 배치한 여성등반가들은 자신이 경험한 성차와 젠더적 경계의 모순을 갈등/전복/극복하게 된다.

70년대 여성 불모지의 산악지형에서 젠더/시대적 한계를 이겨내고 한국최초/여성/동계히말라야등정이라는 역사를 쓰며 안나푸르나8091m를 동계 등정한 김영자, 남성들의 세상과 불화를 마다하지 않으며 자주적인 등반을 추구하고 삶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최초의 여성/단독/동계/태백산맥종주라는 뛰어난 등반사적 자취를 남기고 "낮은 산"이라는 새로운 등반의 장을 제시한 남난희, 여성등반대라 할지라도 남성등반가들 지원하에 조직되었던 당시 풍토에서 자발작인 여성등반대를 조직하여 히말라야가 아닌 알래스카 맥킨리6194m를 자력으로 등반하여 여성/최초/자력/비아열대 등반이라는 기록을 남긴 <‘88년 여성 맥킨리등반대>, 뛰어난 체력과 등반력을 지니고 남성들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위력으로 토왕폭 빙벽등반을 로프없이 단독등반한 전위적인 등반가 김점숙,

 

이들의 성취는 여성등반가도 한계 극복의 가능성은 무한하며 전위적이고 첨예한 등반을 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생물학적 여성이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여성등반가의 물리적 힘과 등반기술력을 증명한 전설과 신화였다. 그 신화는 후배 여성등반가들에게 미래와 변화의 꿈에 대한 명징한 메시지가 되었다. 후배들은 선배들의 상처와 영광을 딛고 올라서 지금여기에서 나아감넘어섬을 도모하고 실현한다.

여성등반가들은 신화의 이면에 있던 배제의 상처와 젠더적 그늘을 걷어내고 스스로 주체가 되는 등반을 시작한다. 여성과 남성의 다른 문화, 관계, 소통, 몸 등의 차이가 여성등반가들에게 좌절과 부담으로 작동하여 남성들과 함께하는 등반을 거부하게 되고 여성들만의 등반과 연대를 모색하여 여성등반대를 조직한다. 강한 힘과 높은 등반기술을 필요로 하는 고산 거벽 등반은 성격상 남성/여성은 리더/보조, 선등/후등라는 성별화된 이분법이 강하게 재생산되는 문화였다. 그러나 스스로 조직한 여성들만의 알파인 거벽원정대는 성차별적 질서와 위계를 흔들며 자신들만의 꿈을 실현한다. 2006년 조직된 아줌마등반대는 등반의 발원지 유럽을 거쳐 2012년 남미 파타고니아 피츠로이3405m를 아시아 여성 최초로 등반해 주목과 찬사를 받았다. 2013년 다시 파키스탄 트랑고 타워6286m를 올라 여성등반대의 위력을 과시한다. 이제 고산거벽도 여성들만으로 등반이 가능함을 세상에 보여준 것이다.

 

산에서 좋아하는 것(욕망)을 하며(실현) 잘 나가는 그녀들

 

한 사람의 클라이머cilimber가 된다는 것은 일상적인 몸의 단련으로 힘과 등반력을 높여서 산이라는 공간을 통제할 수 있는 힘과 기술력을 체화한 힘센 몸을 지녔다는 의미가 된다. 힘이 생긴다는 것은 대상을 제압할 수 있는 강한 '몸적 파워'와 역경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의지력이 동시에 견지되어야 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여성등반가들이 몸의 단련과 강화인식적 여성주체가 확장되는 경험을 말한다. 물리적 힘이 쎄어지는 몸적 임파워링empowering은 개별 여성등반가의 등반현실과 삶에서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등반'이 인류에게 주는 위로와 쾌락을 여성들도 즐기며 산에서 주체적인 존재로 성장해왔다. 전문등반을 하는 여성들이 지니는 페미니즘적 의의는 성차와 젠더적 난관에도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가족/모성/결혼/로맨스 등의 이데올로기로 여성의 자발적 공모를 획득한 가부장제와 갈등하면서도 등반가로서의 욕망실현을 위하여 과감히 '비혼(非婚)과 비출산' 전략으로 젠더 역할을 조정했으며, '자발적 실업'과 자기자원의 개발로 등반 욕망과 생존을 구획하였다. 여성등반가로서 지닌 주체성과 행위성이 가부장적 시스템을 교란시킬 때 마다 억압과 차별과 소외가 노정되었지만 자신들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전면화하며 가족/연인/공동체 등 자신의 주변은 물론 시대와의 불화도 감행했다. 산과 등반에서 여전히 여성등반가의 욕망은 순조롭게 발현되고 있지 않지만 또 그런 만큼 여성주의 정치학적으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양가성을 가진다.

 

개별 여성이 억압과 장애 없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그것이 개인적 복지와 쾌락으로 구현되는 것이 여성주의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이 행위주체로서 자기욕망을 수행하고, 실존에서 배타적인 선택과 협상이 가능한 주체로 변화하는 것이 여성주의적 진화이다. 등반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높은 의지로 몸을 단련하고 고산/거벽을 등반하는 특수하고 힘든 과정을 수행하며, 그것을 통해 주체성을 획득하고 젠더 위치를 재배치하는 협상력을 보이는 여성등반가들은 젠더적 경계에서 다소 분열을 겪고 있긴 하지만 여성주의 실천의 주체이다. 자신의 힘과 주체성으로 등반욕망을 실천하고 있는 여성등반가들은 산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전문등반이라는 독특한 시간과 경험을 구성하며, '여성주의 정치성'을 구현하고 있다. 산이라는 현장에서 여성등반가들이 실현하고 있는 알피니즘은 여성주체성의 다른 이름이다.

 

 


주1) biophilia 인류는 오랜 진화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친자연적인 유전인자 가지고 있다는 미국 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이론이다.

주2) 등반가들은 정복이라는 제국주의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 예측할 수 없는 눈사태나 수천의 낭떠러지로 추락하여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인간의 존재는 대자연 앞에 절대 약하고 초라하다는 점을 절감하기 때문이고 신이 허락해야 잠시 다녀올 수 있다는 겸손함이 저절로 생기기 때문이다.

주3) 1808년 유럽 최고봉 몽블랑에 여성 최초로 오른 18세의 '마리 파라디스'를 남자들은 부추김과 대중적 명성을 얻기 위한 등반의 스캔들이라고 야유했다. 여성 최초 등정을 인정해주기보다 여성의 도전을 가십으로 취급하려는 남성우월주의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