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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43호] 사라짐의 과정을 지켜보는 일_이인규

사라짐의 과정을 지켜보는 일

 

<안녕,둔촌주공아파트> 발행인, <마을에숨어> 대표 _ 이인규

 

 

 

사라질 고향을 기록하기로 했다.

사회생활에 치이던 20, 힘들 때면 나는 늘 나의 고향, 둔촌주공아파트를 그리워했다. 이곳은 나에게 언제 와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길에서도 이렇게 흔들리는 일들은 많을 텐데, 재건축으로 이곳이 사라지면 나는 어디에서 위안을 얻어야 할까? 이곳을 떠나면 그리울 것이 분명한데 다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는 걸까? 이곳이 사라지고 나면 이렇게 아름다운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믿지 않겠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둔촌 주공아파트가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옮겨 담기로 했다.

 

아파트를 기록한다고 하면 건축물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가 둔촌주공아파트의 건물 형태를 매우 좋아하는 것은 맞다. 아주 어릴 적에 잠시 있었던 낯선 외국 생활 이후에 내가 다시 아는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해 준 것이 바로 둔촌주공아파트의 새하얀 타워형 아파트 형태였다. 지금도 빛에 따라 달라지는 둔촌 주공아파트 건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기록을 통해 남기고 싶었던 것은 단지 건축물에 대한 기록은 아니었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

기록을 통해 남기고 싶던 것은 내가 이곳에서 경험한 모든 환경과 모든 관계였다. 아파트 단지를 만들 때 원래 있던 작은 동산 두 개와 완만한 구릉 지형을 그대로 살려 만들었다. 그 덕에 미세한 오르막을 걸을 때 다리에 힘이 들어갔지만, 땅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매일 느꼈다. 아파트 동과 동이 연결된 관계, 그 사이에 놓인 작은 오솔길과 푸른 잔디밭, 놀이터와 쉬어갈 수 있는 정자의 배치 등 섬세한 고민과 배려로 만들어진 멋진 부분들이 단지 안에 가득했다. 많은 시설이 있었지만 불필요하고 인위적인 것은 거의 없었다. 꼭 있어야 하는 것들이 적절히 놓여 오가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안에서 살면서 맺은 관계들도 모두 귀하다. 어릴 적에 동네를 오가면 아는 사람을 늘 만났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인사를 나눴고, 서로의 안부를 전하는 짧은 대화도 오갔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던 사람도 시간이 가고 자주 보면서 더 반가운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자율적이고 자유롭되 서로 피해를 주지 않고 배려하는 선을 지켰다. 9시 이후에는 청소기를 돌리거나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는 서로 지켜야 할 생활의 규칙이 있었고, 이러한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다 같이 모여 논의하던 협의 과정이 있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어르신들의 자원봉사를 많이 보며 자랐다.

우리에게 주어진 녹지와 나무가 넉넉했기에 단지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물에게도 자리를 내어주는데 인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 베란다에 새가 둥지를 틀면 아기 새가 다 자랄 때까지 어미 새를 도와 먹이를 주기도 하고, 아이 어른 할 거 없이 오가는 고양이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키우다 너무 커버려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경비아저씨가 닭장을 만들어 돌봐주시기도 했다. 매일 아침 들리는 새 소리가 좋았고, 새를 위해 작은 집을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내가 말하는 고향이라는 것은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 특유의 정서에 가까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던 삶의 가치관 같은 것 말이다. 이러한 일들이 둔촌 주공아파트를 떠나고부터 너무 많이 사라졌다. 더는 내 방 창문으로 푸른 나무를 볼 수 없었고, 집 밖을 나서서 거닐 수 있는 오솔길도 없었다. 이웃과 인사를 나눠본 적도 없었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이웃들만 늘어갔다. 둔촌 주공아파트에서 살면서 만들어진 나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고 싶었지만 환경적으로 그럴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둔촌으로 돌아갈 수 있길 계속 열망했다.

 

기록

<안녕,둔촌주공아파트>를 시작한 2년쯤 되던 지난 201412월에 다시 둔촌 주공아파트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꼭 한번 다시 이곳에서 살아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나는 많이 아프고 지친 상태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곳에서 다시 치유되었고 힘을 얻었다. 하루 일과에는 짧은 산책과 창밖을 보며 잠시 쉬는 시간이 더해졌고, 이웃과 자연스러운 인사를 나누며 지냈다. 다시 내가 삶에서 소중하게 여기고 가치를 두고 싶은 것들을 지키며 살 수 있었다.

 

둔촌으로 다시 돌아와서 기뻤던 것은 내가 기억하는 그 삶이 '미화된 기억'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는 존재를 만들었던 과거의 기억이 거짓이 아니고, 아직도 이곳에는 실재한다는 안도감이 나를 다음 단계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동안 믿고 살아온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흔들릴 때 우리가 고향을 찾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나의 고향을 기록으로 담는 것도 미래로 나아갈 힘을 얻고, 새로운 생각과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기록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기록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기록은 단지 수장고에 잘 보관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가 되어야 한다.

 

사라짐의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지난여름부터 주민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매일매일 많은 것이 사라지고 있다. 사라짐은 현재 진행형이 되었다. 무너지는 모래성을 손으로 붙잡고 있는 기분이다. 그나마 모든 것이 온전했던 지난봄, 가장 반짝거리던 마지막 시간을 기록으로 남겨놓은 <안녕,둔촌X가정방문>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128일 나의 집 이사를 마지막으로 그 기록에 담긴 모든 집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 시절 각자의 이야기와 고민, 온기가 담겨진 집의 모습은 기록에 그대로 박제되어 기록에 참여한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원점이 되어줄 거라 믿는다. 그로부터 얼마나 자신의 삶이 더 나아갔는지 다시 되돌아가 생각해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상실은 이미 시작되었다. 사라지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은 겨우 견디고 있는 상실의 당사자인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너무 힘든 작업이다. 결국 사랑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는 이 과정을 기록으로 옮기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 시점에서 내가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은 사라지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 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하나라도 해결해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 애도하며 슬퍼하기 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야 한다.

 

재건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된 나와 같은 처지의 고양이, 나무들에 마음이 갔다. 둔촌 주공아파트에서 나고 자라다가 처음 낯선 환경에 도달했을 때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나를 떠올리며, 둔촌 주공아파트를 벗어나서는 살아본 적이 없을 존재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잘 적응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뜻이 맞는 분들과 모여 우리 동네에 함께 살던 동네 고양이들의 이사를 준비하는 모임 둔촌냥이의 활동에 함께 하고 있다. 3만 그루에 달하는 나무로 가득찬 둔촌 주공아파트에서 단 한 그루라도 더 살릴 수 있는 방법도 고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이 땅에 지어지게 될 새로운 아파트 단지에 둔촌 주공아파트의 기억을 심어두고 싶다. 완전히 다른 모습의 공간이 되겠지만, 다시 찾아와볼 사람들이 옛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작은 단서들을 새로운 공간에서도 발견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렇게 기억이 이어지고 지역과 공간에 대한 애정도 이어질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다시 이 지역에서 새롭게 둥지를 틀 많은 사람이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기고 간 목소리를 통해 자연을 벗 삼고, 이웃 간 마음의 벽을 허물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삶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우리의 둔촌 주공아파트는 비록 사라지지만, 이 터전을 사랑해온 사람들의 마음만은 다시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