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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43호] 우리 학교에는 성평등위원회가 있습니다_한나현

우리 학교에는 성평등위원회가 있습니다.

 

20171학기 성평등위원회 위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 석사과정 _ 한나현

 

 

아마 많은 서강대 대학원생들이 대학원 성평등위원회’(이하 성평등위)의 존재를 모를 것이다. 나 역시 총학생회 집행부로 일하면서 성평등위에 20171학기에 참여하기 전까지 성평등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소개를 위해 성평등위의 존재 이유가 적혀있는 시행세칙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서강대학교 대학원총학생회 성평등과 성적자율권 보장을 위한 시행세칙은 제 11조의 총칙에서 이 세칙이 서강대학교 대학원총학생회에서 성평등을 실현하고 특정 성별, 성정체성,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모든 구성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존중받는 생활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고 밝힌다. 이를 위해 설치된 기구가 과대표자 회의의 인준을 거쳐 매 학기 새롭게 구성되는 일반대학원 총학생회 산하의 성평등위원회이다.

 

이 시행세칙의 제정일이 무려 2008324일인데, 10여년의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 심지어 성평등위원으로 활동할 당시에도 이전의 성평등위가 어떤 이슈를 가지고 논의했고 또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그리고 했었는지에 대해 알 방법이 없었다. 더 이상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옛 문서와 사진들이 쓸쓸하게 나뒹굴고 있는 대학원 총학생회 싸이월드 클럽에서 , 성평등위는 몇 년 전 김조광수 씨를 초청한 행사를 했었구나-‘ 따위의 조각정보만을 알 수 있었을 따름이다. (학생사회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자료의 축적과 역사의 전승은 필수적인데, 특히 대학원 사회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그런 것에 무관심하다. 매번 다시 맨땅에 헤딩하기!)

 

그러나 이러쿵 저러쿵 불평해도 사실, 제정된 세칙을 찬찬히 읽다보면 2008년 당시 성평등과 성적 자율권의 보장을 위해 수많은 토의와 자료수집과 여러 절차를 거쳤을, 그때 당시사람들의 고민의 흔적들을 줍게 된다. 가령, 시행세칙 제 2조는 성평등 및 성폭력의 개념을 정의하는 조항인데, 정식화된 개념 2가지에 세부개념 7가지 그리고 거기에 더해 예시를 13가지 종류나 들면서 (세칙에 이런 구체적인 예시를 드는 경우가 있던가? 나는 처음 본다. 예를 들어, ‘ 술자리 벌칙의 일종인 러브샷을 강요하는 행위와 같은 예시들이 일일이 첨언되어 있다.) 무엇이 성폭력인지를 규명하고자 애쓴다. 이 조항들을 읽어 내려 가다보면, “ ‘원래 다 그런 거 아냐? 그게 뭐 어때서?’ 싶은 행동들도 성폭력이거든? 제발 좀 알아들어라!“ 하는 외침이 들린다. , 내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이런 외침을 듣게 되면 그 사람의 고민과 나의 고민이 이어지면서 우리가 함께 같은 목표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시간에 있어도 서로 만나게 되는 영화 <너의 이름은.> 적인 경험.

 

하지만 물론 이들이 남겨준 유산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세칙이 처음 제정될 당시에 이것은 만든 이들의 최선이 담긴 결과물이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개념들은 보다 더 촘촘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구멍을 메우기 위해 개정작업을 했다. 20171학기 성평등 위원들이 머리를 맞대어서 1) 성 정체성, 성적 지향에 관한 내용을 추가 하고 2) 남성, 여성', '양성'''으로 수정하고 3) 성폭력의 개념을 성적인 폭력(sexual violence)’ 뿐 아니라 성별화된 폭력 (gender violence)’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해서 정의하는 것을 골자로 시행세칙을 고쳐 썼다. 기존의 세칙에 켜가 쌓이는 것을 보면서 다음에 올 성평등위원은 또 어떤 눈으로 이 개정된 세칙을 보게 될까? 또 어떤 개정작업이 이루어질까? 라는 기대를 품었다. 이렇게 과거로부터 전달받은 메시지를 지금에 맞게 읽고 생각하고 고쳐 쓰는 일이야말로 (대학원 신문의 이번 호의 주제인) ‘기억, 기록행위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기억, 기록행위를 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러나 이렇게 달콤한 기대에 부푼 마음과는 달리 개정은 과대표자 회의에서 아무런 지적 없이 간단히 통과했다. 분명히 부족한 것이 많을 텐데 아무도 토론을 걸어오지 않았다. .지적받고 싶다. 귀찮은 일이 줄어서 기뻤지만 뒷맛은 씁쓸했다.

 

방금은 마치 학생사회가 성평등에 대해 아주 무관심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사실 성평등위를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성평등한 문화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2008년에 처음 시행세칙과 성평등위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사람이 그랬고, 성평등위의 활동이 기록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나에게 기고를 제안해준 대학원 신문사 편집위원이 그랬으며, 실태조사에서 자신의 피해경험을 자세히 기술해주었던 익명의 응답자가 그랬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회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을 막고, 보다 평등한 관계맺음의 방식을 만들어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20171학기에 성평등위에서 실시한 <성평등 실태조사> 문항에 대한 사람들의 길고 긴 답변들은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회가 폭력에 무방비하며, 피해자에게 희생을 감수하도록 함으로써 멀쩡한 척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러한 실상을 자세히 써 보내주는 마음에는 무언가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만 한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나는 사실 이 답변들이 버거웠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고 혹은 내가 잘 할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를 한 이상, 답변을 받은 이상, 이 무게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래서 지난 학기 동안 실태조사 결과를 홍보하고, ‘인권권리장전에 조사결과를 반영하고, ‘인권위원회를 설치하는 데에 이를 근거자료로 사용했다. 뚜렷한 성과가 있었는가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첫 번째, 홍보가 잘 되었다면 문의가 많이 들어올 텐데 그것도 아니고, 두 번째, ‘인권권리장전은 애초에 규범적인 이어서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하고, 특히 세 번째, ‘인권위원회는 학교와 논의한 지 한참 되었지만 더디게 진전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인권위원회의 설치 구상이 얼마나 피해자를 고려한 것인지, 문화적인 측면은 간과하고 오로지 사건의 후처리만을 맡게 되는 것은 아닌지 등등 의문스러운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기억기록만 남는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각자의 몫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을 진행하고 있는지 서로 적극적으로 알리고 공유해서 많은 사람들이 학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과정에 접근할 수 있고, 관심을 기울이고, 관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참고로, 이번 학기에 성평등위에서 주력으로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부모원생의 학업권과 육아권 보장 프로젝트(가제)’이다. 이 프로젝트의 주제 역시 지난 학기 실태조사에서의 요구를 반영하여 선정한 것이다. 학교 내에 육아에 필요한 서비스와 공간을 마련하고, 홍보하는 일을 계획하고 있다. 수유실 공간을 늘리고 환경 개선하기, 학내 혹은 학교와 연계된 보육시설 요구하기, 부모원생 커뮤니티 만들기 등등을 떠올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될 것 같다. 대학원생의 육아가 학업을 포기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대학원 사회가 함께 노력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일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침 총학생회에서 <대학원생 연구환경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니 이를 통해서 상상력을 나누어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