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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33호]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자발적 감시의 시대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자발적 감시의 시대[각주:1]



이희은_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부교수




프라이버시의 시대는 끝났다?

      2010년 페이스북의 창업자인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는 이제 “프라이버시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더욱 많은 정보를 더욱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일에 편안함을 느낀다는 이유에서다. 빅데이터 수집과 활용이라는 명목으로 우리의 사생활이 은밀하게 그러나 광범위하게 침해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주커버그의 말이 과장만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2013년 개봉된 다큐멘터리 <위 약관에 동의합니다(Terms and Conditions May Apply)>에서 주커버그는 자신이 했던 말과 배치되는 행동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아침 출근길의 주커버그에게 다가가 “정말 더 이상 프라이버시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주커버그의 첫 대답은 “이거 촬영하는 겁니까? 카메라 좀 꺼주시겠어요?”였다. 결국 프라이버시가 사라져가는 시대를 주도하는 그에게도 프라이버시란 여전히 중요했던 것이다. 

     2015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일상적으로 전화와 인터넷과 SNS 등을 사용하며 스스로 사적 정보를 노출하는 일, 즉 프라이버시를 포기하는 일에 익숙하다. 심지어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고 안전하며 즐거운 일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학교 주변 범죄가 많이 일어나면 학교를 정상화하는 것보다 CCTV를 설치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방안이라고 믿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이 선택하는 자유와 개인에 대한 감시가 공존하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보여주는 모순적인 협력관계의 전형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에서 국가가 후퇴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국가 주권의 축소라기보다는 또 다른 방식의 통치의 확장으로 보아야 한다. 통치기술의 변화는 공식적인 것에서 비공식적인 것으로,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변화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행위자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림_홍한나



리얼리티 프로그램, 신자유주의의 비밀 극장

     그 행위자 중의 하나로 미디어를 꼽을 수 있다. 특히 관찰 카메라를 통해 사적 영역을 스펙터클로 만들며 오락성과 자기계발을 함께 강조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사례다. 닉 콜드리(Nick Couldry)는 오늘날의 텔레비전이 “신자유주의의 비밀 극장” 역할을 담당한다고 지적한다. 시청자들로 하여금 가장 사적인 삶의 공간 내에서도 외부의 감시와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든다는 점 때문이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구분이 점차 무의미해지면서, 공적 영역의 권위와 책임과 의무는 점점 얄팍해지고 사적 영역의 개인성과 자율성은 점차 상품화되어간다. 공적 영역에 대한 사회 감시 기능은 시들해지고, 대신 사회생활의 교과서이자 자기계발서로서의 역할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푸코의 ‘훈육 사회’나 들뢰즈의 ‘감시 사회’처럼 전지구적인 감시체계의 확산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텔레비전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행해지는 감시는 일상에 편재한 만큼이나 자발적인 감시의 형식을 띤다는 면에서 이전의 감시사회 논의와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상호작용성이라는 미명하에 자발적으로 감시체제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사적 정보를 제공한다. 여기서 오늘날의 자발적 감시사회가 보여주는 역설이 드러난다. 푸코의 파놉티콘이 감시의 목적과 주체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반면 오늘날의 감시는 그 목적과 주체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근대적인 감시체제에 대해서는 저항하게 되지만 오늘날의 감시체제는 쉽게 의식하지 못하거나 순응하게 된다. 전통적인 감시사회가 주로 불안과 위험과 공포를 토대로 작동했다면, 신자유주의 감시사회는 안전과 효율성과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한다. 국가나 권력이 현재의 불안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근대적 감시 체계로부터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켜켜이 쌓아 나가는 감시 체계로 이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과 데이비드 라이언(Bauman & Lyon)은 현대적 감시 사회를 단순히 빅브라더의 사회적 통제로 해석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감시 주체는 불분명해지고, 우리는 스스로를 감시하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관찰형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바람 잘 날 없는 가족이라도 적절한 감시와 반성을 통해 좋은 가정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만, 동시에 적절한 가족 환경을 조성하지 않으면 이 경쟁 사회에서 낙오될 것이라는 공포도 준다. 

     사실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흔히 사용되는 기법인 ‘관찰 카메라’라는 말은 이미 동어반복이다. 그럼에도 이 말이 통용되는 이유는 ‘관찰’이라는 것이 편집이나 인위적인 처리를 배제한 형식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보자면 관찰 카메라는 미디어의 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형식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텔레비전은 신자유주의를 스펙터클로 전시하는 “비밀 극장”의 역할을 하며, 그 중에서도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관찰 당하는 일(the work of being watched)” 자체를 생산력이자 생산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인클로저 운동에서 노동자들이 자유를 얻은 대신 생산 수단으로부터 멀어진 것처럼, 현대의 디지털 인클로저는 다른 사람을 관찰할 수 있는 자유와 즐거움을 주었으나 자기 스스로도 관찰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일감을 주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자발적 감시 체계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관찰을 빙자한 감시 체계는 ‘보이는 동시에 보기’라는 암묵적인 관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 누구도 이 체계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런데도 평범한 개인들은 자기 자신만은 그 체계에서 예외일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갖게 된다. 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감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제거하기 위한 몇 가지 방송 장치 혹은 관습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장치는 유명인의 활용이다. 외국의 경우와 달리 한국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대부분 유명인들과 그의 가족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독거의 삶(<나 혼자 산다>), 결혼의 삶(<자기야—백년손님>>), 육아의 삶(<슈퍼맨이 돌아왔다>, <오 마이 베이비>), 교육의 삶(<학교 다녀왔습니다>), 임신과 출산의 삶(<엄마를 부탁해>), 가족의 삶(<아빠를 부탁해>), 군대의 삶(<진짜 사나이>) 등 인생의 주요 순간들이 유명인들에 의해 시각적으로 재현될 때, 그 삶은 나와 관계가 있으면서도 나의 삶과는 달라 보이는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두 번째 장치는 가족과 가정 담론이다. 관찰 예능의 출연진은 모두 실제 가족이거나 유사 가족의 형태를 띤다. 실제 가족이 아닐 경우에는 최소한 나이나 계급 서열이라도 따져서 가족의 형색을 갖추려 한다. 이는 출연자들이 시청자들과는 무관한 ‘남’임을(즉, 다른 가족의 일원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들의 모습이 진실할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기제로 작동한다. 

      세 번째 장치는 내레이션과 인터뷰의 활용이다. 출연자들이 카메라 앞에 앉아 제작진의 질문에 답하는 장면은 이 관찰이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출연자 스스로도 주체적인 참여 의지를 갖고 있음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또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나 자막의 활용은 내가 보고 있는 관찰 내용이 몰래 엿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느끼고 있는 상식적이고 객관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관찰하는 사람과 관찰 당하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지우거나 줄이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타인을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은 그의 눈이 될 것인가 혹은 그에게 눈길을 줄 것인가에 대한 선택 문제다. 즉 출연자의 표현도구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에 대한 관찰도구가 될 것인가의 문제다. 현재 방송 중인 관찰형 프로그램들은 이 둘 사이를 오간다. 출연자들은 관찰의 대상이 되어 눈길을 받고 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눈으로 본 세상을 카메라를 통해 드러낸다. 아이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쓰인 자막이나, 고백 형식의 개인 인터뷰, 출연자의 실제 가족의 등장 등이 모두 그런 장치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의 주체가 유명인이라는 점에서 시청자들은 카메라가 관찰하는 대상이 내가 아니라 타자임을 인식하게 된다. 관찰이 감시와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렇게 잊혀 가거나 감추어진다. 

     일단 관찰의 체계에서 감시의 의혹을 걷어내고 나면, 관찰의 행위에 따르는 부담은 적어진다. 더군다나 타 자의 모습에서 가족의 일반형을 발견하고, 그 가족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부족함과 가능성을 깨닫고 변화하는 모습을 목격할 때는 더욱 그렇다. 관찰 예능은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스스로 변화하는 개인의 모습을 담아냄으로써, 타자를 관찰하는 일이 안전할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강조한다. 개인이 자기 스스로를 반성하고 다가올 기회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러한 덕목은 신자유주의의 일상을 구성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에서 탄생한 자기 경영 혹은 자기 관리라는 원리는 반성, 혁신, 자유 등의 인문학적 단어들을 취함으로써 자기의 출생을 숨긴다. 삶은 자신이 주도하는 것이므로 기계처럼 일하지 말고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엄격한 통제를 받는 학교나 군대 등의 근대적 훈육 장치를 거부하고 자율적인 자기혁신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라고 부추긴다. 이는 오늘날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친숙하게 접하는 자기계발의 논리이기도 하다. 


관찰이라는 자기계발서의 역설: 사적 영역이 없는 개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관찰 형식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가장 사적인 가족의 공간 내에도 카메라를 설치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일반적인 리얼리티 프로그램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기계발의 논리가 전달된다. 그것은 개인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면서도 오히려 그 기반이 되어야 하는 사적 영역의 보호나 프라이버시의 보장은 지켜주지 못한다는 역설이다. 이 역설은 프로그램 내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제시된다. 하나는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여 사회 조직 속으로 들어가는 설정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사적 영역이나 프라이버시를 기꺼이 공적 영역에 양도하는 모습이다. 이 두 방식은 일반적인 자기계발의 논리와 비교할 때 어떠한 특성을 보이는가?  

     우선 관찰형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그동안 자기계발의 논리가 거부해 오던 통제 조직 속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간다는 특징을 보인다. 군대 체험을 하는 <진짜 사나이>, 학생 시절로 돌아가는 <학교 다녀왔습니다> 등이 눈에 띠는 사례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강력한 사회 기구인 가족 속으로 들어가는 프로그램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관찰 카메라가 제시하는 자기계발 논리의 또 다른 특징은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 즉 사생활의 축소다. 화장실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단순한 수준의 프라이버시 침해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프라이버시의 침해가 개인의 정보를 경제적인 자원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에 따르면 프라이버시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분하는 핵심 요소다. 그는 프라이버시가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 또는 자신에 관한 정보를 격리하여 자신을 선별적으로 드러내는 능력”이며, “안전의 한 측면”이라고 정의한다(Bauman, 2011/2013, 130쪽).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모든 것을 사적 영역이라고 볼 때, 공적 영역은 프라이버시가 작동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수많은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고 교환하고 거래하는 과정을 바탕으로 작동하지만, 그 데이터베이스는 권력이나 경제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만 더 많이 개방되어 있으며 접근권에 있어서도 전혀 공평하지 않다. 감시 주체와 감시 대상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개인정보의 유통은 개인들 사이의 네트워킹이라는 이름의 판타지로 덮여 버리곤 한다.  

      그렇다면 사적 영역으로 카메라를 들이고 프라이버시를 포기하면서까지 전달하고자 하는 관찰 예능의 ‘교훈’은 무엇일까. 아르망 마틀라르(Armand Mattelart)는 노동현장과 정보화 현상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탄생한 감시 체계가 우리에게 일종의 자기 억압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관찰 예능의 특징과 한국적인 감시 사회의 특징을 함께 고려하면, 이러한 자기 억압 기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관찰형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모범으로 제시하는 개인이란 감정을 절제하고 노동 강도를 높이며 사회 조직을 위해서라면 강요된 참여에도 스스로 복종하는, 그러면서도 타인의 시선에 의해 목표가 달성된다는 점에서 불안정함을 느끼는 그런 존재다. 그리고 출연자가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을 시청자도 자기 스스로에게 대입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며 반성하게 한다. 이 억압 기제를 조금 더 ‘따뜻한’ 모습의 스펙터클로 만드는 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전통적인 틀과 반성이라는 개인의 자기감시다. 문강형준은 경쟁 서사를 중심으로 한 <슈퍼스타 K2>에서 그 누구도 심사가 공정하지 못하다거나 구조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참여자들이 내가 부족한 탓이니 열심히 해서 희망을 갖겠다고 말하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여기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환상적으로 봉합된다고 평가한다. 결국 <슈퍼스타 K2>는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낸 자기계발 드라마였다는 것이다(문강형준, 2012). 관찰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이러한 개인적 반성 서사에 가족 혹은 집단이라는 서사가 덧붙여지면서 한층 더 정교한 감시체제의 역할을 수행한다. 

     관찰형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마치 텔레비전 판 자기계발 드라마처럼 작동한다. 개인의 혼자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가족이나 집단과 비슷한 정도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가능할 수 있다는 판타지를 생산하고 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몸매 가꾸기, 요리하기 등에서부터 어떻게 아이를 기르고 훈육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연애하고 사랑하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적절한 방식과 적절치 않은 방식을 보여주며 가르친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을 일상적으로 시연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사실 가족, 군대, 여행은 사실 매우 사회적이고 공적인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조직의 구조보다는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개인의 모습만을 기억에 남기게 된다. 

     사람들은 사회적 조건이 나빠지고 삶이 고단하다고 느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래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판타지를 버리지 못한다. 사회적 경쟁이 심화될수록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도 커지지만, 그런 개인에게 돌아오는 보상이라고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메시지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안정된 직업이나 성공적인 삶 혹은 사회적인 정의와 공정성 등의 가치를 외치면서 ‘희망적인 삶’이라는 이룰 수 없는 꿈에 계속 매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적인 삶은 그것이 ‘리얼’한 것처럼 보일 때에만 간신히 설득력을 띤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관찰형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기댈 수 있는 현실에서의 희망의 끈이 그만큼 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 이 글은 필자의 “관찰 혹은 자발적 감시: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신자유주의 감시사회의 정경”(<한국방송학보>, 28(2), 2014)의 발췌요약문을 바탕으로 일부 내용을 수정한 것임. [본문으로]